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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과 철학이 곁들여진 기묘한 장르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 연설 재치와 침묵과 웅변과 사생활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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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있는 글은 좁아서 답답하고, 세계만 있는 글은 멀어서 손에 잡히지 않고, 도구만 있는 글은 재주만 드러나서 진실함이 부족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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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imagetoday

 

 

여덟 번째 문제. 작가의 대화

 

<문제>


다음은 예루살렘상을 받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 연설 중 일부분입니다.

 

일본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예루살렘 상을 받지 말라고 제게 충고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예루살렘에 오면 제 책의 불매운동을 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혹독한 전투 때문입니다.

수상 사실을 통보 받고 수없이 제게 자문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이스라엘을 방문해서 문학상을 받아야만 할까? 나의 행동이 분쟁 중인 한쪽을 지지하는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저는 어떤 전쟁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한 나라를 지지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제 책들이 불매 운동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바라지 않습니다.

심사숙고 끝에 저는 예루살렘을 방문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제 결정의 한 이유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하지 말라고 충고했기 때문입니다.

거리를 두기보다는 이곳에 오기를 선택했습니다.
보지 않기보다는 보기를 선택했습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보다는 여러분께 말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오늘 매우 개인적인 메시지 하나를 전하려고 합니다. 제가 소설을 쓸 때면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는 어떤 것입니다. 종이에 적어서 벽에 붙여놓지는 않았지만, 제 마음의 벽에 깊이 새겨져 있는 문장입니다.

 

“높고 단단한 벽과 그 벽에 부딪혀 깨지는 달걀이 있다면, (문제).”

 

다음 중 빈칸에 들어갈 ‘하루키스러운 문장’은?


1) 달걀로 벽을 더럽히는 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2) 나는 오늘 저녁 달걀과 함께 두부 부침을 만들어 먹을 것이다.
3) 그건 그렇고, 고양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달걀은 어디에서 만들어진 제품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4) 나는 언제나 달걀의 편에 설 것이다.
5) 나는 달걀과 함께 벽에 머리를 박겠다.

 

<문제 해설>


얼마 전에 상을 하나 받게 되었다. 상을 받는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수상 소감을 쓰고 말하는 게 가장 부담스러웠다. 대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대화 완전 정복 네 번째 문제에서 예를 들었던 노엘 갤러거의 뻔뻔한 수상 소감을 따라 하기엔 내 멘탈이 너무 약하고, 무작정 겸손한 이야기만 늘어놓자니 스스로가 벌써부터 지루해진다. 이럴 땐 솔직한 게 최선이지만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가.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마음속에서는 서너 가지 감정이 동시에 생겨났다. 첫째가 ‘내 작품을 알아봐 주어 고맙다’는 감정이고, 둘째는 ‘그럴 만한 작품이 아닌데 상을 받게 되어 송구하다’는 감정이다. 부차적인 감정으로는 ‘상금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이다’와 ‘시상식 날엔 뭘 입어야 하나’ 같은 게 있었고, 마음 구석에는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크기로 ‘그래, 내가 글은 참 잘 쓰지’라는 자만심도 있었다. 그 모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문장을 쓰는 건 불가능하다. 시상식 전날까지 나는 문장을 이어 나가질 못했다. 썼다가 지우길 반복했다. 어떤 문장은 너무 겸손해 보이고, 어떤 문장은 너무 건방져 보이고, 어떤 문장은 나답지 못했다.

 

책장 앞을 서성거리다가 『아버지의 여행 가방』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제목 아래에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그래,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바로 이 책이야!’라는 마음과 ‘나 따위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을 참고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그 책을 열어보지 말았어야 했다. 책장을 서성거리지도 말았어야 했다. 그 책을 사지도 말았어야 했다. 수상 소감의 마감은 내 이성을 무너뜨렸고, 나는 다급한 마음에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노벨상 수상 연설을 움켜쥐었다. 거기에는 오르한 파묵, 귄터 그라스, 오에 겐자부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명연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연설문을 읽으면서 감탄하고 절망했다. 서문에 적힌 “연설에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와 작가관을 포함한 정신세계를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연설을 듣는 것은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을 한 번에 읽는 것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라는 말을 읽으면서 실감했다.

 

『아버지의 여행 가방』에 실린 작가들의 연설문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의 소박한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서 시대와 사회를 관통한 다음, 창작에 대한 철학으로 마무리 짓는다는 것이다. 세 가지 과정은 글쓰기의 기본이기도 하다. 내게 글쓰기의 3원칙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도 된 것처럼 우쭐거리며 말해보자면) 첫째는 ‘나’이고, 둘째는 ‘세계’이고, 셋째는 ‘나와 세계를 연결시키는 도구’라고 말할 것이다. 나만 있는 글은 좁아서 답답하고, 세계만 있는 글은 멀어서 손에 잡히지 않고, 도구만 있는 글은 재주만 드러나서 진실함이 부족해 보인다.

 

수상 소감을 빨리 써야 하는데, 나는 글쓰기의 3원칙을 곱씹고 있었다. 나에게는 ‘나’가 많고, ‘세상’이 부족해 보였다. 어쩌면 ‘나’와 ‘세상’은 있는데, ‘도구’가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전부 부족한데 ‘도구’만 자꾸 개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상 소감을 빨리 써야 하는데, 나는 몇 년 되지도 않는 작가 경력을 되돌아보며 한심한 생각만 거듭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여행 가방』을 열어보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서둘러서 수상 소감을 대충 끝냈다. 아직은 수상 소감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아버지의 여행 가방』을 마저 읽었다.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수상 연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연설에서는 늘 첫마디가 제일 어렵다고들 합니다. 자, 이미 첫마디는 이렇게 지나갔군요. 하지만 다음 문장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 여섯 번째, 열 번째,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 이를 때까지도 이러한 고민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 ‘시’에 대해 말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재치 있지만 묵직한 시작이다. “연설에서는 늘 첫마디가 제일 어렵다고들 합니다. 자, 이미 첫마디는 이렇게 지나갔군요.”만 있었다면, 단순한 재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문장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가 이어지는 순간, 심보르스카가 어떤 방식으로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수상 연설은 재치와 침묵과 웅변과 사생활과 철학이 곁들여지는 기묘한 장르다. 때로는 인터뷰보다 더 솔직한 대화가 이뤄지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도 묻지 못할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자문자답하기도 한다. 수상 연설이란 작가에게 가장 솔직한 대화의 형식일지도 모르겠다.

 

수상 연설을 한편 한편 읽어 나가면서 세상에는 참 다양한 작가들이 살고 있다는 걸 새삼 되새겼다. 모든 작가들의 연설이 ‘글쓰기의 3원칙’에 충실했지만, 그 내용들은 천차만별이었다. 경험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방식이 달랐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때로는 참 신기하다. 오르한 파묵은 『소설과 소설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소설가는 실재하거나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독자와의 체스 게임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글을 쓰고, 어떤 소설가는 이 게임을 끝내기 위해서 글을 씁니다. 또 어떤 소설가는 독자의 눈앞에 위대한 기념탑을 세우기 위해 글을 쓰고 어떤 소설가는 프루스트처럼 독자의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글을 씁니다. 어떤 소설가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어떤 소설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 받지 못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 모순되는 의도들은 소설의 본질에 적합합니다. 소설을 쓸 때 작가는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일화하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의 중심부를 (멀리 떨어져서 통합적인 관점으로 제대로 조준해 보아야 알아볼 수 있는 소설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의미를) 교묘하고 노련하게 감춘 채 암시를 던져 주려고 노력합니다. 소설 예술의 심장부에 내재된 핵심 패러독스는 소설가가 세상을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세계관을 표현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문제를 풀어보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떤 작가일까. 하루키는 독일의 일간지 <디 벨트>가 주는 ‘벨트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제게 벽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 하나의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을 떼어놓은 것의 상징입니다. 벽은 우리들을 지켜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자를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벽의 논리입니다. 벽은 결국 다른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고정된 시스템이 됩니다. 때로는 폭력을 동반해서. 베를린 장벽은 바로 그 전형이었습니다.”

 

두 개의 연설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벽’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세계는 거대한 벽이고, 우리는 벽에 던져지는 달걀들이다. 벽 사이에 끼여 있는 달걀들이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달걀들이다. 하루키는 달걀인 우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답은 당연히 4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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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중혁(소설가)

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 아버지의 여행가방 <오르한 파묵>,<르 클레지오>,<가오싱젠>,<귄터 그라스>,<주제 사라마구>,<오에 겐자부로> 등저/<이영구> 등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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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과 소설가 <오르한 파묵> 저/<이난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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