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진형의 틈입하는 편집자
수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슬픔이 당신의 슬픔에 근접하기를 희망합니다.
수현,
얼마 전 ‘편집자 집담회’에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출판학교에서 편집자들을 양성해온 이옥란 선생님의 책 『편집자 되는 법』 (유유, 2019) 출간 기념을 겸한 행사였습니다. 저는 패널로 참여하여 개인적인 출판 경험을 발제하고 여러 편집자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지요. 옥란 선생님께서 편집자의 정도正道를 말씀하시고 또 다른 패널로 참여한 분께서 후배들을 향한 따뜻한 애정과 위로의 말들을 전했다면, 저는 그저 저의 편집자 인생에 깃든 행운을 말했지요. 그 자리에 서기까지는 그저 운이 좋았을 따름이라고. 수년 전 수현이 그랬던 것처럼, 그 자리에 함께한 누군가가 또다시 모욕당하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옥란 선생님의 책에 인용된 자료에 의하면, “출판은 삼십 대가 약진하는 업종”으로 보이나 그들이 사십 대가 되면 갑자기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16년 조사에서는 편집자의 55.4퍼센트가 삼십 대이고 18.2퍼센트가 사십 대입니다. 출판노조의 2015년 조사는 조금 더 비관적인데요. 삼십 대는 58.3퍼센트, 사십 대는 6.4퍼센트입니다. 삼십 대 편집자의 절반 이상이 사십 대가 되면 소멸합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수현은 55.4~58.3퍼센트에 속한 삼십 대 편집자이고, 저는 6.4~18.2퍼센트에 속한 사십 대 편집자입니다. 당신은 소멸되지 않고 마흔 즈음의 편집자에 당도할 수 있을까요.
제가 6.4퍼센트 혹은 18.2퍼센트에 속하게 된 것은 실력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누군가 묻습니다. 경력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법 많이 팔린 책들을 기획하고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책들을 저의 이력 어디엔가 자랑스럽게 적어놓기는 하겠습니다만, 제가 만든 책 중엔 훨씬 좋은 책이지만 말하기가 참담할 정도로 안 팔린 책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저에게 출판을 가르쳐주었던 쟁쟁한 실력을 가진 선배와 동료들 상당수가 지금은 프리랜서 외주 편집자로, 혹은 다른 업종의 자영업자로 근근이 살아갑니다. 사십 대 편집자로 살아남는 게 실력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저는 저의 삶에 깃든 행운을 한껏 누리면서도, 다른 이들의 생을 향하여 책과 출판의 본질을 서슴지 않고 말하곤 합니다. 부끄럽고 미안하고 아픕니다.
수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슬픔이 당신의 슬픔에 근접하기를 희망합니다.
편집자가 소멸하는 것은 출판 역시 자본의 습속에 지배당하기 때문입니다. 시장의 논리에 경도된 출판은 편집자를 대중의 욕망에 부합하는 이들로 전락시킵니다. 대중의 욕망을 쫓는 출판은 언뜻 시장성을 쉬이 획득할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중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투영되는 분야일수록 경쟁은 치열합니다. 경쟁이 치열하므로 살아남기란 더욱 힘겹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애초에 시장으로서 출판은 무망한 산업일 뿐입니다. 그것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확률이란 가능성에 우리의 전망까지 제한할 필요는 없지 않을지요. 확률은 수학일 뿐 과학이 아니니까요. 과학은 확률의 기반 위에 의심과 상상력으로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이니까요. 자본의 습속에 우리의 운명을 의탁해서는 안 됩니다.
오롯이 책에 속한 자로 살아갈 때에야 '지도로도 찾지 못할 곳'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철학자 후카이 토모아키는 『사상으로서의 편집자』 (한울, 2015)라는 탁월한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와 같이 ‘사상의 상품화’가 되어버린 사회에서, 편집자나 출판사가 사상가 및 저자와 대치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장과도 대치하도록 해야 한다.”(47쪽) 사실 이 책에 쓰인 이 문장의 맥락은 사뭇 다르지만, 저는 이 문장에서 ‘대치’라는 단어를 추출해내 특별한 의미를 애써 부여하고 싶습니다. 대치對峙는 맞서서 버텨내는 것, 종속되지 않겠다는 결연한 직면의 태세입니다. 사상의 상품화, 즉 상품으로 유통되는 책의 시대를 엄연한 현실로 인정하되, 편집자는 그 시장과 대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종속이나 복속이 아니라 대치하는 것입니다.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적과 제대로 맞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린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이 아니니까요. 다윗의 서사를 일반화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훨씬 치밀하게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쉬이 제압당하고 종속될 겁니다. 그리고 소멸하겠지요.
앞서 말한 후카이의 책은 근현대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를 일별하며 격동의 시대를 추동했던 위대한 사상가들의 배후를 밝혀냅니다. 칼 바르트, 위르겐 몰트만, 폴 틸리히, 호세 오르테가, 헤르만 헤세, 막스 베버 등의 책을 만들어냈던 낯선 이름의 편집자들, 그들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사상을 발견해내고 정교하게 보듬고 또 다른 논쟁으로 촉발시킨 이들입니다. 후카이는 이들을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로 명명합니다. 편집자는 저자의 텍스트에 개입하는 유일한 사상가입니다. 편집이란 행위를 통해 저자의 사상에 질문을 던지고 비약을 물리치고 논리를 보듬고 문장에 리듬과 호흡을 불어넣습니다. “사상은 저자에 힘입어 로고스화되지만, 현대에는 한층 더 편집자에 힙입어 사회화”(120쪽)됩니다. 골방에서 잔뜩 벼려낸 사상의 텍스트를, 편집자는 세상에서 통용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냅니다. 공공재로서의 책은, 텍스트와 시장에 제대로 맞선 편집자로부터 탄생합니다.
저는 운이 좋은 사십 대 편집자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편집자의 길을 물으면 이렇게 답하곤 합니다. ‘지도로는 찾지 못할 곳’이라고. 다만 우리는 불가능을 품고 무모하게, 때로는 비루함을 견디고, 오롯이 책에 속한 자로 살아갈 때에야 ‘지도로도 찾지 못할 곳’에 이를 수 있다고, 그 길은 애초에 불가능했으니 우리는 실패하더라도 너무 낙담하지 말자고 말입니다. 수현과 제가 텍스트와 자본에 제대로 맞서고 버텨낼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빕니다.
편집자로 일한다는 자부심을 잃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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