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귓가에 여자 노랫소리

나는 우울증이 진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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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사회적이고 참으로 무난한 그들이 모두 우울증 약을 복용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혹시 내가 여태 그걸 안 먹고 살아서 이런 사람이 됐을까 생각해본 적은 있다.

이경미의 어쨌든 06_일러스트.jpg

 

지난 주, 어느 음악상 시상식에서 수상을 한 뮤지션이 퍼포먼스를 했다.
여기서 돈과 명예, 재미 중 두 가지 이상 충족이 되면 좋겠는데 명예는 감사하지만 상금이 없고 나는 생활고에 시달려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으니 지금 이 상패를 경매에 붙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난 주, 내가 좋아하는 중국의 젊은 사진작가 REN HANG이 세상을 떠났다. 자살이라고 전해진다. 그로테스크하고 도발적인 이미지들이 주는 중독성이 대단했다. 그의 사진엔 신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마법 같은 순간들이 있고 때로는 그것을 자연과 한 프레임 안에 가두어 새롭게 조형했을 때 발견되는 충격적인 감각들이 있다. 자살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에게 우울증이 있었다고 한다.

 

내가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한 뮤지션도 젊은 나이에 부엌칼로 자기 심장을 찔러 자살했다. 약물중독과 갱생을 반복했던 그에게도 우울증이 있었다.

 

나는 우울증이 무섭다. 세상 모든 내 문제는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이 병이야말로 진짜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데 때로는 이해 받기도 어려워 혼자 늪으로 빠지기 시작하면 그냥 그렇게 존재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왜 이렇게 잘 아는 거지, 진짜 무섭게.

 

아무튼, 언젠가 동종 업계 친구들과 깊은 밤까지 술을 마시다 우울증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서 가장 사회성이 떨어지고 성격적인 결함도 숨기지 못 해 나도 불편하고 남도 불편하게 만드는 나에 비하면 정말 상식적이고 매우 사회적이고 참으로 무난한 그들이 모두 우울증 약을 복용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혹시 내가 여태 그걸 안 먹고 살아서 이런 사람이 됐을까 생각해본 적은 있다.

 

어린 시절, 심각한 거식증을 앓고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에다가는 맨날 뭘 적었는데 죽을 용기는 없고 저절로 안 아프게 죽어지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던 그 시절에도 나는 그게 우울증인지 몰랐다. 어찌나 삶의 이유를 못 찾겠던지 수녀가 되고 싶다고 진지하게 고민했었는데 정말 운 나쁘게 내가 진짜 수녀가 됐다면 나는 아마 기록적인 파계수녀가 됐을 게 뻔하다.

 

어제는 박 감독님을 만나 점심을 먹었다. 아무리 힘들었던 시절에도 한 번 걸린 적 없는 스트레스성 작은 질환을 최근 겪으셨다는데, 이상한 점은 요즘이 그 어느 때보다 스트레스가 없으시다는 거다. 굳이 스트레스를 찾자면 최근 집에서 좀 춥게 지냈다는 점뿐이라는데. 추위가 주는 스트레스가 결코 만만치 않다고는 말씀하시지만 사실 감독님에 비하면 나는 평생 스트레스를 내 몸의 장기마냥 달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강철 추위라고 해도 내 몸이 그것을 특별한 스트레스라고 감지해낼 리가 없다. 어쩌면 내게 그 어떤 스트레스성 질환도 없는 이유는 사실 그냥 내 존재 자체가 이미 질환 덩어리라서가 아닐까... 라며 진담 같은 농담인지 농담 같은 진담인지 아무튼,

 

나는 평소에도 소리에 민감한 편인데 시나리오 작업만 시작했다 하면 이 지구상의 모든 소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한 줄도 못 쓰는 날이 부지기수다.

 

나의 이 예민한 소리 탐구는 고3때 처음 시작됐다. 지금도 기억한다. 8월 14일 밤, 독서실에서 열공 중인데 어떤 여자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독서실에서 감히 노래를 부르다니! 범인을 잡기 위해 온 방의 모든 칸에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실패했다.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씻고 자리에 누웠는데 아니 그 여자가 내 침대에서도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내 귓가에 여자 노랫소리.

 

드디어 나한테 귀신이 붙었나 보다. 벌떡 일어나 불을 켰다. 살살 움직이다가 콩콩 뛰어도 차분한 귓가의 노랫소리는 흔들림이 없다. 영화에서나 보던 바로 그 엑소시스트의 주인공이 내가 되는 것인가. 나는 너무 무서워서 기절초풍할 것처럼 울기 시작했고 주무시다 깨신 우리 엄마는 반수면 상태에서 무작정 냉장고 문을 열고 작은 유리병을 꺼내셨다. 그리고는 그 안에 든 투명 액체를 막 나한테 들이 부으셨다. (알고 보니, 그것은 로마 바티칸에서 공수해온 귀한 성수라고 함) 그래도 내가 울며불며 정신을 못 차리니 당황하신 우리 엄마도 혹시 영화 엑소시스트를 보셨던 걸까. 갑자기 막 구마사처럼 나를 붙들고 기도하시면서 내 등짝을 때리셨다가 쓰다듬으셨다가 광복절 새벽은 그렇게 멈추지 않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문득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 때 내 동생은 뭘 했는데 이렇게 기억에 없지...? 어떤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내 동생은 끝까지 잘 잤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공휴일 전날 기록적인 과음을 하시고 이른 새벽 귀가하신 우리 아빠는 취중에 믿기 어려운 광경을 목격하신 거다. 잠옷 바람에 봉두난발의 두 여자가 막 십자가를 쥐고 뭘 뿌리고 때리고 어떤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며 울부짖으면 주기도문 외우고 막 해는 떠오르는데 이것이 현실인지 취중환상인지 헷갈리는 광복절 아침, 우리 아빠는 정신 나간 모녀를 뒷좌석에 싣고 우리는 묵주와 십자가,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쥐고 경기도 마석으로 향했다.

 

아직도 기억한다. 그 해 광복절 여름은 사상최고의 더위였다. 공휴일 지방 나들이를 떠나는 행렬은 고속도로를 꽉 메웠는데 우리 자동차 타이어가 기적적으로 터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아빠가 제일 불쌍하다. 신심이 깊은 우리 엄마는 주님한테 의지라도 하셨지, 냄새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고속도로 땡볕 아래에서 타이어를 갈아야 했던 우리 아빠는 전생을 원망하지 않으셨을까.

 

어렵게 도착한 마석엔 유명한 구마사제가 있었다. 구마사제는 뜨거운 손을 내 머리 위에 얹고 눈을 감았다. 이러다가 내가 갑자기 눈깔이 확 뒤집히더니 뒤로 발라당 누워서 네 발 게걸음으로 이 방을 뛰쳐나가게 될까 봐 벌벌 떠는데 잠시 후, 구마사제 가라사대,

 

“경미는 그냥 운동 부족이다. 줄넘기라도 좀 해라.”

 

나는 우울증이 진짜 무섭다.

 

재미를 주고 돈과 명예를 가져간 어느 뮤지션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나도 ‘돈, 명예 그리고 재미’에 대해 생각해본다.

 

만일에 나라면 세 가지 중에 뭘 하나 포기할까? 일단, 돈도 안 되는데 재미도 없으면 우울하다. 명예 없는데 돈 있으면 그 돈으로 재미있는 걸 찾아본다. 재미없는데 명예 있으면 우울하다. 재미있는데 돈이 안 되면 우울하다. 돈도 안 되는데 명예가 있으면, 이렇게 명예가 있는데 돈도 안 된다니 더 우울하다.

 

... 일단 나는 누군가에게 재미를 주기는커녕 내가 우울하지 않은 상태로 두 가지를 획득하는 것 자체부터가 불가능이네...

 

그나저나 내 귓가의 여자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궁금하지 않다. 그것은 남은 평생 궁금할 계획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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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경미(영화감독)

1973년생. 영화 <비밀은 없다>, <미쓰 홍당무>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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