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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15화 : 농성 100일째
『마터 2-10』 연재
병이 슬그머니 움직이고 부풀더니 열 두어 살 소년이 까치발을 하고 그의 머리맡에 앉았다. 진오는 놀라는 시늉을 하며 텐트 밖으로 기어 나와 마주 앉았다. (2019. 05. 29)
<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점심을 끝내고 한참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난간 앞에 섰는데 휴대전화의 우웅 하는 진동소리가 들렸다. 들여다보니 아내였다.
“나야, 당신 잘 있지?”
“밥 잘 먹구 잘 싸구 잘 자니까 삼쾌 건강이지.”
이진오는 일부러 너스레를 떨며 말한다.
“어뜨케 애들은 잘 지내지?”
“응 별일들 없어, 학교 잘 댕기고. 나 내일 거기 오라든데 김씨가.”
“왜 바쁠 텐데, 일 안 나가?”
“응 낼은 야간조야.”
“거 무슨 마트가 맨날 철야냐. 밤에 누가 사러 온대.”
“마트가 다들 그래. 참 어머니가 같이 가재서 모시구 갈라구.”
진오의 아내는 그가 복직투쟁을 하던 기간에 대형마트에 계산원으로 취직이 되어 가장 노릇을 떠맡았다. 어머니 윤복례는 진작 신금이가 하던 시장 점포를 정리했으며 시장은 앞에 재래 자가 붙은 뒤에 토박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 뒤를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이 물려받았다. 윤복례는 샛말 집에 살적에 동네 앞에 작은 구멍가게를 내고 살림을 돕더니 신식 슈퍼들이 들어서면서 저절로 그만두게 되었다. 진오네 식구들은 가산을 정리하여 스물네 평짜리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고 그나마도 다행이었다.
“오지 마. 별일두 없을 텐데.”
“머 문화 일 하는 사람들이 동영상 만든다구 우리보구 한마디씩 해 달래.”
“백일에 웬 난리들야. 콧방구두 안 뀔 텐데.”
“응 수고오.”
“잘 지내.”
아내와의 통화가 끝났다.
그는 김이 점심 때 바구니 속에 올려준 플래카드로 사용할 헝겊과 매직펜을 꺼냈다. 오후 땡볕이 따가워지기 시작했지만 바람이 불어서 제법 견딜만했다. 이진오는 천을 두 팔 길이만큼 펴서 한발은 올려놓고 다른 쪽엔 이미 갈색으로 변해버린 소변 담긴 페트병을 얹어 두었다.
농성 100일째
조태준은 파기한 협약을 준수하라
노사대화에 즉시 나서라
처음 것이 다섯 자, 두 번째가 글씨 열넷 빈칸이 셋, 세 번째는 글씨 열자 빈칸 둘. 그는 한 글자씩 크게 눌러 쓴다. 조태준은 글자에 불과했으나 그들을 해고하고 회사를 넘겨버린 장본인이었다. 지난 다섯 해 동안의 복직투쟁 기간 동안 수백 번 외친 이름이었으나 한 번도 본적이 없으니 얼굴도 인상도 모르는 상대였다. 서류 위에서 글자로만 익힌 이름이었다. 책에 의하면 그것은 자본의 추상적 기호에 지나지 않았고 이런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침묵 속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이진오와 그의 노동자 동료들과는 전혀 다른 시간 속에서 그들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며 기억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조태준에게 그들은 벽지의 흠집처럼 거기 있어 잠깐 시선에 걸리기는 하지만 일상에 지장을 주지 않아 익숙하게 되어버린 작은 흔적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이진오는 플래카드를 붉은 매직과 푸른 매직으로 써서 밧줄에 잡아매어 둥근 난간에 둘러쳤다. 매직을 들고 잠깐 생각하던 그는 그의 작업을 도와준 소변 담긴 페트병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조태준에 버금가는 자기편의 이름들을 그 물체에 붙여주고 싶었다. 힝 웃고 나서 진오는 병의 통통한 몸체에 매직으로 썼다. 깍새. 그리고는 다시 줄지어 놓인 소변 페트병을 하나씩 집어 들어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주안댁, 금이, 그렇게 써놓고는 그는 붉은 매직잉크가 번진 엄지 검지를 살펴보았다. 젠장할 베인 상처 같구나. 지숙 두 자를 쓰고는 멈춘다. 진기라고 다른 페트병에 이름을 부쳐준다. 뭐야, 와글와글 갑자기 몰려왔잖아. 깍새, 진기, 지숙, 주안댁, 금이, 그렇게 이름을 부쳐주고 보니 모두들 죽은 사람들이었다. 큰할머니와 할머니 깍새가 옛날 이름들이라면 지숙과 진기는 근년에 그가 알았던 이름들이었다. 그는 이름을 쓴 병들을 소변 담은 페트병 무리에서 떼어다가 따로 벽에 붙여 늘어놓았다.
그날 저녁을 먹고 나서 해가 저물자마자 진오는 머리맡에 깍새 병을 놓고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야, 깍새 오랜만이다. 나는 가끔 니가 보구싶었다. 너하구 놀러 다니던 귀신바우와 샛강에 가보고 싶었지. 양말산 밤섬에두 가보구 싶었다구.”
예상했던 대로였다. 병이 슬그머니 움직이고 부풀더니 열 두어 살 소년이 까치발을 하고 그의 머리맡에 앉았다. 진오는 놀라는 시늉을 하며 텐트 밖으로 기어 나와 마주 앉았다.
“나는 높은 데가 싫은데 새끼 너는 여기서 사냐?”
깍새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임마 여기서 살긴, 놀러 왔지 보면 모르냐?”
진오는 저도 어린것이 되어 그의 말투로 받았고 깍새가 재빨리 속삭였다.
“야 땅콩 캐러 가자. 요맘때가 제일 맛있어.”
“둘이서만?”
“그럼 여기 너 밖에 더 있냐?”
“가지 뭐.”
진오가 선선히 대답하자 깍새는 언제나 그랬듯이 조건을 낸다.
“나만 아는 밭이 있다. 지금쯤 알갱이가 무르익었을 거다. 너 딱총 나 줄래?”
아, 딱총이 기억난다. 자전거 바퀴살에서 빼어낸 나사를 파이프에 끼워 나무 막대에 꽂고 나무 손잡이가 달린 권총이다. 아버지가 큰할아버지의 공방에서 틈을 내어 만들어준 장난감이었다. 방아쇠와 공이가 달린 멀쩡한 권총이었다. 촛농을 녹여 나사에 박고 그 앞에 화약종이를 붙이고 방아쇠를 당기면 폭발음과 함께 뜨거운 촛농 덩어리가 상대방에게로 날아간다. 맞으면 따갑고 아프다.
“그건 좀 아까운데.”
“새끼 그럼 그만 둬라. 난 가볼 테니 너 혼자 놀지 그래.”
“알았어, 줄게 줄게.”
진오는 어느 결에 굴뚝을 내려와 뚝방을 넘어 샛강에 이르렀다. 물 억새와 갈대와 달뿌리가 허리께로 자라난 강변을 따라 내려가다 물이 줄어 작은 시내가 되어버린 길목에는 맞춤한 돌을 놓은 징검다리가 있었다. 그곳을 건너면 물웅덩이와 맨땅이 드문드문 나타났고 앞서가던 깍새는 일일이 손가락으로 어느 어름을 가리키며 떠들었다.
“조오기는 삘기가 많고 저어쪽은 싱아 그러고 저 뱀풀 숲에는 까마중이 무더기로 있다. 여긴 나만 아는 데야. 먹을게 지천이라구.”
그들은 멀찍이 양말산이 보이는 땅콩 밭모퉁이에 이르렀다. 아카시아 잎처럼 동그란 잎사귀가 무성한데 손을 더듬어 줄기를 잡고 손가락으로 모래땅을 후벼 뿌리를 살살 뽑으면 작은 혹처럼 매달린 땅콩 열매가 줄지어 나왔다. 열매만 추리고는 또 다른 것을 살살 캐어낸다. 잠깐 사이에 두 아이의 무릎 안에는 땅콩이 수북이 쌓였다. 우선 먹어보고 다시 캐기로 한다. 입으로 훅훅 불어 모래흙을 털어내고 이빨 끝으로 껍질을 물고 살짝 힘을 주어 으깬다. 손가락으로 발라내려면 아직은 속이 마르지 않아 알갱이가 엉겨있다. 껍질도 무슨 막처럼 약하고 부드럽다. 그대로 씹으면 달착지근하고 비릿하고 고소하다. 땅콩의 속살은 삶은 것처럼 부드럽다. 그들은 땅콩을 양쪽 주머니에 빵빵하게 채워 넣고 러닝셔츠를 벗어서 잔뜩 싸가지고 돌아온다. 우선 어른들 눈에 띄면 공연히 잔소리를 듣기 마련이니까 집동네 근처로 가기 전에 다 먹어 치워야 한다. 그들은 여의도 비행장이 내려다뵈는 뚝방에 올라가 송유관 위에 걸터앉아 땅콩을 세심하게 까서 입안에 털어 넣는다.
“너 근데 저 굴뚝 위에 다시 올라갈 거냐?”
“그래야지.”
“재밌냐?”
“재미는 없지만 약속했으니까 지켜야지.”
“누구 만나기루 했냐?”
깍새의 궁금증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진오는 웃으면서 그에게 손가락질을 해보였다.
“짜샤 너 만나기루 했잖아?”
“나더러 맨날 그 높은 데 올라오라구?”
“아니 내가 부르면 나하구 이렇게 놀아주면 되는 거지.”
깍새는 잠깐 생각해 보고 나서 말했다.
“임마 공짜가 어딨냐? 느이 공방에 신기한 물건들 많잖아.”
“그건 내 맘대루 못한다.”
“야야, 느이 큰할아버지 못 만드는 물건이 없잖아. 나 트럼펫 꼭지 잃어버렸다. 그것만 만들어주면 머든지 시키는대루 해줄게.”
진오는 선선히 대답했다.
“알겠어. 내가 어떻게든 울아부지나 큰할아버지께 부탁해 볼게.”
이진오는 어느새 텐트 안에 엎드린 채로 턱을 괴고 있었고 깍새 페트병은 얌전하게 앞에 놓여 있었다. 그는 페트병을 제 자리에 다른 이름의 병들 사이에 놓아두었다.
날이 새자 백 일째의 날이었다. 행사를 벌인다고는 했지만 이진오는 기분이 별로였고 시큰둥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농성했다고 떠들기도 좀 쑥스러웠다. 사방에서 농성하는 이들은 거의가 일 년쯤은 지나가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허어, 벌써 일 년이나 되었단 말인가,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닭장차가 오더니 의경들이 줄지어 내리고 굴뚝 주위를 에워쌌고 따로 트럭에 실어온 안전방석에 바람을 넣어 깔았다. 투신 예방이라나 뭐라나. 탄력 실험을 위해 한번 투신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정문 쪽에도 병력이 문 앞을 가로막고 도열해 있었다. 발전소 담장 너머 임시본부 천막에 동료들과 노조원들이며 시민단체 회원들이 모여들었다. 확성기 소리가 들리고 김의 호소문 읽는 소리가 들렸다. 기자들이 몇 명이나 왔는지 모르지만 매스컴에서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요즈음은 동영상이다 뭐다 하는 기술 수단이 많아져서 자가발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원들이 사방으로 퍼 나르기를 하다 보면 나름대로 효과는 있었다. 아직 직접 면회를 요청할 단계는 아니어서 그는 젖혀버린 사다리를 복구할 마음이 없었다. 아래에서도 이제 본격적으로 농성이 시작된다는 선언 정도로 오늘을 활용할 생각인 듯 했다. 휴대전화 벨 소리가 들렸다.
“진오냐? 에미다. 근데 왜 아침은 안 먹구 그래.”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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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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