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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토피아>, 우리에겐 ‘다른 친구’가 필요하다

내게 노동자 친구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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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머리카락처럼 돋아나는 편견을 도려내려면 매일 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오늘 어떤 사람들을 만났냐고. 다른 계층, 다른 분야, 다른 직업, 다른 생각,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과 만날 수는 없느냐고. 그러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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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비게이션 없는 차를 몰고 뉴욕 외곽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거리 이곳 저곳을 둘러봐도 온통 흑인들뿐이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저들이 차 앞을 가로막지 않을까, 차 문을 열고 올라타진 않을까. 땀이 차오르는 손으로 정신 없이 핸들을 돌렸다. 부끄러움을 깨달은 건 동네를 빠져 나온 다음이었다. 사실 그들이 내게 피해를 준 건 없었다. 그들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나를 불안에 떨게 한 것은 나 자신의 편견이었다. 인종차별 따위 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자화상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만약 편견이 장기에 있다면 뇌나 심장이 아니라 내장에 감춰져 있을 거야.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는 편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배경은 육식동물과 초식동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상적 도시(zoo utopia). 호모 사피엔스는 없다. ‘포유류 통합 정책’이 실시되는 이 도시의 경찰서에 어느 날 토끼 주디 홉스가 배치된다. 주디가 사기꾼 여우 닉 와일드와 연쇄 실종 사건을 풀어나간다는 줄거리다.

 

툰드라 타운, 사바나 센트럴, 사하라 스퀘어, 레인 포리스트 같은 다양한 생태계로 나뉜 주토피아는 모두가 평등한 민주공화정이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다. ‘작고 약한 토끼는 경찰이 될 수 없어.’ ‘여우는 교활하고 토끼는 멍청해.’ ‘육식동물은 언제든 야수가 될 수 있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본능은 육식동물의 공격 본능이 아니다. 편견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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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단지 여우란 이유로 다른 동물 친구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한 여우 닉은 “세상이 여우를 믿지 못할 교활한 짐승으로 본다면 굳이 다르게 보이려고 애쓰지 말자”고 마음먹는다. 외부의 편견을 내면화한 것이다. 정의롭고 선량한 토끼 주디 역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고, ‘누구나 뭐든지 될 수 있다’고 믿고,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역시 여우 퇴치용 스프레이를 허리춤에 차고 다니고, 무심코 “수천 년간 이어져온 육식동물의 생물학적 요소”란 편견을 내뱉는다.

 

<주토피아>는 어울려 살긴 하지만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차별 받는 인간 세계에 대한 우화다. 희망은 반성할 수 있는 힘에 달렸다. 토끼 주디가 여우 닉에게 자신의 편견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반전은 시작된다. 영화는 편견을 고백할 용기가 있느냐, 용서를 구할 용기를 갖고 있느냐,고 묻고 있다.

 

판타지가 아닌 현실로 돌아오자. 한국에서 지연과 학연은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다. 많이 배웠다는 분들이, 지성인이라는 분들이 사석에서 특정지역에 대한 편견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걸 지겹도록 봐왔다. 채용 면접에서 “자네는 똑똑한 것 같은 데 왜 OO대를 못 갔나?”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취업준비생의 속상함을 전해 듣기도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계층 양극화다. ‘금수저’ ‘흙수저’ 계급론이 나올 만큼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다른 계층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사라져가고 있다. 이젠 계층과 계층이 서로 친구 되는 것조차 어려워진 시대 아닐까. 어쩌면 토끼는 토끼끼리, 여우는 여우끼리, 나무늘보는 나무늘보끼리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얼마 전 <매일노동뉴스>에 한 변호사의 글이 실렸다. 제목은 ‘판사를 이해하는 방법’. 그는 법원의 노동사건 판결을 보면서 이런 가설을 설정해봤다고 한다.

 

“우선 이들 판사들의 친구 중 노동자, 특히 노조활동을 하는 노동자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런 친구가 한 명도 없으니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스산하고 노조활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피부에 와 닿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판사가 맘 편히 가는 동창 모임이나 교회 모임 등에서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기업가 아니면 관리자일 것이고….”(강문대 변호사, 민변 노동위원장)

 

고백하건대, 나에게도 ‘노조 활동을 하는 노동자 친구’가 없다. 평소 만나는 이들은 대개 동료 기자이거나 법조인이거나 전,현직 공무원, 교수, 기업 임원이다. 스스로 노동하며 살면서도 허위의식과 타성에 빠져 내 자신이 파놓은 우물에 갇혀버린 건 아닌가.

 

내가, 그리고 당신이 거리에서 누군가와-이를테면, 생존권의 머리띠를 두르고 주먹을 움켜쥔 이들과-마주쳤을 때 서늘한 두려움이 앞선다면 뭔가 잘못 살고 있다는 뜻이다. 내장 속에 편견과 차별의식이 도사리고 있다는 의미이고, ‘다른’ 친구가 곁에 없다는 의미다. 1970년대 청계 공장의 청년 전태일은 ‘내게 대학생 친구가 있다면…’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지금은 판사, 검사, 공무원, 교수, 기자들이 ‘내게 노동자 친구가 있다면…’이라고 적어야 하는 시대다.

 

매일 머리카락처럼 돋아나는 편견을 도려내려면 매일 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오늘 어떤 사람들을 만났냐고. 다른 계층, 다른 분야, 다른 직업, 다른 생각,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과 만날 수는 없느냐고. 그러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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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석천(중앙일보 논설위원)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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