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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상상의 광장 김포공항

김포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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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지방의 공사 현장 회의를 위해 아침 일찍 김포공항에 간적이 있다.

릴레이로 주거니 받거니 다양한 도시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 재미있지 않겠냐고 차형이 두 해 전인가 어느 더운 여름날 맥주를 홀짝이며 말을 던졌을 때만 해도 이런 식으로 상황이 흘러갈 줄은 몰랐다. 처음부터 책을 쓸 심산이었던 것도 아니고 우연찮게 시작했을 뿐인데 마침 출판사에서도 괜찮네요, 하는 바람에 일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런 경우를 일파만파(아니면 설상가상인가)라고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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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형이 아저씨를 주제로 원고지 10매를 간단히 써 젖히는 걸 보니(재미는 있더라만) 이런 식으로 나 역시 얼씨구나 하고 장단을 맞춰 쓰다 보면 건축, 도시 운운하며 시작한 이 책의 취지가 대체 어떻게 될지 약간 걱정이 된다. ‘건축가들이 쓴 나름 교양 있는 책인 줄 알았는데 대체 뭐임’ 하는 독자들의 분노와 항의가 슬슬 감지가 되는 것이다. 뭐 감지가 된다 한들 이제 와서 별 방법은 없겠지만.


변명하자면 차형과 나는 지금 건축이든 도시든 서울이든 아저씨든 뭐든 간에 결국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보면 그렇다는 것인데 읽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어쨌든 매사 먹고 사는 문제다 생각하면 세상에 못 쓸 글이 별로 없을 것 같고 마음이 편해지면서 글을 이어 써 나갈 의욕이 다시 생기곤 한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릴레이를 시작하면서는 늘 이런 식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고쳐 먹으며 하나씩 써 나가고 있다. 긍정적인 마음만이 우리의 시답잖은 이야기를 의미 있게 만들어주리라 다짐하면서.


차형이 광화문 광장(으로 부를 수 있는 장소인지는 여전히 알 길이 없지만)의 아쉬움에 대해 간만에 무척 공감 가는 이야기를 풀어주는 바람에 무척 흥미진진했다. 차형은 믿지 않겠지만 이번엔 밑줄까지 그으면서 글을 읽었다. 세종문화회관 2층 테라스의 추억은 나 역시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특히 그 계단에서 세종로를 빠져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캔 맥주를 마시던 여유롭기 그지없던 젊은 날의 기억은 지금도 흐뭇한 기분에 젖게 한다. 무심히 걷고 있는 보행자들과 대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공장 소음 같은 자동차 소리만 앵앵거리던 기이하고 적막한 거리의 정경들, 그런 장면들 속에 어떤 시간의 공감대가 존재하고 있다. 그런 장소를 이제 와서 굳이 ‘광장’이라고 부르며 이벤트를 위한 적막한 공터로 새 단장을 해놓았는데, 얼핏 유럽의 광장들처럼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실제로는 정해진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도록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웬일인지 눈치를 보게 만든 이런 애매모호한 용도의 커다란 공간을 광장이라 부르지 않기로 (그렇다고 다른 이름을 정한 건 아니고) 했다.


광장 같지 않은 광장을 만든 이유라면 불특정 다수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관리상의 불안이 그 원인일 것인데, 이용 목적을 관리의 차원에서 제어하려는 분위기가 이미 광장이라 불리기 어려운 이유가 된다. 광장의 원조라 볼 수 있는 유럽의 유명 광장들(가령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이나 브뤼셀의 그랑팔라스 광장처럼)을 가보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딱히 뭔가 특별한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띈다. 본디 광장은 길과 길이 만나는 결절이나 중요 시설, 큰 건축물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존재해왔다. 따라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개 길을 오가는 사람, 시설에 볼일 보러 온 사람, 누군가를 만나려고 약속 장소에 온 사람들이다. 그런 상황은 평일과 주말을 구별하지 않는다. 광장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풍경이 평일이냐 주말이냐에 따라 달라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행을 하는 이방인들도 종종 광장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들에겐 광장이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지 않는 랜드마크가 되고 시작점으로 삼기 좋은 여유의 공간이 된다. 차형이 말한 뭔가 참여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대로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분위기, 광장이라면 최소한 그런 여백의 정서가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란 아마 이런 여백의 정서가 받쳐줘야 가능할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차형이 지면 핑계로 슬쩍 떠넘긴 광화문 광장의 자유도에 대한 개선 방안은, 현 상태로는 무척 난감할 뿐이라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겠다. 대략 난감 별 방법 없음. 끝.

 

애써 광장을 조성한 관계 당국엔 죄송한 말씀이지만 서울시민들은 대부분 먹고살기 바빠서 걱정하는 것만큼 광장의 자유를 누릴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다. 제대로 만들었다 해도 쓸데없이 광장을 배회하거나 무슨 문제를 일으키거나 할 여력이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만들어놓은 이유가 뭘까. 하나는 아마도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사건마다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던 정열적인 선례들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결과적으로 광장은 시민들의 권력 행사를 위한 무대 역할을 했다는 점이 중요한 문제일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커다란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관리자의 입장에선 늘 존재할 테니까. 일종의 트라우마라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자동차도로로 둘러싸인 섬 같은 공간을 ‘광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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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공해에 강한 플라타너스를 광장 곳곳에 심어 좋은 공기를 내뿜는 작은 숲을 만들어주고, 둘러싸인 도로 일부를 지하도로 내려 광장과 세종문화회관, 광장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광장과 경복궁을 보행 공간으로 직접 연결하면 어떨까. 교보빌딩과 연결되는 공간에는 야외 독서를 즐길 수 있는 평상이나 벤치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편히 앉을 곳, 적당한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 더위를 피할 곳, 따뜻한 볕을 쪼일 곳,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 낮잠을 잘 수 있는 곳,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곳 등등 무작정 시간을 흘려보내도 좋을 분위기를 마련할 수 있다면 충분할 것이다. 광장의 풍경이란 그런 작은 분위기들의 모임이니까. 하지만 현재의 광장은 이 도시가 여전히 개인들에게 넓은 자유와 혜택을 누릴 기회를 건네지 못하는 답답한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해 보인다. 부조리한 현실에 어울릴 만한, 부조리한 광장이랄까.

 

글을 쓰는 중에 관람한 벤 스틸러(무척이나 좋아하는)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보며 나는 익명의 개인들을 ‘자유’하게 하는 광장을 상상했다. 그러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가 꿈꾸는 광장의 정서와 일치하는 김포공항의 기묘한 공간들을 떠올렸다. 사람을 포근하고 운치 있게 품어주는 김포공항의 정경들이 우리의 광장 콤플렉스를 일부나마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폐간된 『라이프』지의 사진 현상 전문가 월터 미티가 오랜 세월 처박혀 일하던 갑갑한 사진 작업실에서 벗어나, 갑자기 무지막지하게 광활한 공간으로 모험을 떠난다는 영화 줄거리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월터는 컴컴한 은둔의 장소에 갇혀서, 세계 곳곳에서 날아온 지구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사진들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전설적인 사진작가 숀 오코넬이 보낸 마지막 필름을 찾아 세상을 누비는 신세가 된다. 월터의 애잔한 여행기를 따라가며, 잔뜩 움츠러든 그가 호연지기를 얻어 멋진 남자로 거듭나면 좋겠다고 바랐던 관객이 나 하나는 아니었을 것이다. 여간해선 가볼 수 없는 지구의 숨겨진 풍경들이 줄지어 이어지는데 왜 그런 순간에 김포공항 3층의 조금 어둑하고 사막 휴게소 같은 탑승 대기실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그 공간은 활주로가 아련하게 보이고 길게 늘어선 의자에 앉아 설탕이 세 스푼은 들어간 진한 밀크 커피를 마시며 여행을 꿈꾸는 월터 같은 남자들이 있는 곳이다. 나는 영화를 보며 생각했던 것 같다. 수많은 현실의 월터들은 비록 멀리 떠나지 못하지만 활주로 너머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한껏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필름 하나 찾겠다고 어디 붙어 있는지 감도 안 오는 오지로 날아가 경차를 타고 헬기를 타고 북극 바다에 뛰어드는 월터를 보며, 한물간 공항의 대기실에서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보며 늦은 오후의 긴 햇살을 즐기는 익명의 월터들을 마음속으로 헤아려주었다.


한때 잘나갔던 시절을 뒤로하고 인천공항에 자리를 물려준 채 추억의 공간이 되어버린 김포공항은 쉽게 용도 폐기되지 않고 여전히 서브 공항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다. 매달 월 납부금과 카드 내역을 계산하며 갑갑한 사무실에서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월터들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근사한 장소가 우리에게도 있다면 그것은 아마 김포공항(광화문 광장이 아니라)이 아닐까. 그곳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자유가 있고 나를 숨길 수 있는 넉넉한 빈틈도 있는, 막연한 여행에 대한 설렘과 일상 탈출의 감성이 재회하는 장소다.

 

몇 해 전 지방의 공사 현장 회의를 위해 아침 일찍 김포공항에 간적이 있다. 무슨 일인지 일찍 들여보내주는 바람에 몇 명 없는 한가한 탑승 대기실에서 한 시간 넘게 활주로 풍경을 물끄러미 감상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공항이란 어디론가 떠날 목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더 어울리는 공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지보다 더 여행을 만끽 할 수 있는 곳이랄까. 그때의 탑승 대기실은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사람들, 혹은 떠날 수 없지만 떠나려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 자유 지대가 된다.


영화 속 월터는 실제로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슬란드도 그린란드도 아프가니스탄의 설산도. 그의 모험은 그가 늘 바라보던 사진 속에 펼쳐진 상상 속의 꿈들일 것이다. 활주로가 보이는 어떤 테라스에서 낮잠을 자다 깬 월터의 모습이 마지막 장면이었더라도 좋았겠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자리에 남아 객석의 관객들이 빠져나가는 장면을 바라보는데 공항의 도착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지친 여행자들의 뒷모습과 겹쳤다. 특별한 이유 없이 1년에 한두 번은 김포공항에 놀러간다.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늙은 공항엔 특별히 뭔가 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한 삶의 빈틈, 생활의 여유가 있다. 이글을 읽고 김포공항을 찾을 생각이 든 분들은 이왕이면 지하철을 타고 가시길. 도시의 지하를 통과하는 순간부터 상상의 여행이 시작되니 말이다.

 

 

 

 

 

 

 * 이 글은 『서울 건축 만담』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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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건축 만담차현호,최준석 공저 | 아트북스
『서울 건축 만담』은 쫄깃하고 시원한 치맥처럼 십 수 년의 인연을 이어온 두 건축가가 퇴근 후 사람 사는 냄새가 눅진하게 배인 치킨 집에서 맥주 한잔에 그날 걷고 보고 재구성한 서울의 일상을 풀어놓은 건축 에세이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변잡기 에세이를 빙자한 건축과 도시 이야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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