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터백 리오 퍼디난드가 말하는 축구와 인생에 대한 지침서

『리오 퍼디난드 , 두 얼굴의 센터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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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저 녀석이 리오야. 축구 좀 하더라” 하고 말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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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살던 건물 앞 거리 두 블록 사이에는 작은 정원이 하나 있었다. 사실 쓰레기장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환상적인 장소이기도 했다. 그곳이 우리의 웸블리였고, 올드 트라포드였다. 그곳에서 축구를 할 때면 나무들을 피해야 했다. 또 군데군데 난 구덩이에 빠져 발목이 삐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요즘 아이들처럼 근사한 골망을 갖춘 골대 같은 건 없었다. 나무 하나를 골문 삼았고, 다른 골문은 누군가의 점퍼를 걸어 만들었다. 우리는 한 팀에 3명, 혹은 4명씩 팀을 만들어 놀았다. 한 편이 15명일 때도 있었다. 놀 때마다 주위에 애들이 얼마나 있는지가 중요했다.


나는 또래와 함께 공을 차지 않았다. 너무 유치해보였다. 대신 형들과 놀았다. 대개 날 너무 어리다고 했지만, 그래도 축구 실력을 인정해서 팀에 끼워줬다. 시합이 끝나면 계단에 걸터앉아 시합이나 일상에 대해서 밤늦게까지 웃고 떠들었다. 그 친구들 역시 축구를 잘했고, 대부분은 리버풀 팬이었다. 그중 개빈 로즈는 나보다 두 살이 많았고, 축구 실력도 더 좋았다. 우리는 개빈을 ‘우리의 존 반스1’라고 불렀다. 지금도 내 가장 친한 친구다.


아빠는 축구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쿵후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나는 매시간, 매일, 매주 축구를 했다. 방과 후에는 밖에 나가 기술을 연습하거나 길거리에서 공을 찼다. 다른 일이라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자연스럽고 일상적이었다. 우리는 남 런던에 살고 있었지만, 옷차림새는 어디서 왔나 싶을 정도로 각양각색이었다. 스테판이라는 친구는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인 세리에A의 최신 경기가 담긴 비디오들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스테판의 집에 우르르 몰려가 비디오를 보고는, 밖에 나가 따라하곤 했다. 요즘처럼 버튼 하나로 위성, 케이블, 인터넷을 통해 세계 각지의 축구를 접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시 TV에서 볼 수 있던 것은 몽땅 봤다. <매치 오브 더 데이>2, <그랜드스탠드>3, <세인트 & 그레이브스>4까지 모두.


요즘 아들 녀석은 자기 전에 “아빠, 그 네이마르 유튜브 동영상 좀 보여주세요” 하고 말하곤 한다. 예전에는 마라도나가 내 우상이었다. 스테판의 비디오에서 마라도나가 키피어피5를 하는 모습,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뛰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마라도나가 드리블로 상대를 제치는 모습은 정말이지 환상적이었다. 우리끼리 시합을 할 때면 모두 마라도나처럼 되고 싶어 했다. 잉글랜드를 상대로 마라도나가 골을 넣었을 때 나왔던 라디오 해설을 따라하기도 했다. 공을 몰면서 “조그만 덩치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갑니다….”(이 대목은 완전히 외우고 있었다)“…버처를 순식간에 제치고… 펜윅을 바깥쪽으로 제치고 나갑니다…”6 그러고서 내가 공으로 나무를 맞춰 득점을 올리면… “저래서 리오가 세계 최고의 선수인 거죠!” 하고 떠드는 식이었다.


마라도나는 ‘크면 저 사람처럼 돼야지’ 하고 마음먹은 첫 번째 인물이었다. 하지만 신체 조건이 너무 달랐다. 나이를 먹으면서 프랑크 레이카르트7, 존 반스, 폴 인스8, 가자(폴 개스코인)9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단지 발만 빠르거나 거친 선수들은 쳐주지 않았다. 번뜩이는 재능을 지닌 선수들이 좋았다. 나뿐 아니라 모두들 그랬다. 잉글랜드 선수 중에는 존 반스의 인기가 가장 좋았다. 하지만 우리는 대개 외국 선수들을 더 좋아했고, 그들을 따라하며 기술을 연습했다. 누구든 가장 멋진 기술을 익힌 녀석이 대장이었다.


나중에 여러 팀에서 훈련을 하면서, 잉글랜드 축구에서는 기술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래도 나는 꽤 운이 좋은 편이었다. 특히 웨스트햄에서 만난 코치들은 결코 플레이스타일을 바꾸라고 세뇌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 스타일을 받아들였고 본래 특성을 살리려고 했다. 당시 웨스트햄을 거쳐간 선수들 중에는 재능이 넘치는 친구들이 많다. 글렌 존슨은 전형적인 라이트백이 아니다. 마이클 캐릭은 좋은 발재간과 클래스, 시야, 넓은 패스 범위를 가졌다. 조 콜, 특히 젊은 시절의 그는 믿을 수 없을만큼 기술이 대단한 선수였다. 프랭크 램퍼드는 언제나 주관이 뚜렷한 선수다. 코치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플레이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누구도 우리만의 특성을 없애려 하지 않았다.


열세 살 무렵의 일이었다. 개빈은 일요일에 버기스파크에서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아프리카 아저씨들과 한 게임 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시에라리온이나 나이지리아 출신이었다. 거칠고, 공격적이며, 대단한 축구 실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엄마는 나를 말렸다. 우리가 사고나 칠 거라고, 무슨 일이 나면 한바탕하거나 도망이나 갈 거라고 생각하셨다. 결국 허락하시기는 했지만, 사실 처음 몇 번은 몰래 약속 장소로 향했다. 버기스파크에 가기 위해서는 프라이어리에서 출발해 다른 두 지역을 지나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터를 좀 지나서, 커다란 개들이 어슬렁거리는 집시촌 역시 거쳐야 했다. 귀가가 늦어지면 뒤통수가 서늘할 만했다.


그 아프리카 사람들은 꽤 험상궂었고, 나이도 20대나 30대로, 우리보다 거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그들은 차를 끌고 나타났고, 한 가정의 가장인 경우도 있는 듯했다. 당연히 우리는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을 끌어야 했다. 이 무렵 난 이미 프로 축구선수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축구를 하는 이유는 언제나 같았다.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친구들에게서, 상대에게서, 동료들에게서, 날 지켜보는 관중에게서.


어쨌거나 친구들과 난 버기스파크에서 공을 차고 기술을 뽐내면서 그들 주위를 알짱거렸다. 끼워줬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처음 끼워달라고 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안 돼, 너넨 너무 어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우리와 공을 한 번 차보더니 우리 실력이 꽤 좋다는 걸 알게 됐다. 그 후로는 언제든 같이 공을 찰 수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축구를 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이건 뭔가 달랐다. 그들은 빠르고 강했으며 패스를 하지 않으면 같은 팀원들에게 발길질을 당하곤 했다. 정강이보호대 따위는 하지 않아서 종종 넘어져 다칠 때면 울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한번 울기 시작하면 다시는 시합에 끼워주지 않을 게 뻔했다. 어떻게든 계속 공을 차야했다.


상대는 훨씬 키가 크고 빠르며 덩치가 크고 힘도 셌다. 이들을 감당할 수 있다면 축구를 더 잘할 수 있겠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조금 더 생각하고 패스하고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그럴듯한 기준도 없었고 전술이라 부를만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부담이 컸다. 달리기에서도, 힘에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없었기에 다른 방식을 시도해야 했고 스피드 없이도 상대를 제치는 법을 익혀나가야 했다.


이곳에서 얻은 경험 덕에 나는 선수로서 더 성숙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상대 중 누구와도 끝내 개인적으로 안면을 트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름을 묻더라도 아무 대답도 해줄 수가 없다. 우리는 순수하게 축구만 했다. 일요일에 몇 시간 동안 공을 차고 집에 갔다. 그들은 10대와 노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시합이 끝나면 상대가 날 인정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저 녀석이 리오야. 축구 좀 하더라” 하고 말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요즘에는 축구를 시작하는 어린 선수들을 너무 오냐오냐 하는 것 같아 정말 걱정이다. 이전 세대에 비한다면 지나치게 애지중지한다. 선수경력이나 인생에서 조금이라도 어려움이 닥치면 어쩔 줄 몰라 할 게다.


요즘 어린 선수들과 내 꼬맹이 시절이 가장 다른 점 중 하나는 훈련장에 갈 때 승용차를 탄다는 거다. 모든 게 갖춰져 있다. 내가 열네 살 무렵에는 훈련장에 오갈 때마다 버스와 기차를 두 시간 동안 타야 했다. 방과 후 대부분의 친구들은 병 돌리기 놀이나 새를 잡아서 노는 걸 좋아했다. 친구들은 내가 “10분만 뛰더라도 가야 해. 훈련 빼먹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걸 비웃었다. 하지만 훈련에 늦을 수는 없었다. 비웃던 친구 중 몇몇은 프로선수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하지만 ‘이 정도면 됐어’ 하고서는 제자리에 머물렀다. 지금 그 친구들은 공사판에서 일한다.


훈련장에 가는 건 여행길이나 마찬가지였다. 모교인 블랙히스블루코츠 중학교에서 뉴크로스로 향하는 53번 버스를 탔다. 그렇게 20분을 갔다. 뉴크로스에 도착해서는 다시 동런던선 전철을 타고 화이트채플로, 다시 둑을 따라 걷다가 스트랫퍼드로 지하철을 타고 갔다. 데겐엄과 레드브리지로 향하는 지상철을 타는 지점에서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버스를 타고 채드웰히스에서 내려 10분을 걸어야 비로소 웨스트햄 구단 훈련장이 나왔다. 돌아갈 때 역시 같았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마다 그랬다. 페켐에서 웨스트햄 훈련장을 매주 오간 건 나까지 총 세 명이었다. 지금은 축구 에이전트 일을 하는 앤디 맥팔레인, 그리고 직장에 다니면서 아마추어 선수로 뛰는 좋은 친구 저스틴 보웬이다. 힘든 일과였지만, 이렇게 자랄 수 있었던 건 그때 경험 덕분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과 열망이 있어야 했다. 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고,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연습생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재치 있고 쾌활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20년 전만 해도 축구화를 닦는 것은 프로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웨스트햄에 연습생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토니 코티10에게 조련을 받았다. 토니는 그때 팀에서 9번을 맡을 정도로 최고의 선수 가운데 하나였다. 내 임무 중 하나는 그의 축구화 관리였다. 가죽약 냄새가 가득한 축구화 보관실에서 농담을 지껄이며 낄낄대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게 들렸다. “퍼디난드, 이 새끼 어디 갔어?” 밖에 나와 보니 딱 5피트(약 160센티미터)짜리 땅딸보가 보였다. 토니 코티였다.


“내 축구화 어디다 처박아놨어?” 그가 소리쳤다.
“무슨 축구화요?”
“네놈이 내 축구화 담당이잖아. 축구화 어디 뒀냐고?”


축구화 보관실에 있는 토니의 자리에 걸어놓으라고 들어서 그렇게 해놨다고 말했더니 토니는 “매일 아침 내 자리에 축구화, 연습용 유니폼, 속옷, 트레이닝복까지 준비해놔” 하고 시켰다. 그건 내 일이 아니라고 대꾸하자 그는 화를 냈다. “내 축구화 담당이면 닥치고 하라는 대로 해.” 그러고선 나가버렸다.


그해 내내 토니가 지시했던 것들을 매일 준비해야 했다. 원래 연습생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제 예전의 연습생은 없다. ‘미래의 스타 선수님’들은 옛날처럼 추운 날씨에 선배들 축구화 진흙을 털어내느라 손가락 떨어져나갈 일이 없다. 당시에는 원정팀 라커룸도 선수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청소해야 했다. 문 앞에서 기웃거리며 기다리다가 “이제 들어가도 돼요? 저 이러다 기차 놓쳐서 집에 못가요”라고 말하면 “꺼져! 나가!”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매일 그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 덕에 조금 더 빠릿빠릿해질 수는 있었다.


가장 최악이었던 일 중 하나는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화장실 청소였다. 그 때문에 훈련장에 더 오래 남아 있었다. 화장실 청소를 맡으라고 하면 “못 하겠는데요. 저 추가 훈련 해야 하거든요”라고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델 보이11처럼 축구를 핑계로 요령을 피웠다. 항상 동료 프랭크 램퍼드, 조 키스12와 함께 경기를 뛰면서 궂은일을 피해갔다. 언젠가 유스팀 감독이었던 토니 카13가 바닥청소를 시켰을 때 우린 “알았어요. 대신 토요일 경기에서 우리 슛이랑 패스가 엉망이 되더라도 감독님 책임입니다”라고 대꾸했다.


그때 우리는 그런 편의를 ‘얻어’내야 했지만 요즘 어린 선수들은 저절로 보장받는다. 그런 변화에는 나쁜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어린 선수들이 성인 선수들 라커룸에 들어가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실력을 보여줘야 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온다. 아드난 야누자이는 입단 첫날부터 원래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라커룸에 들어왔다. 그에게는 이상할 게 없는 일이기는 했다. 야누자이의 잘못이라는 게 아니다. 그 라커룸에 들어가는 게 선수 생활 동안 얼마나 많은 관문을 거쳐야 가능한 일이었는지 야누자이는 모른다. 마치 사다리를 천천히 타고 올라가야 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전에 박지성에게 한국에서는 어떤 식이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박지성은 “선배들이 밥을 다 먹기 전에는 숟가락도 못 들어. 먹는 건 둘째 치고 자리에 앉지도 못해” 하고 답했다. 그 말에 나는 “그래, 그래야지!”라고 맞장구쳤다. 하지만 이곳 잉글랜드는 모든 게 다른 식으로 변하고 있다.


맨유 시절 헬스용 실내자전거에 얽힌 짜증나는 일이 있었다. 맨유에는 선수단 모두가 훈련 전에 쓰도록 실내자전거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각 자전거마다 1군 선수들이 보통 사용하는 자리가 정해져 있다. 팀 미팅이 끝나고 갔더니 유스 소속 꼬맹이 한 녀석이 후안 마타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야 인마, 거기 마타 자리야.”


하지만 그 녀석은 마치 “내가 왜 옮겨” 하는 표정으로 다른 유스 선수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딴에는 장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 같았으면 바로 귀싸대기를 올릴 상황이었다.

“뭐가 어째?”
퍽!
“당장 꺼져!”
하지만 요즘 그랬다간 방송이나 신문에 날 일이다. 우리 중 하나가 그 녀석에게 조용히 얘기했다. “다음부터 1군 선수가 오는 걸 보면 닥치고 자리에서 꺼져, 알았어?”


지난 시즌 맨유에서 어린 선수 중 하나가 감독 앞에서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유가 궁금했다. “오늘 경기 뛸 줄 알았단 말이에요.” 나는 열아홉 살이나 먹은 놈이 애처럼 질질 짜지 말라고 했다. 선발로 못 뛰어서 화가 났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선발로 못 뛰어서 감독 앞에서 ‘울었다’고? 미친 거 아냐?


물론 많은 아이들이 그런 과정 없이도 곧잘 선수로 성장한다. 하지만 다른 몇몇은 좀 더 침착해지고 겸손해지고 인간으로서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앞으로 선수생활에 닥칠 일을 견디는 데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맨유에서 자리 잡지 못할 수도 있다. 하부 리그로 내려가 본머스나 여빌, 칼라일에서 뛸 지도 모른다. 그런 팀에서는 강하지 못하면 다른 선수들에게 산 채로 잡아먹힌다. 그곳 선수들은 목숨을 걸고 뛰니까. 그들은 기를 쓰고 싸운다.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다.


돈 문제도 그렇다. 젊은 선수는 기량을 인정받기 전에는 대개 별로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 몇몇 어린 선수는 어릴 때 많은 돈을 받고 뭔가 이룬 것처럼 착각한다. 아직 피 튀기는 훈련장을 벗어나지도 못한 주제에 말이다. 어린 선수 대다수는 그저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난 축구에서 언제나 영예와 승리, 선수로서의 성취가 중요했다. 어느 분야에서건 대부분 성공한다면 부자가 된다. 하지만 그저 부차적인 일일 뿐이다. 내게 돈이 문제가 됐던 적은 없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QPR 경기를 보러 갈 때 일찍 가자고 졸라댔다. 왜냐고? 경기 시작 전에 선수들이 몸 푸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몸 푸는 광경은 경기보다도 좋았다. 레이 윌킨스14가 롱패스 연습을 하는 걸 볼 수 있었으니까. 그가 경기장 라인을 따라 아름답게 공을 뿌려대는 걸 보며 생각했다. ‘내가 찰 때는 저런 소리가 안 나던데.’ 그러고 나서는 집에 돌아가 레이 윌킨스가 공을 찰 때 내던 소리를 내보려고 애썼다. 결국 끝까지 성공하지 못했기에 궁금증은 그대로 남았다. 나랑은 공을 다르게 차나? 다른 공을 쓰고 있는 건 아냐? 축구화가 캥거루 가죽이 아니라서 그런가?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경기에서 유명한 선수들을 보고 다른 질문을 한다.


“그 선수 탄 차가 뭐지?”
“무슨 색이야?”
“페라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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