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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윤이 칼럼] 난해함과 명료함 사이
<월간 채널예스> 2020년 5월호
그래픽, 사진, 일러스트 모든 버전의 시안을 만들어 본 책이 되었다. 동네서점 한정판으로 진행하는 것은 그동안 잘 몰랐었는데 이 기회에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마케팅적인 면을 두루 살펴볼 수 있으면서 두 가지 표지에 대한 반응도 흥미로웠던 작업이었다.(2020. 05.11)
‘피드백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좋은데, 난해하다”이다. 인하우스 디자이너일 때부터 왜 나는 난해한 작업을 항상 먼저 하는 것일까. 그 난해함의 기준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책 표지 디자인은 하면 할수록 쉬워지지는 않지만 생각과 손은 빨라진다. 그리고 많이 할수록 강단이 생겨서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초연해지는 점도 있다. 처음부터 원하는 게 무엇일지 빨리 파악하고 컨펌을 위해 들이는 시간이 단축되게 한다. 지금은 대부분 원하는 스타일에 맞는 디자이너에게 의뢰하다 보니 그럴 일은 거의 없지만, 기존에 하지 않았던 스타일을 해보고 싶어 하는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매번 새로운 표현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표지에 어두움과 밝음을 함께 담기
권여선 작가의 표지 작업을 하게 되었다. 대략의 줄거리와 함께 내용을 파악한 상태에서 여러 가지 제목의 안이 있었는데 일단 어두운 느낌이면서 슬픈 제목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어두운 면을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는 않아 망설여졌다. 그러다가 최종 확정된 제목이 『레몬』이라는 연락을 받고서는 표지에 레몬 컬러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몇 개월 전 가지이 모토지로의 『레몬(다른 레몬 책입니다! 』 (북노마드, 2019)이라는 책 작업을 마친 상태였는데 제목은 같은 『레몬』이지만 완전히 다른 레몬이었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검정색과 맞았는데, 내용에서 언급되는 빛을 상징하는 레몬에 가까운 화사한 노란색과 어두움을 상징하는 검정색이 교차하며 그라데이션으로 강약을 주는 시안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추상적인 그래픽을 적절히 섞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각양장으로 제작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후가공도 많이 고민했는데, 은색 부분은 은박을 사용하여 후가공에 힘을 싣는 방향으로 작업했다.
이 시안의 피드백은 난해하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표현을 하기는 했으니 독자들이 뭔가 공감할 시안도 필요했다. 그나마 최종 시안에 가깝게 갔던 이미지가 있었는데, 굴곡이 있는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대고 좋아하는 딸아이의 얼굴이 굴곡 때문에 형체가 흐리면서도 컬러가 있는 부분은 번짐이 있어 재미있게 보였다. 이때 레몬이나 어떤 형체가 뿌옇게 보이는 컨셉으로 잡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시안을 추가하였다.
추상적인 그래픽은 일단 접고, 레몬이 뿌옇게 보이는 시안에 배경을 검정색으로 하고 레몬의 흐린 정도를 몇 단계로 수정해보았다. 미묘한 차이지만 레몬의 흐린 정도에 따라 빛이 더 발산되어 보이기도 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기도 했다. 이미지가 하나의 레몬으로 가기 때문에 타이틀 자체에도 힘을 실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다양한 타이포 중에 힘을 뺀 명조체로 가게 되었고 레몬은 좀 더 선명한 이미지로 결정되었다.
그 외에 추가로 요청한 것은 일러스트가 들어간 스타일이었는데 내용과 꼭 밀접하지 않더라도 조금은 젊은 느낌의 컬러나 이미지가 들어갔으면 하는 것이었다. 사실 일러스트는 어떤 이미지를 정할지 고민하는 시간부터 구도, 표현 방식에 따라 많은 시간이 필요할 뿐 아니라 열심히 그렸다 해도 마음에 안들 때가 태반이다. 어떤 소스를 가지고 그리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용 안에서 뽑아낼 수 있는 소스가 없어 보였다. 인물을 표현하는 것은 너무 어두우면서 표현에 제약이 많았다. 사물 역시 이 책의 분위기에 맞게 그리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다. 갑자기 집 한구석에 모셔둔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을 다 꺼내야 하나... 고민하던 중, 담당 에디터의 메일이 도착, 설명 중에 주인공 언니의 치맛자락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치마?!!” 서둘러 그 부분을 다시 찾아 읽어보니 언니의 치마는 노란색이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고민 없이 풍성하게 힘 있는 노란색 치마를 강조한 구도에 치마 아래로 살짝 보이게 언니의 다리를 그렸다. 배경은 차갑고 스산한 군청색을 깔고 포인트로 오렌지색 신발을 넣었다. 뒤표지로 연결되는 치마는 풍성함 뒤에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대비되는 밝은 톤과는 다르게 이면의 어두움을 보여주고 있다. 강한 컬러 조합 외에 치마 위의 동그란 문양이 반복되게 하거나 표지 여백에 노란 열매 같은 것을 추가로 넣어 밋밋하지 않게, 이야기가 있어 보이면서도 젊은 느낌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조금 따뜻한 느낌으로 접근해보고 싶기도 해서 배경이 아주 차갑지 않은 다른 컬러 조합의 시안도 추가했다.
검은 배경의 레몬과 노란 치마 시안 중에 마케팅 팀과 편집 팀의 의견이 나뉘어 결국 두 가지 표지를 다 사용하게 되었는데, 레몬 이미지의 표지가 메인으로 가고 일러스트 표지는 ‘어나더커버’라고 하여 동네서점 한정판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양장에 싸바리로 된 레몬 이미지 표지위에 일러스트 표지를 커버 형태로 씌우는 것이었다. 밝으면서도 대비가 강한 일러스트 표지를 벗기면 검고 차분한 노란 레몬의 표지가 나온다. 특별히 벨벳 코팅(혹은 스킨 코팅)을 하여 벨벳과 같은 촉감이 느껴지게 하였는데 벨벳 코팅 특유의 질감, 무거운 느낌에 묻히지 않도록 레몬 이미지 부분은 살짝 반짝거리도록 에폭시를 입혔다. 이후 벨벳 코팅 특성상 만진 후 손자국이 남는데, 검정색이라 손자국이 더 두드러지기에 일반 무광코팅으로 변경했다.
그래픽, 사진, 일러스트 모든 버전의 시안을 만들어 본 책이 되었다. 동네서점 한정판으로 진행하는 것은 그동안 잘 몰랐었는데 이 기회에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마케팅적인 면을 두루 살펴볼 수 있으면서 두 가지 표지에 대한 반응도 흥미로웠던 작업이었다.
레몬
권여선 저 | 창비
매력적인 미스터리 서사는 읽는 이를 이야기 한가운데로 순식간에 끌어당기는 놀라운 흡인력을 보여주며 장르적 쾌감마저 안겨준다.
열린책들에서 오랫동안 북디자인을 했다. 현재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권여선> 저14,400원(10% + 5%)
2016년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로 제47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수많은 독자를 매료한 권여선이 3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 『레몬』을 출간했다. 2016년 계간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을 기념해 발표했던 중편소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를 수정·보완하여 새롭게 선보이는 이 소설은 2017년 동명의 연극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