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노란 사람들
병증을 받아들이는 자세
선택할 수 없는 영역에서는 쿨하게 내려놓는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그 안에서는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먹는다. (2018. 12. 14)
언스플래쉬
지지난주 황달에 걸렸다. 황달이라니, 폐렴이나 결핵, 영양실조처럼 먼 옛날에 걸릴 법한 병명인데. 누군가 눈이 노랗다고 해서 거울을 보니 <심슨 가족>의 피부색을 가진 인간이 나를 보고 있었다. 병이라기보다는 증상이었고, 증상의 원인을 찾으러 동네 병원과 종합 병원을 전전했다.
종합 병원에서는 희미한 소독약 냄새와 강렬한 불행의 냄새가 난다. 서울역처럼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는 고함을 지르고, 누구는 길을 잃고 헤맸다. 나는 불행에 소매를 적실까 초조해하며 길을 잃은 쪽에 섰다. 30분을 기다려 만난 의사는 3분 만에 길버트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빌리루빈이라는 성분이 넘쳐나는데 몸 안에서 처리를 못 하는 현상이라고 했다. 빌리루빈 씨와 길버트 씨가 사이좋게 손을 잡고 몸 안을 돌아다니는 상상을 하면서 추가 초음파 검사를 예약했다.
다른 이유로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병원에 오니 언짢았다. 튼튼한 편이라고 생각해 왔던 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게 스스로 괘씸하고, 생각했던 스케줄이 모두 꼬이자 심통이 났다. 어딘가 걸려 넘어졌는데, 툭툭 털고 일어나자마자 다시 걸려 넘어진 기분이었다.
이모부는 내과 의사였다. 위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진찰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고 들어온다고 했다. 종일 찌푸린 사람들을 보는 사람은 찌푸린 채로 집에 들어오게 된다. 이모부가 집에 돌아와 제일 잘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소파에 앉아있는 거였다. 이모가 배가 아프다고 했을 때 이모부는 심드렁하게 어, 화장실 가, 라고 말했다. 아니, 여기를 좀 만져 봐, 하는 순간 이모부는 바로 병원에 전화를 걸어서 예약을 잡았다. 이모의 병명은 암이었다.
의사도 자기 병을 모를 때가 있다. 의사의 가족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사람이 원래 그렇다. 그럼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나? 검사를 추가로 해서 다른 병이 없음을 증명하고 확정된 병명을 받아 안심할 것인가, 얼굴이 노래지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조용한 증후군이겠거니 하고 같이 둥기둥기 살 것인가, 얼굴을 찌푸린 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갈림길을 계속 선택하다 보니 내가 되었다. 어느 부분은 늘 병에 걸려 있고, 모든 것은 확률의 문제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어딘가는 늘 말썽을 부린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모두가 노란 얼굴로 지하철에 타고 있다. 당신의 증후군은 무엇이냐고 묻고 싶어졌다.
외국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겨울이면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TV를 틀었다. 눈이 내리면 스쿨버스가 다니지 않고, 스쿨버스가 다니지 않으면 학교는 휴교한다. 일부 지역에만 눈이 내려도, 일부 지역에 비가 내려 길이 살짝 얼어도 휴교령이 떨어졌다. 행여 학교에서 얕게 기침이라도 하면 금방 괜찮냐고, 집에 전화해서 데리러 와 달라고 할까 물어보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가 싶었다. 정작 체육활동을 하다 공에 맞아서 커다랗게 멍이 든 친구는 학교에 잘만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소한 걸 크게 보고 큰 걸 사소하게 넘기는 상황들이 이해가 된다. 아주 작은 확률이라도 사고가 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선택을 통해 없애겠다는 마음. 놔두면 나을 부분을 구태여 시간을 앞당겨 치료하지 않겠다는 마음. 병증의 심각성이나 빈도와는 상관없는 선택. 그런 쿨함이 마음에 들었다.
증상에 이름이 붙여진 이상 조금 더 몸에 관심을 가지기로 한다. 앞으로 언젠가 나는 몇 번 더 얼굴이 노란 사람이 될 것이다. 선택할 수 없는 영역에서는 쿨하게 내려놓는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그 안에서는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먹는다. 아침을 챙겨 먹고, 제때 자려고 노력한다. 매일 조금이라도 노랗게 변했는지 확인하는데 공교롭게도 열심히 살기로 유명한 동아시아의 황인종이라 나의 노람이 기본 피부색인지 병증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건강염려 증후군에 걸린 것처럼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의외로 많은 사람이 동일한 증후군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출근길 지하철 한 칸 안에 적어도 10명 정도는 나와 같은 증후군을 가진 셈이다. 이름을 붙이자면 끝이 없을 증후군들의 세상 속에서 무병을 빈다. 무병장수는 아직까지 바랄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무병단수를 바라지도 않고, 무병 정도로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