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커피 맛이 달라졌다

작업의 오랜 동반자와 잠시 멀어진 이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우려는 싱겁게 막을 내렸다. 그건 마치 집착하던 상대, 그 집착 때문에 일상이 무너질 것만 같던 상대에 대한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아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밀어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서유미.jpg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고기(육식주의자라는 건 부끄럽지만), 빵, 커피를 꼽곤 했다. 나는 밥보다 빵을, 채소보다 고기를, 술보다 커피를 압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커피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꼭 필요한 동반자였다. 집 근처의 카페에 나가 일을 할 때면 당연히 뜨거운 커피를 주문하는 게 일의 시작이었다. 작업 환경이 좋고 커피 맛이 좋은 곳을 찾아 유목민처럼 이동하다보면 때로는 꽤 먼 곳까지 떠돌았다. 그러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 한동안은 집의 책상에 앉아 일했다. 그때도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커피콩을 갈아 드립 커피를 만드는 것이었다. 어쩔 때는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그날의 첫 문장을 시작하지 못했고, 아주 가끔은 정신 없이 휘갈겨 쓰다가 한숨 돌리려고 컵을 들었을 때 커피가 차게 식어버린 걸 깨닫곤 했다.


글을 쓸 때뿐 아니라 머리가 살짝 아프거나 속이 부대낄 때 몸이 찌뿌드드할 때도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면 한결 가뿐해졌다. 그렇다고 커피나 커피 맛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내게 커피는 두통약, 소화제, 지친 심신을 위로하는 환각제였다. 임신 후 걱정 중의 하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는 커피를 줄이고(되도록 마시지 않고) 그 이후에도 하루에 한 잔 정도의 패턴을 유지해야 할 것 같았다. 입덧 때문에 고기를 못 먹게 된 건 괜찮은데 커피는 상상만으로도 아쉬웠다.


그러나 임신 중 나의 모토는 스트레스 받지 말고 몸이 원하는 대로 하자, 였으므로 일하러 나가면 평소와 다름없이 커피를 주문했다. 그런데 가장 맛있는 첫 모금이, 그 따끈하고 고소하고 얼큰하기까지 한 그 첫 모금이 그저 쓰고 텁텁했다. 천천히 반 잔을 마셔봤지만 심장 박동만 빨라질 뿐 좋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입덧 때문에 고기가 싫어졌을 때와 비슷했다. 우려는 싱겁게 막을 내렸다. 그건 마치 집착하던 상대, 그 집착 때문에 일상이 무너질 것만 같던 상대에 대한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왜 아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밀어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작업의 동반자였던 커피는 한동안 다양한 음료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물론 입덧이 끝난 뒤에는 다시 옆자리를 지키게 됐지만 말이다. 

 

 

 

 


[관련 기사]


- 여자의 배
- 짐승의 시간
- 아기를 위해 몸과 마음의 공간을 늘리며
- 남자 혹은 여자로 산다는 것 (1)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2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서유미(소설가)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같은 해 창비 장편소설상을 탔다.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를 썼고 소설집으로 『당분간 인간』이 있다. 에세이 『소울 푸드』에 참여했다."

오늘의 책

끝나지 않는 오월을 향한 간절한 노래

[2024 노벨문학상 수상]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 간의 광주, 그리고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의 철저한 노력으로 담아낸 역작. 열다섯 살 소년 동호의 죽음을 중심으로 그 당시 고통받았지만,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꺼내 보이면서 그 시대를 증언한다.

고통 속에서도 타오르는, 어떤 사랑에 대하여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23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이자 가장 최근작. 말해지지 않는 지난 시간들이 수십 년을 건너 한 외딴집에서 되살아난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지극한 사랑”이 불꽃처럼 뜨겁게 피어오른다. 작가의 바람처럼 이 작품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전세계가 주목한 한강의 대표작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장편소설이자 한강 소설가의 대표작.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고통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표현해낸 섬세한 문장과 파격적인 내용이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나무가 되고자 한 여성의 이야기.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

[2024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소설가의 아름답고 고요한 문체가 돋보이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작품.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소설이다. ‘흰’이라는 한 글자에서 시작한 소설은 모든 애도의 시간을 문장들로 표현해냈다. 한강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