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는 스파이, 전설이 되다
『산책자의 인문학』 5편 하드보일드 문학가 존 르 카레와 런던
사기꾼의 아들이자 스파이였던 존 르 카레의 소설이 전설의 록 밴드 비틀스와 함께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전설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2019. 10. 25)
전업 스파이가 문단의 ‘비틀스’가 된 사연은? - 존 르 카레와 런던, 베를린
영화 <범죄도시>에서 형사 마동석(마석도 역)은 목욕탕 안에서 거들먹거리던 문신투성이의 건달을 제압하고 그에게 계란 껍데기를 까게 한다. 그리고 그가 까준 계란을 먹고는 “계란이 왜 이렇게 퍽퍽해”라고 타박한다. 그러자 건달은 이렇게 변명한다 “삶은 계란이라서…”
뜬금없이 영화에 나오는 삶은 계란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가 신문사에서 4년 넘게 진행한 인터뷰 코너 이름이 ‘하드보일드’이기 때문이다. 완숙(hard-boiled) 계란을 좋아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은 물론 아니고, 내가 하드보일드 문학의 굉장한 팬이기 때문이다. 스파이?추리 소설 장르로서 사건에 감정이나 도덕적 판단을 이입하지 않고 냉철하고 건조하게 묘사하는 하드보일드 문학의 특징이 인터뷰를 통해 지향하려 했던 방향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여겼다.
사기꾼의 아들, 스파이, 그리고 소설가
그렇다면 하드보일드 문학의 성지는 어디일까? 바로 ‘007’과 ‘셜록 홈즈’의 도시 런던을 첫손에 꼽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여기서는 수많은 하드보일드 문학가 중에서도 소설과 가장 어울리는 삶을 산 인물인 존 르 카레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안개의 도시로 불리는 런던은 스파이 소설과 추리 소설의 도시이기도 하다. 사진은 런던을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이 궁전 북부에 위치한 시계탑이 바로 빅벤이다. ⓒ이서현
존 르 카레의 본명은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웰로 1931년 10월 19일 영국 잉글랜드 남부의 도싯 주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근대 유럽 어학을 전공한 뒤, 1959년부터는 외무부 서기관으로 서독의 본과 함부르크에 주재했는데,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런데 훗날 사뭇 평범해 보이는 이 이력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이 밝혀진다. 주간지 《뉴스위크》의 취재 결과, 그가 실제로는 외무부 서기관이 아니라 영국 정보부 SIS와 MI-5, MI-6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스파이 소설을 쓰는 작가인 그는 실제로도 ‘맥스웰 나이트’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던 스파이였던 것이다.
그의 진짜 직업을 둘러싼 논쟁 못지않게 재미있는 것이 존 르 카레라는 이름이다. 그는 가명을 쓰는 스파이의 특성상 실명으로 책을 출판할 수 없었고, 상관이 책을 읽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가명으로 내더라도 인세를 받는 것이 문제였는데, 그는 고민 끝에 이런 방법을 썼다. 은행에 입금된 인세를 바로 찾지 않고, 예금액이 일정 액수에 도달하면 연락을 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가 공전의 히트를 치며 베스트셀러가 되자, 마침내 은행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전화를 받은 이후 그는 기분 좋게 사표를 던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법한 로망을 실현한 인물이라 하겠다.
그는 자신의 필명을 이렇게 설명한다. “내 필명은 그냥 머리에서 떠올랐다. 어디서 나온 이름인지는 정말로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을 믿지 않은 기자들이 끈질기게 질문을 던지자, 그는 귀찮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출근길에 늘 다니던 구둣가게에서 훔친 이름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가게의 소재는 파악되지 않았다. ‘르 카레’는 프랑스어로 ‘네모꼴’이라는 뜻인데, 여러 평론가는 “그 이름은 아무것도 상징하지 않지만 그 이름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아리송한 해석을 내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인도 음식의 이름과 같아서, 그의 소설을 내는 출판사에서 사은품으로 레토르트 카레를 주었던 일화도 있다.
존 르 카레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상류층이 되고 싶어 안달하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 여러 평론가는 옥스퍼드대학교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그를 귀족 엘리트 계층이라 생각했고, 그의 소설 속 캐릭터 ‘스마일리’ 역시 작가의 모습을 투영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그동안의 모든 평론을 수정해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존 르 카레의 아버지는 권력층이기는커녕, 세 살 때 아내와 이혼하고, 수없이 사기 행각을 저지르다 무려 300억 원에 달하는 빚을 남기고 화려하게 파산한 직업 사기꾼이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사기 행각에 써먹기 위해 자녀를 명문 학교에 보냈으며, 귀족 엘리트 계층 자녀만 다니는 학교에서 그는 감출 것이 많은 아이로 살아야 했다. 이런 배경을 생각할 때, 그가 진짜 스파이가 되고, 또 스파이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학문의 도시 옥스퍼드의 전경. 르 카레는 세인트앤루이스 공립학교를 거쳐 스위스 베른대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근대 유럽어학을 전공했다. ⓒ이서현
시대정신이 담긴 소설, 전설이 되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 , 『리틀 드러머 걸』 등 여러 히트작 중에서도 그의 대표작은 단연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다. 존 르 카레는 이 작품으로 막대한 부와 국제적 명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서머싯 몸 상, 영국 추리 작가 협회상, 미국 추리 작가 협회상까지 수상했다. 소설이 출간된 1963년은 전 세계가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1960년 쿠바 위기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때였다. 에서 런던과 베를린 등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는 그의 소설은 우리에게 단순한 재미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 사이에서 희생되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까지 던져준다.
그의 소설이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에 대해 한 사회학자는 이런 평가까지 내렸다.
“1960년대 동서 간의 긴장 상황을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존 르 카레의 소설이 필요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그런 치열한 갈등 상황에서 벗어나 가볍고 행복한 것을 동경하게 됐는데, 그런 소망을 화끈하게 충족시켜준 것이 바로 십 대 더벅머리 청년 4명이다.”
바로 사기꾼의 아들이자 스파이였던 존 르 카레의 소설이 ‘십 대 더벅머리 청년 네 명’, 즉 전설의 록 밴드 비틀스와 함께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전설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문갑식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며,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세계 곳곳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산책자. 사진작가인 아내와 함께 예술이 깃든 명소를 여행하고 거기에 담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울프손칼리지 방문 교수와 일본 게이오대학교 초빙연구원을 지냈다. 1998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월간조선》 편집장 등을 지냈다.
산책자의 인문학문갑식 저/이서현 사진 | 다산초당
예술가의 이름을 잔뜩 나열하거나 미술 사조나 기법 따위를 늘어놓지 않는다. 그저 도시와 마을을 천천히 거닐며, 독자와 대화를 나누듯 작품의 탄생 비화와 작가의 은밀한 사생활 등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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