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자격

<월간 채널예스> 2019년 1월호 끌리는 책 앞에서, 내 자격을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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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인 팬심에도 불구하고, 계절이 몇 번 바뀌도록 이 책을 사지 못했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진즉 장바구니에 담아 놓았으나 차마 결제 버튼을 누르지 못했고,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몇 번이나 만지작대다 걸음을 옮겼다. (2019. 01. 02)

정이현의 오늘 살 책_01.jpg

 

 

무엇이든 안 해보는 것보다는 해보는 게 낫겠지, 라는 태도는 전적으로 직업 때문에 생겼다. 한번이라도 경험하면 혹시 나중에 소설에 쓸 일이 생겼을 때 티끌만한 도움이라도 되겠지 싶어서다. 늦은 밤 방송되는 공중파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담당 피디는 방송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을 준비하라고 했다. 나는  인간의 조건』  를 가지고 갔다. 그 무렵 나는 이 책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었다. 이 놀라운 책을 한 명에게라도 더 알리고 싶었다.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푸어 잔혹사’라는 부제가 붙은 책. 서문부터 사람을 빨아들인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밝혀두지만 이 책은 판타지 소설이 아니다(여기에 나오는 마법이라곤 ‘100만원 남짓한 월급만으로 빚 안 지고 사는’ 마술뿐이다). 나는 누구라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법한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꽃게잡이 배 선원이나 양돈장 똥꾼처럼,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우리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들의 숙소는 어느 정도 크기인지, 여름엔 얼마나 덥고 겨울엔 얼마나 추운지 (중략)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잊힐 게 분명한 사소한 사항들로 책을 가득 메우고 싶었다. 인간의 조건』  7쪽)

 

그날 방송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세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온 에어 사인에 불이 들어온 순간 갑자기 머리가 멍해질 만큼 떨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혼자만 알기엔 너무 아까운 책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사명에 충실하려 애썼다. 이 책은 작가가 20대 때부터 직접 경험해온 직업 세계의 세부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르포르타주라는 것, 그가 거쳐 온 일터는 꽃게잡이배, 기업형 돼지농장, 비닐하우스, 주유소와 편의점, 자동차부품공장 등이라는 것, 이번이 첫 출간이라는데 필력이 가히 놀랍다는 것, 장담컨대 일단 책을 잡은 독자는 쉽게 놓을 수 없으리라는 것 등을 나는 열심히 이야기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웹서핑을 하다 글 하나를 발견했다. 그날의 방송을 들었다는 네티즌이었다. 그분은 나의 책 소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런 노동은 해 본적도 없는’ 사람(=나)이 흥분한 목소리로 이 책 얘기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요지인 듯했다. 나로서는 억울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날 라디오 너머로 울려 퍼졌던 내 목소리가 하이 톤에 다소간의 떨림을 뿜어내고 있었다면 그건 ‘안전한 구경꾼’으로서의 흥분 때문이 아니라 라디오녹음부스 안에서 너무 긴장한 탓이었기 때문이다.

 

곱씹을수록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그 책에 묘사된 노동을 해 본 적 없다는 것은 명백히 사실이었다. 한승태 작가가 생생히 펼쳐 보여주는 세계는 내게 분명 낯선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꽃게잡이 배와 돼지농장의 노동경험을 바탕으로 한 르포르타주를 ‘좋은 책’이라고 말할 자격이 나에게 없는가? 나 같은 사람은,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해 혹은 그런 세계를 다룬 텍스트에 대해 말해야 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더 조심스러운 방식을 고민해야만 하는가? 더 조심스러운 방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후, 책을 추천하거나 좋아하는 책의 이름을 말해야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거리게 됐다. ‘음식’을 키워드로 한 주제 도서를 선택할 때 조너선 사프런 포어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를 내려놓고서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 을 집어 드는 식이었다. 후자가 더 안전한 제목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육식의 예를 들어 말하자면 (뭐 꼭 육식뿐이겠느냐마는) 현실의 나는 딜레마로 가득한 인간이었다. 공장형 축산 시스템에 대해 분노하고 비건인 친구의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거의 매일 육류 요리를 하고 출출한 밤엔 습관적으로 치킨이나 시킬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에게 자격이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잡식동물을 벗어나지 못한 이의 서글픈 모순을 고백하는 것까지는 가능하겠지만, 더 이상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끌리는 책 앞에서, 내 자격을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런데 올 것이 왔다. 지난 봄, 한승태 작가의 두 번째 책  고기로 태어나서』  가 출간된 것이다. 그 책의 서문은 이렇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채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어떤 목표를 꿈꿔볼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맛있는 먹을거리뿐 아니라 동물의 살점으로서의 고기 역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회식 자리에서 육즙이 흐르는 삼겹살 한 점을 집어 들었을 때 당신과 고기 사이에 어떠한 환상도 남아 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고기로 태어나서』 , 11쪽)

 

열정적인 팬심에도 불구하고, 계절이 몇 번 바뀌도록 이 책을 사지 못했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진즉 장바구니에 담아 놓았으나 차마 결제 버튼을 누르지 못했고,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몇 번이나 만지작대다 걸음을 옮겼다. 오늘 서점 나들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곤 새로 나온 다른 책들을 훑어봤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라는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뒤표지에 권김현영 님의 추천사가 있다.

 

‘나는 지식이란 경계에 있는 자의 고통 없이는 생성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쌓인 지층이 형체를 드러낼 때에 ‘비로소’ 알게 되고 ‘겨우’ 말할 수 있는 것이 생긴다.’

 

그 글이 적힌 책을 한권 집어 들고서 나는  고기로 태어나서』   앞으로 되돌아갔다. 어떤 용기가 ‘비로소, 겨우’ 생길 것 같기도 했다.



 

 

고기로 태어나서한승태 저 | 시대의창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찰부터 한국 식용 고기 산업 생태계의 단면에 대한 사회적 관찰까지 다양한 화두들을 제기하고 작가 나름의 그에 대한 생각을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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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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