[예스24 소설/시 MD 박형욱 추천] 우리가 잊은 얼굴들
『일곱 해의 마지막』 『밤의 얼굴들』 『시절과 기분』
지난 언젠가의 날들에 또 다른 색을 더해 새로운 이야기를 씁니다. 지금 이 소설들을 통해 우리가 잊은, 몰랐던 얼굴들과 만납니다. (2020.07.09)
어떤 얼굴은 애써보아도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래 잊고 지내서 또는 굳이 되새기고 싶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고요. 관계나 내면의 불가해한 작용으로, 누군가는 실제와 전혀 다르게 우리 안에 남아 예전의 모습을 지우기도 하지요. 소설은 자주 그렇게 흐린 흔적으로만 존재하는, 지금은 기억에서 자리를 잃은 이들을 불러냅니다. 지난 언젠가의 날들에 또 다른 색을 더해 새로운 이야기를 씁니다. 지금 이 소설들을 통해 우리가 잊은, 몰랐던 얼굴들과 만납니다.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저 | 문학동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작가 김연수가 한국전쟁 후 급변한 세상 앞에 선 시인 ‘기행’의 삶을 그린 책입니다. 시집 『사슴』으로 이름을 알렸던 기행은 전쟁 후 북에서 당의 이념에 맞는 시를 쓰라는 요구를 받으며 러시아 문학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합니다. 네. 시인 백석을 모델로 한 인물입니다. 김연수는 이 소설을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라 말합니다. 이렇게 김연수의 인물이 된 백석의 얼굴은 시대의 그늘 아래 쓸쓸한 빛을 내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시에 대한 열망으로 말갛게 반짝입니다. 오랜 세월을 건너온 문학의 어떤 얼굴을 만난 기분입니다.
누가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행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다. 평생 혼자서 사랑하고 몰두했던 자신만의 그 세계를.
_『일곱 해의 마지막』, 189-190쪽
『밤의 얼굴들』 (황모과 저 | 허블)
「모멘트 아케이드」로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을 수상한 황모과 작가의 소설집입니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일본 도심의 한 묘지에 연고 없이 홀로 머무르거나, 지하철역의 숨겨진 공간에서 은폐한 역사를 이고 살아가고, 타인의 기억과 감각을 통해 외면해온 자신과 마주합니다. 책은 우리의 진심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무엇을 기대하는지 반걸음 앞서 보여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하고 복원하고 연대하는 일, 그것으로 가능해지는 수많은 변화들을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분실된 우리 안의 조각들이 갑자기 나타나 마음을 한껏 작아지게 하더라도, 그것의 발견만으로 다음날이 조금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요.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여자가 도야마 공원을 미친 듯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도움을 구하는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숨이 막혔다. 당신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 얼굴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가, 도저히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었다가, 다시 너무도 잘 아는 선명한 얼굴이 된다. 그러다 내 삶과 일절 관계없는 누군가의 얼굴로 둔갑해 멀어진다. 그녀의 얼굴들이 내 머릿속을 휙 가로지른다. 구슬프게 울며 내 마음속에서 언제까지나 배회한다.
_『밤의 얼굴들』, 135-136쪽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은모든 저 | 민음사)
이야기하거나 듣기 위해 타인에게 시간을 내어줄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흐르던 세계는 잠시 멈춥니다. 그 정거장에서 우리는 궤도를 점검하거나 연료가 충분한지 살피고 가끔은 다른 이의 걸음에 맞춰 짧은 여행에 나서기도 하지요. 책은 그 멈춤의 시간을 조명합니다. 주인공 경진이 일상의 정거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들로 분주하고, 그와 함께 그들은 경진의 짐작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엄마는 예전에 알던 모습이 아니고 오랜만에 본 고교 동창도 예기하지 못한 말을 들려주지요. 책은 곁에 두고도 몰랐던, 친근한 이들의 생경한 얼굴을 비춥니다. 경진의 휴가가 마무리되어갈 때쯤 알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우리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요.
듣고 보니 신기하다고 경진은 맞장구를 쳤다. 사실 경진에게 가장 신기한 것은 따로 있었다. 엄마 입에서 ‘재미’라는 말이 연거푸 나오는 모습. 그야말로 전에는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는 신기한 일이었다. 경진은 산책을 하며 발견한 것을 더 들려 달라고 했다. 그러고 짐을 찾으러 가는 길에 지나가는 말처럼 질문을 던졌다.
“엄마, 어제부터 뭐에 씌었는지 사람들이 저한테 와서 막 묻지도 않은 별별 얘기를 다 해 주더라고요. 엄마는 저한테 뭐 하고 싶은 얘기 없어요?”
“하기야, 그때 얘기를 하기는 해야겠지.” 엄마는 자못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하는 게 좋겠다.”
_『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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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고르고 사고 팝니다. 아직은 ‘역시’ 보다는 ‘정말?’을 많이 듣고 싶은데 이번 생에는 글렀습니다. 그것대로의 좋은 점을 찾으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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