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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못 걸어도 누군가 걸어보면 좋지 않겠나 싶어서요

김유진의 아이오와 일기 『받아쓰기』 편집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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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착한 유진, 너무 정직한 유진, 너무 고지식해서 삶에든 글에든 자극적인 양념을 살짝이라도 뿌리지도 못하는 유진, 그런 유진이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볼이 발그레해져서는 네네 그러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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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오와Iowa. 미국 중서부에 있는 작은 주. 빈부의 차가 적고 유색 인종의 비율이 미국에서 가장 낮은 주의 하나. 그곳에서 행해지는 아이오와 국제창작프로그램(International Writing Program). IWP는 문학의 가치를 옹호하고 전 세계 작가들에게 교류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1967년 창립됐다. 매년 3~6개월씩 대학구내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토론과 심포지엄, 각종 문화행사에 참가하고 작품을 쓰거나 여행과 탐사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특히 아이오와대 대학원 문예창작과정 및 인근 학교?서점?도서관?언론 등 지역사회와 연계한 프로그램이 매우 다채로워 문학의 향기는 캠퍼스 바깥까지 퍼져나간다.

 

2.
올해도 어김없이 아이오와 국제창작프로그램에 파견될 한 명의 한국 작가가 선발될 것이다. 얼마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2017년 지원에 관련된 메일을 받고 그간 그곳에 다녀온 작가들의 이름을 우후죽순 뒤져보기도 하였다. 황동규, 최인훈, 정현종, 김윤식, 문정희, 김지원, 하일지, 최승자, 김사인, 황지우, 최정례, 나희덕, 김경미, 김영하, 조경란, 한강, 김이듬, 강영숙, 김경욱, 김유진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국내 문인들의 이름이 줄지어 떴다. 가만, 역사가 50년이지. 그중 1974년에 다녀온 정현종 시인으로부터 그때의 추억을 육성으로 생생히 전해 듣기도 한 적 있으니 그래, 우리 문인들의 참여사만 해도 올해가 보태지면 반세기로구나.

 

3.
내가 처음 이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게 된 건 1995년의 일이다. 대학 신입생이던 그 해 봄에 구내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 한 권, 그 표지 속에 박혀 있던 세 글자의 선명함을 어찌 잊을까. 아이오와라는 네 글자, 일기라는 두 글자, 그리고 최승자라는 이름 석 자. 소설을 쓰겠다고 들어간 문예창작학과 새내기였던 나는 최승자 시인의 아이오와 일기 『어떤 나무들은』이라는 책을 통해 최승자라는 시인과 최승자라는 시인의 시와 시인이 5개월 간 머문 아이오와라는 도시와 일기라는 장르를 통한 사적인 데서 생겨나는 문학의 잡다한 깊이를 난생 처음 맛보게 되었다. 못 잊어 개새끼, 라고 해도 되는 시. 그럴 수 있음의 자유와 자율을 담보로 한 시. 사람을 참 가뿐하게 찰랑거리게 만드는 시. 그런 솔직함 뒤에 배인 슬픔을 저 홀로 잔뜩 그렁거리게 만드는 시.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이 세계 각지에서 아이오와로 찾아든 문인들과 뒤섞여 보낸 나날들을 일기로 써내려갔는데 어느 날은 분주하고 또 어느 날은 평온한 그 하루하루의 일상이 난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었다. 겉에서 보면 평범한데 속에서 보면 특별한 그것이 실은 우리라는 사람의 또 다른 정의가 아닌가. 일기는 그걸 말해주기 가장 적합한 장르라는 생각도 동시에 하게 되었고 말이다.

 

4.
20년 전 출간된 그 책. 일찌감치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그 책. 연필로 그은 밑줄 그대로 접은 페이지 그대로 내 책장에 귀하게 꽂혀 있던 그 책. 그 책을 다시금 출판해서 그때 못 읽은 이들에게 널리 읽히려는 욕심에 최승자 시인에게 허락도 구해놓은 그 책. 본문을 새로 타이핑하며 그 책을 읽어나가고 있을 때 김유진 작가가 2015년 IWP 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씨구나, 신이 났다. 나는 갈 수 없지만 아끼는 후배가 떠난다니 마치 내가 짐 꾸리는 사람처럼 설렜다.

 

그리고 얼마 뒤인 2015년 여름 통의동의 한 카페에서 김유진 작가를 만났다. 3개월간의 그곳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적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을 했다. 최승자 시인 외에도 아이오와를 다녀온 문인 중에 문정희 시인이 『사포의 첫사랑』, 한강 작가가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통해 그곳에서 머문 시간들을 펴낸 걸 보면 분명 써나갈 그 이야기가 책이 될 거라며 자신감을 팍팍 안겼다. 그리고 타이핑을 마친 최승자 시인의 『어떤 나무들은』 원고도 건넸다. 너무 착한 유진, 너무 정직한 유진, 너무 고지식해서 삶에든 글에든 자극적인 양념을 살짝이라도 뿌리지도 못하는 유진, 그런 유진이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볼이 발그레해져서는 “네네” 그러리라 했다. 나의 공격적인 호들갑에 정신이 없었을 텐데 수비 하나는 끝내주는 유진이었다. 사실 전부터 그래오긴 했다. 어깨 빠지도록 내가 강 스파이크를 날리면 어라 이게 뭐지 하면서도 힘 뺀 어깨로 가볍게 리시브를 해서 다시금 팝콘처럼 하얀 공을 공중으로 날려 대화를 잇게 하는 유진. 그런 유진에게 바라는 건 하나였다. 특유의 심심한 듯 슴슴한 맛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유진만의 스타일로 원고를 써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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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개월이 지났다. 그로부터 얼마 뒤 유진으로부터 원고가 도착했다. 성실한 유진, 약속 잘 지키는 유진, 고마운 유진. 유진의 원고는 예상한 그대로였다. 유진의 원고에는 아이오와에 대한 일절의 정보가 들어 있지 않았다. 유진에게 3개월 동안 아이오와는 관광지가 아니라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 시간 동안 유진의 곁에 머문 동료 작가들과의 소소한 일상이 드라마를 보듯 선명하게 펼쳐져 있었다. 언어를 초월하고 성별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여 한 공간에서 한데 섞여 벌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들을 보고 있자니 ‘모국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 ‘언어’적인 부분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원고를 읽으면서 분명하게 알게 된 사실이라면 “어떤 나라에서 누군가의 나라로. 그곳은 아주 먼 곳이면서, 동시에 더 이상 멀지 않은 곳”이라는 받아들임, 아마도 그에 가까운 심정에 대한 이해랄까. 글을 읽자마자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김란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림을 맡은 작가 역시 유진의 원고를 나와 비슷한 소감으로 읽어냈다. 그러니까 너무도 담백해서 조갈증을 부르지 않는 뒤끝 없는 책을 만들자는 데 이견 없이 동의한 것이다. 디자이너와 내가 본문 편집에 몰입하는 동안 임신 중이었던 화가는 자기가 가본 곳은 아니었지만 유학생활 중에 한국인으로는 홀로였던 기억과 경험을 되살려 최대한 감정이 몰입된 상태에서 꽤 여러 장의 그림을 그려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우리는 이 느낌이 맞을까 저 느낌이 맞을까 하루에도 전화기를 몇 시간씩 붙들고 앉아 최대한 아이오와에 머문 김유진 작가로 분하여 저마다의 상상력을 발휘하고는 하였다. 그사이에 김유진 작가는 원고를 쓰고 버리는 수정에 열일이었다. 실은 보태기보다 버리는 데 분주했다. 한 문장 한 단어가 아까워 퇴고 중에 교정지를 까맣게 새로 채우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한 문장 한 단어가 부끄러워 퇴고 중에 교정지를 새하얗게 새로 지우는 작가가 있는데 유진은 후자에 가까웠다. 유진은 그런 작가였다.

 

6.
오늘은 내 패널 디스커션이 있는 날이다. 주제는 고대 희랍어로 묘사, 서술을 뜻하는 ‘에크프라시스Ekphrasis’다. 여타 예술 장르가 어떻게 영감을 주고, 또 창작 행위에 무슨 영향을 끼치며, 어떠한 방식으로 재해석되는가에 대한 논의. 토론에 참여한 작가는 나를 포함, 여섯 명이다. 우리는 자신이 미리 작성한 두 장 남짓의 글을 차례로 읽고, 각자 간단한 질문을 받았다. 무키와 라엣은 사진과 그림을 준비했다. 필리핀에서 온 시인 무키는 달리의 그림을 시로 변용한 것을 들고 나왔다. 무용수로도 활동하는 누군가는 연단에서 간단한 춤을 추어 보였다. 창작 방법론의 장이 된 셈이다.

 

나는 글쓰기와 음악에 관하여 썼다. 쓰는 내내 부끄럽고 망설여졌다. 나는 글쓰기의 어려움이나 글쓰는 과정상의 내밀한 습관 따위에 대해 누군가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누구나 글쓰는 것은 쉽지 않고, 창작자라면 누구든 하나쯤은 부끄러운 버릇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부한, 구질구질하고 지난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음악과 관련한 창작 습관 하나를 소개하였다. 나는 안토니오가 하나의 작품을 쓸 때 한 종류의 술을 고르는 것처럼 글을 시작하기 전, 음악을 찾는다. 등단작을 쓸 때부터 갖고 있었던 버릇이니, 10여 년이 되었다. 한번 쓰인 음악은 다시 쓰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은 그에 걸맞은 하나의 곡과 짝을 이룬다. 노트북 폴더엔 개별 작품의 제목 옆에 곡명이 붙어 있다. 때때로 음악을 찾느라 마감에 쫓기면서도 며칠씩 허비한다. 찾아지지 않는 음악 탓을 하는 것이다.

 

토론석에 앉기 전, 무키에게 혹시 내가 질문을 알아듣지 못하면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무엇보다, 질문을 알아듣지 못할까 긴장이 되었다. 착석을 한 후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눈이 닿는 곳에 마리와 야엘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환하게 웃었다. 나도 답례하듯 웃어 보였는데, 그러자 긴장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나는 무키와 중간중간 메모지에 단어를 적어가며 질문을 재차 확인한 후 답했다. 그렇게 한 고비가 지났다.
-2015년 10월 9일 금요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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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가 머문 아이오와 일기’라는 부제를 달아 정해본 제목은 『받아쓰기』였다. 주어진 시간 동안 경험한 일들을 제 주관적인 판단에 입각해 다시 써나갔다기보다 보고 듣고 말한 즉시의 일들을 고스란히 받아 적는 일환으로 이 책이 기획되고 쓰였고 만들어졌다는 판단에서였다. 제시한 제목에 유진도 환해졌다. 안심한 채로 지도 작업에 몰입했다. 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는 커버 안쪽에 저자가 걸어본 본문 속 곳곳을 지도로 제작해서 삽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유진의 경우 작정하고 걸은 곳이 별로 없는데다 숙소에서 벗어난 적도 잦지 않았다. 난감했다. 이를 어쩌지. 그때 문득 숙소 열쇠를 하나씩 받아 들었을 작가들 생각이 났다. 유진이 그곳에서 만나 함께 어울린 작가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그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33개국에서 34명의 시인, 소설가, 번역가가 왔다고 했지. 유진에게서 참여 작가들을 소개한 팸플릿을 전해 받았다. 더불어 유진이 직접 찍은 작가들의 사진도 잔뜩 넘겨받았다. 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의 지도를 도맡아 작업하고 있는 화가 조성흠은 그 자료들을 토대로 유진이 만난 작가들을 하나하나 재현해냈고 그걸 본 유진은 그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다시금 떠오른다며 박수를 쳐대며 심히 반가워하였다. 자, 이제 됐구나. 그리고 문득 깨달은 거 하나. 사실 걸어본다는 말이 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터, 사람이든 사물이든 우리가 걸어본다는 말로 다시 보고 깊이 보는 일이 충분히 가능할 터, 게다가 책은 또다른 책을 반드시 낳는 터, 그러면 걸어본다 시리즈의 좀더 세부적인 기획을 할 수가 있겠구나, 하여 걸어본다 돈가스도 걸어본다 필기구도 걸어본다 오지랖도 구체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이곳 저곳을 거닐 줄 아는 예술가들의 산책길을 뒤따르는 과정 속에 저마다의 ‘나’를 찾아보자는 의도로 시작된 난다의 걸어본다. 안팎으로 많은 어려움 속에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 시작의 책임만은 잊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폭넓은 관심 속에 크나큰 애정으로 봐주시기를 정말이지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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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민정(시인, 난다 대표)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월간지 만드는 일에 뛰어들어 몇 군데 잡지사의 에디터를 거쳤고, 2004년부터 마흔을 목전에 둔 지금까지 출판사 <난다>에서 편집자, 대표로 일하고 있다. 산토끼를 닮은 고양이 무구와 둘이 산다. 최근에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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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 저11,700원(10% + 5%)

김유진 작가의 에세이 『받아쓰기』는 그 부제 ‘내가 머문 아이오와 일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아이오와에서 머문 3개월 동안의 일상을 매일같이 일기로 기록한 에세이다. 2015년 8월 22일부터 11월 11일까지, 33개국에서 온 34명의 시인, 소설가, 번역가와 함께 문학으로 책으로 어울렸던 기록의 결과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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