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했던) 산책

도쿄 여행의 일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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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을 갔었다. 두 번 갔었는데 그때 그 사건이 첫 번째였는지 두 번째였는지 헷갈린다. 아마 첫 번째였을 것 같다. (2019.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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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쿄에서 매일 성실히 놀았다. 지칠 줄 모르고 이 동네 저 동네를 걸었고 맛있는 걸 많이 먹었다. 노는 중간중간 그는 담배를 부지런히 피웠다. ‘좋아서’였을 거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이 좋아 담배를 꺼내 물고 입술 끝에 웃음을 눌러 담는 표정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럴 때는 평소보다 담배 타 들어가는 속도가 느려 옆에 서 있으면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의 낭만 덕분에 나도 두어 개 뺏어 피웠기에, 하루가 지나 숙소로 돌아올 즈음이면 담뱃갑은 거의 비어 있었다. 돌아오는 전철에서 “타바코 가게 들렀다 갈까?”라고 말하는 것은 여행의 일상이었다.


숙소와 전철역은 꽤 멀었는데 그 사이에 작은 타바코 가게가 있었다. 작다는 애매한 표현이 적절한 작은 가게였다. 얼마나 작냐면, 가게 바로 옆에 뚱뚱한 자판기가 있었는데 그것과 폭이 거의 비슷했다. 문이라고 부를 만 한 것은 없고 허리 높이에 여닫을 수 있는 창이 하나 달려 있었다. 창을 두드리거나 창문을 열어 주인을 부르면 좁은 통로 끝 방에 있던 할머니가 멀리서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처음 타바코 가게에 갔을 때, 주인 할머니는 우리가 한국인임을 확인하자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파일 같은 걸 들고 와서 스크랩해둔 한국 남자 배우들 사진을 보여줬다. 아는 배우도 있었지만 모르는 배우도 있었다. 우리는 웃었고 그녀는 우리보다 더 크게 웃었다. 할머니는 한국말이나 영어를 할 줄 몰랐고 우리는 일본어를 몰랐기에 몸짓이 언어였다. 말이 없었지만 어떻게 그렇게 수다스러웠는지 모르겠다. 우리들은 얼굴과 손으로 열심히 떠들어댔다.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담배를 사서 숙소로 돌아오려면 미로 같은 골목을 걸어야 했다. 몇 번씩 코너를 돌고 돌아 기차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등을 두드렸다. 타바코 가게 할머니였다. 숨을 헐떡이던 할머니는 가슴팍에 안고 있는 봉지를 건네 주었다. “노리!” 김이었다. 손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며 숨을 고르는 모양은 영락없이 할머니였는데 웃고 있는 얼굴이 아이 같았다.


일주일 정도 그 동네에 머물렀고 매일 타바코 가게에 갔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담배를 사며 몸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 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뒤를 쫓아와 비닐 봉다리를 건네주는 일까지 통째로 반복되었다. 담배를 사고 나올 때마다 오늘은 따라 오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설명이 충분하지 못 했는지, 뒤따라와 선물을 주고 싶은 할머니의 의지가 더 강했던 건지, 우리는 매일 할머니가 준 선물 봉지를 들고 골목을 산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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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할머니는 종이와 펜을 주며 주소를 적어달라고 했다. 주소를 왜 물어보는 걸까. 잠시 궁금했지만 매번 우리를 쫓아와서 봉지를 내밀던 할머니가 떠올라 금세 궁금증이 사라졌다.


주소를 적었던 사실을 잊어버릴 즈음 우체통에 꽂힌 하얀 봉투를 발견했다. 할머니는 곧 친구들과 한국에 온다는 사실을 편지로 알려주었다. 어떻게 쓴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글로 적혀 있었다. 서툴고 예쁜 글씨였다. 낯선 글자를 흰 종이에 옮겨 적을 때나 작은 가게에서 급히 나와 어린 친구들의 뒤를 쫓아 빠르게 걸을 때, 할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편지 봉투 안에는 할머니가 찍어준 우리, 사진도 한 장 담겨 있었다.


편지에 적혀 있는 날짜에 호텔 로비로 찾아가 할머니를 찾았다. 여행사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할머니가 두 분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그가 통역을 해주어서 일본에서보다 수월한 소통을 했지만 그 사람이 없어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을 거다. 어쩌면 통역이 없었을 때가 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날은 할머니와 만난 마지막 날이었다. 앞으로 볼 일이 없겠지. 나는 타바코 가게의 주소나 근처 역 이름을 기억하지 못 한다. 할머니가 편지를 보냈던 서울의 우리 집 주소는 이제 내게 ‘오래 전에 살던 집’이 되었다. 그 뒤로 다섯번이나 더 이사했고 그 틈에 많은 일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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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동네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그때 걸었던 골목길이 생각난 거다. 잃어버린 기억이었는데, 할머니가 우리를 쫓아오던 골목 모양이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한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 여행지였지만 같은 길을 따라 매일 산책했다. 일상이 아니었지만 일상인 줄 알았다. 사소하고 비슷한 일을 매일 반복하며 걸으면서도 지루한 줄 몰랐던 날들이 있었다. 이렇게나 멀리 오고 나니 그때 오래, 잠시 머물다 간 마음들에 고마워진다. 걸을 수 있을 때, 나란히 걸어주고, 쫓아올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쫓아와준 마음들 덕분에 나는 이렇게 텅 빈 새벽에 무서움을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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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들은 떠올리다 보면 이런 기억으로 남은 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매번 고맙고 또 고맙다.


그리고 메일함에는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내 애인의 편지가 있다. 특별한 내용이 없는, 짧은 안부 편지이다. 우리가 작별의 인사도 없이 더이상 만나지 않게 된 지가 팔 개월이 넘었고, 나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도 그동안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살짝 혼동스러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9년간 관계를 이어오는 동안 그런 식의 건헐적인 휴지기는 여러 번 있어왔다. 그것은 항상 비공식적이고 즉흥적이었다. 나는 심지어 '나는 너를 죽은 것으로 생각하겠어.' 하고 그에게 편지를 써 보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몇 달 후, 우리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휴지기도 이번처럼 길었던 적은 없었다. 나는 이것을 골 다가올 진짜 작별을 암시하는 징후적 작별로 받아들였고,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와 애인은 서로에게 오직 사생활을 위한 대상이었다. 동거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고 각자의 집을 유지하는 커플이었지만 사실상 사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나누었다. 우리는 서로 가까운 곳에 집을 구했다. 우리는 각자의 집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요리를 했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로의 집에서 작업을 했다. 우리의 집에는 두 사람 분의 책상이 있었다. 우리는 함께 저녁 산책을 나섰다. 애인과 함께하는 사생활은 근사했다. 사생활이란 기록되지 않은 역사와도 같았다. 즉 어떤 의미로 본다면, 사생활은 개인의 진짜 인생이었다.


그러나 종종 나는, 내 일을, 내 작업을, 내 번역을 더욱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내 애인이 아니라,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만나 나를 필름에 담는 잠자는 남자가 아닐까 남몰래 생각할 때가 많았다.


애인은 평범한 안부의 인사말 마지막에, 내가 외국으로 촬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귀국 일자를 알려주면 자신이 공항으로 마중 나가고 싶다는 의사를 비친다.
- 배수아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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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박선아(비주얼 에디터)

산문집 『20킬로그램의 삶』과 서간집 『어떤 이름에게』를 만들었다. 회사에서 비주얼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배수아> 저/<베르너 프리치> 사진11,700원(10% + 5%)

그동안 소설과 번역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 배수아가 매우 독특한 내용의 글을 들고 우리에게 돌아왔다. 소설보다 매력적인,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에세이는 '잠'을 필름에 담고자 애쓰는 독일 영화감독과 엘에이에서 함께 보낸 일주일간의 여행 기록이다. 배수아는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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