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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우리는 일본에 대해 제대로 몰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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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을 2년 만에 4권의 책으로 마무리했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을 2년 만에 4권의 책으로 마무리했다. 사실 그가 일본 답사기를 구상한 것은 20여 년 전 답사기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한국사가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의 역사’로만 한정되고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책에 적었다. 한일 관계가 정상화되면 일본 답사기를 쓸 계획이었으나 일본은 점점 더 우경화되고 한국은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일본편’이 한일 관계가 나쁜 상황에서 시류를 잘못 탔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일본을 좀 더 자세히 알려주고 싶어서 일본 답사기를 서둘러 펴냈다고 설명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은 ‘교토의 명소’ 편을 끝으로 하여 전 4권으로 마무리되었다. 더 이어가자면 도쿄 편, 오사카 편, 쓰시마 편, 조선통신사의 길 등등 아직도 남은 곳이 많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음 사람의 몫으로 돌리고 나는 여기서 끝내고자 한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p. 8 

 

그리고 독자들을 만났다. 지난 11월 12일, 서울 건국대 새천년관 대공연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완간 기념으로 열린 유홍준 교수의 강연회를 듣기 위한 인파로 북적였다. 이날 유 교수는 ‘일본 속의 한국문화와 일본문화의 성격’이라는 주제로 일본의 문화와 그것에서 헤아려 볼 수 있는 우리의 태도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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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유 교수는 BC 1만 년경부터 BC 300년까지 신석기 시대인 조몬시대부터 이야기를 꺼냈다. 이때 조몬토기가 등장했으며 당시 일본 열도의 주인은 아이누족이라는 원주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열도에서 훗카이도 등으로 쫓겨났다. 이후 맞이한 시대가 청동기 시대인 야요이 시대였다. 야요이 토기가 나타났고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시기로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300년까지 이어졌다. 민무늬 토기를 만들었으며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도래인)에 의해 생활양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것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고 유 교수는 지적했다.

 

“일본 열도의 원주민은 농사를 못 지어서 열매를 주로 먹었는데, 저장을 하지 못해서 많이 굶주렸다. 도래인에 의해 아이누족은 훗카이도까지 밀려났다. 오늘날 일본사람 DNA 70%가 우리와 같다. 언어도 우리와 비슷한 어순인데, 『총 균 쇠』의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한국과 일본을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 같다고 말했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

 

이어지는 고분시대는 기원후 300~600년으로 철기시대를 맞이했다. 유 교수는 이 시대를 ‘미스터리의 시대’라고 표현했다. 가야문화가 이곳에 이식됐는데, 국가로 갈 수 있는 물질적 역량을 쌓았고, 가야인들이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 시대는 극대와 극소가 병존하는 일본문화의 특성을 볼 수 있는 시대였다. 『국화와 칼』의 저자는 일본인과 말을 하면 ‘but also’가 가장 많이 나온다고 그것을 설명했다.

 

“문화유산을 통해 볼 때도 일본미술에는 항시 극단적으로 상반된 두 개념이 공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극대와 극소, 화려함과 검박함, 호방함과 검소함이 공존한다. 그것은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독립적 가치로 존재한다. 루스 베니딕트가 취재를 위해 일본인들과 인터뷰를 하다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그러나 또한(but also)……’이었다고 한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p. 28

 

 

유 교수는 이 무렵의 한반도 상황과 연계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삼국시대 700년 기간 중 삼국만 존재한 것은 120년 밖에 없다. 삼국시대라고 하지만 오국시대라고 인식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그때의 왜는 백제나 가야와 친했다. 이것이 신성 관계가 되니 고구려에서 담징도 보내고 금도 보내주면서 문화적인 친선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니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가 섞여서 교류한 것이 올바른 역사 인식이다. 특히 백제와 일본은 친했고, 무녕왕 성왕 등 6~7세기 백제문화가 꽃피는 시절, 일본으로 문화적 혜택이 갔다.”

 

이런 것은 아스카 시대(550~700년)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백제 유적지 곳곳에는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 한 식수가 있다. 아스카는 ‘새로운 미래’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한반도에 건너온 사람들이 모인 동네를 아스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일본사에서 중요한 불교가 552년 일본에 전파됐다. 이 무렵, 전쟁이 있었는데, 불교를 놓고 손해를 보는 세력과 이익을 보는 세력끼리 싸웠다. 즉 불교를 배척하는 토착세력과 불교를 숭상하는 세력이 부딪힌 것. 

 

“일본 고액권이 발행할 때마다 등장하며 법과 행정 체제를 세우면서 고대 국가를 선언한 사람이 성덕태자(쇼토쿠태자)다.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주면 거룩한 절을 세우겠다고 했던 성덕태자는 승리한 뒤 절들을 세웠다. 그런 과정에서 이데올로기로서 불교가 받아들여졌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법륭사였다. 일본 고대문화를 상징하는 사찰로 백제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623년에 만들어진 법륭사의 도래불상은 2.5m에 달하며 목조로 만든 9등신의 상이다. 얇은 옷자락이 흘러내리는 선이 무척 곱다는 것이 유 교수가 받은 느낌이었다. 

 

“앞뒤 관계를 모르고 삼국시대를 말하면 신라는 나쁘거나 멍청하다. 민족주의 입장에선 왜 외세를 끌어들였는지 불만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보자. 나라가 망하는 것은 존망의 문제다. 백제가 신라를 쳐들어가 합천까지 밀어붙여서 신라는 망하기 직전이었다. 민족 통일을 위해서 항복하겠나? 김춘추가 고구려로 달려가 연개소문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연개소문이 도와주는 대신 한강을 반납하라고 했다. 그러면 신라는 이겨도 손해니까, 당 태종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당 태종은 그렇지 않아도 고구려와 같이 강한 국가의 존재가 불편했고 눈엣가시였는데,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신라를 도왔다.”

 

나당연합군이 공격으로 백제는 멸망했다. 이후 부흥운동이 있었고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역사서에 나와 있으나 유 교수는 그렇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부흥운동이 아니라 아직 백제가 있었다는 것. 백제는 일본에 도움을 청했고 백제-왜 연합군과 나당연합군이 663년 백촌강에서  일대 혈전을 펼쳤다. 당나라에서 800척 2만5천명의 군대가 오면서 백제는 진짜 멸망했다. 그러면서 백제의 귀족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당연합군이 쫓아올 것에 대비해 수성, 대양성 등 규슈에 백제식 성을 쌓았으나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치러간 것이다.

 

“박노자 교수가 7세기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국제적 전투가 백촌강 전투인데, 대한민국 역사책에 이는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며 한국은 어떻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지 한탄했다.  일본 역사책에 백촌강 전투가 등장한다. 통일은 대박이고, 북한이 망하면 우리에게 온다는 생각은 어디서 왔나. 민족통일을 위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보존해주는 사람들에게 의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라가 멸망 직전에 도달해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못 배웠다. 민족은 하나라는 관념만 갖고 있으면 통일은 쪽박이다.” 

 

‘통일신라’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생긴 말이다. 그냥 신라였을 뿐이었다. 유 교수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있었던 때를 남북국 시대라고 부르며 우리 역사라고 하는데, 신라와 발해 사이에 단 한 번도 외교사절이 오간 적이 없음을 문제 삼았다. 당시 일본은 당나라를 가기 위해 한반도의 남해안과 서해안 항로를 이용했었으나 신라와의 관계가 버거워지자 오키나와에서 당나라로 가는 항로를 새로 만들었다. 혹은 동해를 따라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발해를 통해 당나라로 갈지언정 신라의 신세를 지지 않았다.

 

발해 입장에서 신라는 모국을 없앤 나라였다. 일본은 백제계 도래인들이 세운 나라인데 의당 신라가 껄끄러웠기 때문에 신리와 친선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백제인들, 새로운 일본을 만들다

 

나라시대가 도래했다. 700~800년(710년~794년)의 이 시대는 일본이 동아시아의 당당한 문화국임을 선포한 시대였다. 동대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17m의 청동대불이 있는데, 이 대불은 752년 개안식을 했다. 도금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도금한 불상으로 일본에 불교가 전파된 지 2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개안식에 인도, 대만, 발해, 신라 등의 사절단이 왔다. 이 무렵, 동아시아는 문화의 꽃이 함께 피었던 시기였다. 당나라의 이태백, 두보가 있었고 신라 경덕왕은 석굴암을 만들었으며 발해가 해동성국을 선언했다.

 

“이 대불을 만든 것은 백제의 기술 집단이었다. 백제가 망하면서 일본은 대박이 난 거지(웃음). 백제 기술자들이 일본 열도로 많이 갔다.”

 

유 교수는 흥국사 청동불두도 꺼냈다. 가장 일본적으로 세공한 불두로서 8세기 일본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조각상이라고 설명했다. 이때 교토는 엄청난 습지여서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랬던 곳에 울산에 살던 한 무리가 아스카로 건너왔더니 백제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아무도 살지 않는 습지인 야마시로에 와서 독특한 기술로 댐을 만들었다. 그들은 댐을 만들어서 습지를 농지로 전환시켰다.

 

“호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은 일본 국보 제1호다. 광륭사와 목조반가사유상에 대한 가장 감동적인 찬사는 칼 야스퍼스가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 와서 말한 것인데, 극도로 완성된 인간실존의 최고의 이념이 표현됐다고 말했다.”

 

일본 관광객이 교토에 1년 4500만 명가량이 오는데 70%가 다녀가는 곳이 교토의 절이라고 한다. 이 절들을 세운 사람은 백제계 도래인이다. 이때 주의할 점은 이들은 그냥 일본인으로 ‘백제계’일 뿐이다. 우리는 백제계라고 말하면 우리나라 사람처럼 생각하지만 그것보다는 이민 개척사의 성공 사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유 교수의 주장이다.

 

“아무리 한반도의 영향이 컸다 하더라도 일본이 영향만 받고 자기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일본문화로 만든 것은 엄연한 그들의 문화임을 우리는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문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이 절대로 중국이 베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한 한국문화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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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본을 너무 모른다

 

유 교수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귀에 익은 금각사가 만들어진 무로마치 시대(1333~1573년)를 꺼내면서 일본의 전통적인 집 구조가 이때 형성됐다고 부연했다. 귀족의 권위와 무가의 권력과 선가의 정신을 묶은 북산문화가 만들어졌다. 이어진 시대가 다도의 완성을 본 모모야마 시대(1568~1615)였다. 다음으로 에도시대(1615~1867), 쓸쓸함에도 아름답고 숭고한 구조물인 가쓰라의 이궁이 언급됐다. 일본식 정원의 아름다움이 펼쳐진 시공간이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한일관계가 삐걱거린 적은 있었지만 오랜 역사에서 나빴던 것은 두 번밖에 없다. 임진왜란 7년, 일제강점기 35년이었다. 과거사에서 아직 해결 되지 못한 것이 지금도 연장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든 국가든 둘이 한세상을 살아가자면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형제간에도 다툼이 일어난다. 그러나 2300년 동안의 한일 관계에서 행복한 공존이 무너진 것은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과 근대의 100년간밖에 없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p. 13

 

유 교수는 500년 전 한일 양국이 임진왜란을 극복한 사례를 말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사신을 보내고 싶다며 전갈을 전했고, 선조는 사명대사를 일본에 보냈다. 사명대사는 전쟁 당시 끌려갔던 3천명을 고국으로 데리고 왔다.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싶다는 일본의 요청에 조선은 두 가지를 요구했다. 임진왜란 때 선릉, 정릉을 파괴한 범인을 색출하고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 송환이 그것이었다. 일본이 2명의 범인을 보내고 끌려간 이들을 데려왔는데, 실은 범인은 가짜였다. 사형수를 조선에 보냈고, 조선은 이를 알고 있음에도 성의를 보였다며 눈 감아줬다. 유 교수는 이런 사례 등을 통해 지금 한일 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팁을 제시했다.

 

“내년(2015)은 한일수교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제 그만한 시간이 경과했다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엉킨 문제를 현명히 해결하고 두 나라가 동아시아 문화 창조의 친밀한 동반자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 내가 일본 답사기 마지막 장을 조선통신사 이야기로 끝낸 것은 이런 마음에서였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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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유홍준 저 | 창비
전국에 답사 열풍을 일으킨 주역이자 360만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한국 인문서 최초의 밀리언셀러, 국토와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일본편 1권 ‘규슈―빛은 한반도로부터’, 2권 ‘아스카?나라―아스카 들판에 백제꽃이 피었습니다’, 3권 ‘교토의 역사―오늘의 교토는 이렇게 만들어졌다’에 이어 4권 ‘교토의 명소―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를 펴내며 일본 답사의 긴 여정을 완결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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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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