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마왕] 당신이여 영원히
우리에게 많은 날들을 나눠준 천재, 함장, 마왕, 신해철의 순간들이다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사라져 가야한다면 사라지겠다는 노랫말과 어울리는 마지막이었지만 그래도 안녕을 고하기란 너무 어렵다. 먼 훗날 언젠가 친구로 태어나 다시 함께하길 바라며 영원히 남을 신해철의 음악을 조명해본다.
무한궤도
리더 및 리드싱어, 기타리스트로 몸 담았던 6인조(대학가요제까지는 5인조) 캠퍼스 밴드. 마왕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첫 관문이다. 과감하게 세 대의 키보드를 인트로에 배치한 「그대에게」로 무한궤도는 1988년 제 12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이후 1989년,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와 「여름이야기」 등이 수록된 첫 앨범 <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 를 내놓을 직전에는 멤버 보강을 통해 팀 구성을 확장하기도 했다. 다만 이들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 한다. 대학생으로서의 학업이 난관에 걸려있던 탓이다. 의견 조율에 실패한 밴드는 결국 해산을 맞는다. 대학가요제를 함께한 조형곤과 나중에 합류한 정석원은 곧 공일오비(015b)라는 이름으로 돌아온다. 오랫동안 회자될 대표곡 「그대에게」를 들고 신해철은 바로 솔로 활동 시작에 착수했다.
솔로 신해철
1990년, 첫 솔로 앨범 < 신해철 >을 발표한다. 부드러운 선율이 놓인 타이틀 곡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가 당시 히트를 기록했다. 쉽게 들리는 감미로운 팝, 발라드 스타일이 대부분의 트랙에 녹아있었으나 음악적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석원이 쓴 「함께가요」에서의 록적인 연출이나 「연극속에서」, 「안녕」의 댄서블한 전자음악, 랩과 같은 특이 요소들은 향후의 등장할 다양한 실험의 전초에 해당한다.
이듬해 내놓은 < Myself >에서 신해철은 자기 역량을 한 차례 토해낸다. 전곡을 작사, 작곡, 편곡했을 뿐 아니라 세션, 여기에 미디를 이용한 사운드 메이킹까지, 전반의 작업을 홀로 해내며 창작가로서의 남다른 입지를 다졌다. 지금도 시그너처 송으로 널리 알려진 「재즈 카페」와 다시 다듬은 「그대에게」, 발라드 넘버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등을 위시로, 전작의 「안녕」을 잇는 「나에게 쓰는 편지」, 극적인 구성이 보이는 「길 위에서」 등이 음반을 빛냈다. 독자적인 위치에 오르는, 앨범의 이름 'myself'와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N.EX.T
기타리스트 정기송, 드러머 이동규와 함께 내놓은 1992년의 앨범 < Home >을 통해 넥스트의 존재를 처음 공개한다. 작품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 Myself >를 잇는 댄스 리듬의 「도시인」이 인기 싱글로 최전선에 나섰으나 작품의 의미는 본격적으로 프로그레시브의 요소를 가미한 「인형의 기사」, 「영원히」와 같은 곡들에서 더욱 크게 부각됐다. 콘셉트 앨범으로서의 접근 또한 신해철의 창작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사회와 가정 속에서의 한 자아를 논하는 가사나 '증조할머니의 무덤가'를 가운데에 두고 사운드 성격을 반전시키는 연출은 상당한 수준의 기획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결과물이었다.
물오른 감각은 다시없을 역작, 깊은 내면으로 시선을 돌린 1994년의 두 번째 작품 < The Return Of N.EX.T Part 1 : The Being >으로 이어진다. 더욱 끌어올린 프로그레시브의 컬러와 새로이 이식한 헤비메탈 사운드가 음반을 장엄하고 웅장하게 만들었다. 앨범의 축소판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 껍질의 파괴」가 무자비하게 귀를 파고들었으며 속도감 있는 메탈 넘버 「이중 인격자」와 드라마틱한 「The dreamer」, 「The ocean : 불멸에 관하여」가 작품 곳곳에서 경이로운 장면들을 자아냈다. 송라이팅과 사운드, 텍스트, 연주 그 어느 한 지점에서도 모자란 부분이 없었다. 명곡들 가운데서 「날아라 병아리」가 히트를 기록했다.
자아에 던졌던 비판의 방향을 이번에는 세상으로 돌릴 차례. 이 순서에 따라 1996년, 넥스트는 < The Return Of N.EX.T Part 2 : World >를 세상에 공개한다. 크게 넓힌 스펙트럼이 주요 포인트. 전작에서 다진 프로그레시브, 헤비메탈 사운드로 구성한 바탕에 국악과 펑크(funk), 약간의 신스 팝과 같은 다양한 스타일을 더해 작품을 완성했다. 신해철의 감각은 안정궤도에 오른 밴드의 상태를 등에 업고 더 높이 솟았다. 2집에서의 성공이 입지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향후 넥스트의 황금기라 불릴 김세황, 김영석, 이수용의 라인업이 이합이 잦았던 멤버진에 안정감까지 갖고 왔다. 탄탄한 당시의 배경은 신해철의 이력에 「세계의 문」,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Kormerican blues」와 같은 훌륭한 기록을 남겼다.
최고의 조건을 단 신해철에게 제동장치는 필요 없었다. 1997년의 네 번째 정규 음반 < Lazenca (A Space Rock Opera)> 그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앨범의 부제에 맞는 우주적인 색감의 사운드와 통일성 있는 작품의 전개, 더욱 짙어진 아트 록의 면모가 한 음반에서 조화를 이뤘다. 「Mars, the bringer of war」, 「Lazenca, save us」에서의 웅장한 부피와 「The power」에서의 날카로운 마감이 완력을 과시하는가 하면 「먼 훗날 언젠가」와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매력적인 선율을 통해서는 안정감을 제공했다. 넥스트 식 록의 완성형이라고도 할 「The hero」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트랙. 음악에 있어서는 신해철과 밴드 모두 최상의 몸상태를 지니던 시기였다. 이보다 앞선 같은 해 2월에는 「Here I stand for you」, 「아리랑」을 담은 싱글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다.
그리고는 그해의 말일인 12월 31일,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말과 함께 넥스트는 해산한다. 수많은 억측들이 따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OST 작업, 노땐스
그 사이에 이루어진 번외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해야할 작품으로는 단연 1996년의 < 정글스토리 OST >를 꼽아야한다. 넥스트를 통해 절정에 다다른 신해철의 창작력은 작품을 걸작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김세황의 기타를 앞세운 록 넘버 「절망에 관하여」와 「백수가」가 강력한 펀치를 날렸고 김동률의 터치가 들어선 두 개의 테마를 통해 감성을 자아냈다. 장면이 빠르게 전환하는 연주곡 「Jungle strut」과 산울림의 원곡을 비틀어 낸 「내 마음은 황무지」에서의 실험적인 작법은 말할 것도 없다. <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OST >로 시작한 신해철의 영화음악 작업은 < 정글스토리 OST >를 거쳐 < 세기말 OST > 등으로 이어진다.
같은 해 10월에는 자신과 함께 1990년대 가요계의 신세계를 열어젖힌 윤상과 그룹 노땐스를 결성, 앨범 < 골든힛트 >를 내놓기도 했다. 그간 보여줬던 각자의 성향에서 알 수 있듯 둘은 일렉트로니카로 서로의 시선을 마주했다. 높은 멜로디 감각보다는 여러 시도가 혼재한 전자음이 부각돼 음바은 큰 인기를 끌지 못했으나 두 재기가 낳은 음악적 실험이라는 큰 의미를 확보했다. 캐치한 「달리기」와 각양의 방식으로 사운드를 운용한 「질주」, 「자장가」 등이 음반에 자리한다.
크롬, 모노크롬
1998년에 발매한 앨범 < Crom's Techno World >는 넥스트 해체 후 찾은 영국 유학길에서 만든 작품이다. 음반에는 전자음악, 특히 테크노에 대한 신해철의 큰 관심이 담겨있다. 또 다른 음악적 변이를 보여주는 이 과정 속에서 솔로 시절의 「재즈 카페」와 「나에게 쓰는 편지」, 「안녕」 등이 테크노 사운드를 품으며 재탄생됐고 「일상으로의 초대」가 대표곡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러한 음악적 실험은 이듬해, 프로듀서 크리스 상그리디와 함께 결성한 모노크롬의 음반 < Monocrom >에서 한 차례 완성된다. 하드코어한 테크노를 표방해 거친 사운드를 이끌어냈으며 「Go with the light」와 같은 트랙에서는 예의 넥스트에서처럼 국악의 요소를 적용시키기도 했다. 크래쉬의 버전으로도 유명한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도 이 음반에 실려 있다.
같은 해 연말, 1999년의 공연 실황과 그간의 미발표곡을 정리한 앨범 < Homemade Cookies & 99 Crom Live >를 발매했다. 음반의 마지막 트랙에는 훗날 대표 싱글이 되는 「민물장어의 꿈」이 있다.
비트겐슈타인
2000년 겨울, 신해철은 기타리스트 데빈, 드러머 빙크와 함께 밴드 비트겐슈타인으로 돌아온다. 보다 간편해진 록 사운드가 작품의 주요한 특징. 「수컷의 몰락 part 2」에서는 펄 잼 풍의 그런지 록을 보였으며 「The pressure」에서는 랩 메탈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그간의 솔로 활동을 통해 보여준 일렉트로니카도 트랙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스타일에서의 또 다른 변화와 높은 퀄리티, 남자의 일생이라는 콘셉트를 녹인 촘촘한 구상이 수작을 완성시켰으나 1990년대만큼의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채 비트겐슈타인에서의 활동도 정지 상태를 맞는다.
다시, 넥스트
신해철은 다시 한 번 넥스트를 결성한다. 예전의 넥스트와는 멤버 구성면에서부터 완연한 차이를 보였다. 1990년대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김세황, 김영석, 이수용의 이름이 사라지고 비트겐슈타인에서 함께 했던 데빈을 포함한 새로운 멤버들이 자리를 채웠다. 음악 스타일도 전과 달랐다. 강성의 록 사운드를 추구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스래시 메탈, 뉴 메탈 등의 새로운 문법을 도입했으며 신해철의 보컬 톤도 더욱 거칠어졌다. 비판을 넘어 비난을 가하는 텍스트 역시 또 다른 변화의 역점으로 둘만했다. 「개한민국」, 「Dear American」, 「Satan's bride」 등이 실린 2004년의 다섯 번째 정규음반 < 개한민국 >은 여러모로 많은 기억을 남긴 결과물이었다. 이전과는 상이한 지점에 자리한 넥스트를 두고 갑론을박의 장이 수차례 일었다. 대중적 성과가 옛날 같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밴드로서(특히 넥스트로서) 무언가를 보여줬다는 점에 있어 신해철 스스로는 만족했다.
다시 한 번 밴드에 메스를 들었다. 5집 이후 넥스트에 다시 생긴 공석을 예의 3인방 김세황, 김영석, 이수용과 키보디스트 지현수를 새로 들였다. 다시 만진 예전의 대표곡들과 신곡 「The last love song」 실은 중간 단계의 앨범(5.5집) < Regame? >을 2006년에 발표했다.
약간의 멤버 교체를 거쳐 2008년 6집 < 666 Trilogy Part 1 >을 내놨다. '삼부작'이라는 음반의 타이틀로부터 알 수 있듯 원래는 후속작이 따를 작품이었다. 다만 제작이 얼추 완성됐음에도 밴드의 기획 방향이 이후 여러 차례 바뀌는 탓에 남은 두 작품은 미발표 상태로 남게 된다. 1990년대의 넥스트과 대응하는 프로그레시브, 메탈 사운드가 작품에 깔려있다. 「The empire of hated (증오의 제국)」에서는 탁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으며 「개판 5분전 만취 공중 해적단」에서는 스피디한 헤비메탈을 선보이기도 했다.
또 다른 솔로
그 사이인 2007년, 솔로 음반으로 내놓은 < The Songs For The One >은 다시 한 번 팬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작품이었다. 빅 밴드를 대동해 중후한 톤의 보컬 연기를 구사하는 이 재즈로의 외도를 사람들은 달갑게만 여기지는 않았다. 흥미롭다는 옹호와 좀처럼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비판이 반응 속에 섞였다. 물론, 아내 '단 한 사람'에게 바치는 음반이었기에 논외의 대상으로도 빠질 수 있었겠으나, 세상으로 작품이 등장한 이상 사람들의 시선 밖에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숙생」, 「장미」, 「My way」 등의 국내외 골든 넘버와 본인의 곡 「재즈 카페」가 앨범에서 풍성한 재즈 사운드를 입었다.
이후,
2014년, 여섯 번째 정규 음반을 앞둔 미니 앨범 < Reboot Myself Part. 1 >을 발표하며 솔로 커리어에 한 획을 더했다. 펑크(funk), 디스코 사운드를 주축으로 내세운 음반 속에서 수차례 목소리를 쌓아올린 원 맨 아카펠라 「A.D.D.a」가 많은 주목을 받았고 「Catch me if you can (바퀴벌레)」, 「Princess maker」가 향후의 행보에 기대감을 모았다.
같은 해, 원년멤버 정기송을 포함한 새로운 라인업을 내세우며 넥스트를 다시 출격시켰다. 새 앨범 < N.EX.T United >을 발매하기에 앞서 싱글 「I want it all (demo 0.7)」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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