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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있게) 산책

용기 없이 사는 자신이 제법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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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라는 단어가 전과 다르게 느껴진다. (2019. 03.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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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안에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부부가 있다. 근처에 앉아 부부 싸움을 구경하던 남녀의 눈이 마주친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남자는 여자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두 사람이 왜 싸우는지 알아요?" 대화가 시작된다.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질문은 답으로 답은 또 질문으로 그 질문은 다시 답으로, 자연스레 둘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어느새 남자가 내려야하는 역이 다가오고 그는 함께 기차에서 내리자고 제안한다. 다음 날 비행기를 타야 해서 하루를 혼자 보내야 하는데 그 시간을 같이 하자면서. 여자는 남자를 따라 기차에서 내린다.

 

1995년에 개봉했던 <비포 선라이즈>의 줄거리다. 10여년 전에 이 영화를 처음 봤다. 그때는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는 순간이 멋졌다. 처음 보는 사람과 눈을 잘 마주치지 못 하고, 말을 거는 일은 상상도 못해본 나로썬, 그들이 서로를 빤히 바라보는 용기가 대단해 보였다. 그렇게 있다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고, 농을 던지고, 옆에 앉고, 같이 걷자고 하거나, 적절한 타이밍에 어울리는 얘길 하고, 자연스레 다시 만나길 바란다고 말하는 것. 어떻게 저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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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날 때는 <비포 선라이즈> 같은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마음 깊이 용기를 넣어두곤 했다. 그리고 정말, 여행을 가서 낯선 이에게 말을 걸어본 일이 생겼었다. 흥분해서 써둔 일기도 있다.

 

'어제는 모르는 남자에게 번호를 물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은 평생 해볼 수 없는 일이라 여겼던 일이다. 망설이고 있을 때는 그래선 안 되는 이유만 떠올랐는데, 막상 하룻밤이 지나고 나니 그 이유들은 다 무색하다.

 

원래의 목적인 그를 다시 만나는 일은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기도 한 일이 되었다. 그보단 얼른 돌아가서 번호를 물으라고 응원하던 친구의 표정, 핸드폰을 내밀 때의 떨림, 당황한 눈동자, 집에 돌아올 때 발의 리듬과 의기양양함, 한동안 지어본 적 없던 푼수 같은 웃음. 무엇보다 그간의 무력과 권태가 허무하게 무너질 때, 써본 적 없는 마음 근육을 써봤다. 그것들을 되짚으며 천장을 멀뚱히 보는 아침이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들뜨고 재미있고 웃긴 거지? 오후에는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은 평생 해볼 수 없는 일이라 여겼던 리스트'를 적어볼까, 싶다. 아 왜케 즐거웡….'

 

얼마 전에 <비포 선라이즈>를 또 한 번 봤는데 이번에 느낀 단 하나의 용기는 ‘기차에 오른 일’이다. 영화는 기차 안에서 시작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의 집에서 나오게 되는 순간이 있었을 거다. 각기 앉아 있던 일상, 어떤 이유로든 익숙한 자리에서 벗어나 기차에 올랐다. 짐 가방을 꺼내고, 책 몇 권과 옷을 챙겨 넣고, 비행기와 기차표를 끊고, 안전한 자리에서 일어난 것. 그 용기로부터 모든 게 시작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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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라이즈>를 처음 보았던 10대의 나에게 기차 타는 일 따위는 용기가 아녔을 거다.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라, 다음의 말과 행동이 더 대단하게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기차 타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회사에 연차를 제출할 수 있을까. 그때 같이 갈 사람이 있나. 혼자 떠나볼까. 그냥 집에서 쉬는 게 낫지 않을까.’ 요즈음의 내 주변에는 작고 적은 용기만이 머문다. 일, 사랑, 우정, 가족, 여행, 주말 심지어 매일하는 산책에도 관성이 생겼다. 뭔가 사건을 만들려면 전과 다르게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음을 단단히 여며야 한다. 자연스레 용기 내는 사람을 보는 마음도 전과 달라졌다. 아름답다. 용기를 내 기차에 오르는 사람에게는 이유를 묻지 않고 "멋지다."고 말하게 된다.

 

나도 멋지면 좋겠지만, 요즘은 어느 일 하나에 용기 없이 사는 자신이 제법 마음에 든다. 기차에 오르는 일을 포기한 대신 관성에 기대 하루를 보내고, 매일 부지런히 걸어 출근을 하고, 동네에서 편안한 친구를 만나고, 자기 전에 고양이와 이야기를 나눈다. 괜찮고 충분해서 용기는 아껴 둬도 괜찮지, 싶다.

 

이러다 어느 날에는 또 거대한 용기가 올 수 있을까. 오면 좋지. 감당할 수 없이 커다란 용기가 온 날,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누워있는데 이불 밖으로 나온 내 발가락들이 요란스레 움직이던 모양이 떠오른다. 그 모습을 상상하며 웃다가 조용히 잠에 든다.


그렇지만 감고의 뜰에서 하는 산책과 기숙사에서의 산책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숙사의 산책과 <홍당무>에 나오는 일요일의 가족 산책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차이가 있다. 그리고 만약 <산책하면서 듣는 강연>이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걷는 동중에 안내자 모르게 슬쩍 옆으로 샐 수도 있으니까. 채찍으로 사람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것에 산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지나가면서 군인 한 사람에게서 한 떄씩 매를 맞는 벌을 받은 불쌍한 캉디드는 이런 식으로 두 번의 <산책>을 당했다. (39쪽)
- 장 그르니에  『일상적인 삶』   중에서

 


 

 

일상적인 삶쟝 그르니에 저 | 민음사
여행, 산책, 포도주, 담배, 비밀, 침묵, 독서, 수면, 고독, 향수, 정오, 자정을 다룬 열두 편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사물 혹은 행위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차근차근 치밀하게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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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박선아(비주얼 에디터)

산문집 『20킬로그램의 삶』과 서간집 『어떤 이름에게』를 만들었다. 회사에서 비주얼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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