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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어울리는 잔잔한 클래식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b단조 Op.104
독주 첼로와 목관악기들이 보헤미아적 애수를 짙게 풍기는 선율, 아련한 향수가 느껴지는 서정적 선율들을 곳곳에서 들려줍니다. 말하자면 이 곡은 남성적 격정과 보헤미아의 애틋한 서정을 동시에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18세기를 관통하는 낭만시대는 음악의 보고입니다. 요즘 우리가 듣는 클래식 음악의 상당 부분이, 적어도 70% 이상이 이 시절에 세상에 태어난 음악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꼭 들어봐야 할 멋진 곡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가득한 시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그 빛나는 음악들을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드보르작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앞서서 그의 교향곡 9번을 들었지만 8번도 빼놓을 수 없는 걸작입니다. 특히 8번 G장조는 이른바 ‘클래식 비수기’로 불리는 여름철에 많이 연주되는 곡이지요. 음악이 시원하기 때문일 겁니다. 솔직히 푹푹 찌는 여름철은 클래식 음악을 듣기에 적기라고 볼 수는 없겠지요. 아무래도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부터가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에 더 좋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위 속에서 들을 만한 곡이 없는 건 아닙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찾아보면 시원한 청량감을 주는 음악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사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비발디의 협주곡집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 Op.8> 중에서 ‘여름’이 대표적이지요. 또 헨델의 <수상음악 HWV. 348~350>도 강물 위에서 연주했던 곡답게 시원한 선율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드보르작, 특히 그의 교향곡 8번은 트럼펫이 행진곡을 연주하듯이 시원스럽게 뻗어 가는 4악장에서 가슴이 뻥 뚫리는 청량감을 맛볼 수 있는 음악이지요.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8번 교향곡을 조금만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드보르작이 이 교향곡의 작곡에 손을 댄 것도 한여름이었지요. 그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마흔 살이 넘어서야 경제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1885년에 체코의 서쪽 지역 보헤미아 남부의 시골마을 비소카(Vysok)에 별장을 한 채 마련합니다. 허름한 목장을 하나 인수해서 자신과 가족이 머물 수 있는 집으로 개축했다고 하지요. 그랜드 피아노를 갖춘 음악실도 마련하고 정원에 비둘기를 키웠다고 합니다. 어쨌든 드보르작은 그해부터 여름마다 이 별장에 머물면서 많은 걸작을 썼는데 교향곡 8번도 그중 하나입니다. 보헤미아의 시골 마을 비소카에서 마흔여덟 살에 작곡한, 흙냄새 나는 교향곡이라고 할 수 있지요.
드보르작 [출처: 위키피디아]
1악장은 첼로, 클라리넷, 호른의 선율로 시작합니다. 보헤미아적 우수가 짙게 깔린 주제 선율이지요. 하지만 이 우아한 알레그로 템포의 선율은 잠시 후에 저음의 현악기들이 뽑아내는 서늘한 리듬으로 표정을 바꿉니다. 이어지는 2악장에는 숲 속에 들어선 것처럼 청량감이 가득하지요. 드보르작의 여름별장이 있던 비소카, 그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떠오르게 만드는 현악기 선율 속에서 플루트와 오보에가 새처럼 노래합니다.
특히 인상적인 선율은 3악장에 등장하지요. 3악장 첫머리에서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주제 선율은 듣는 순간에 누구라도 마음을 뺏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어서 여름날의 선곡으로 더 없이 적절한 4악장은 행진곡풍으로 터져 나오는 시원한 트럼펫 소리로 문을 엽니다. 팀파니가 둥둥거리는 리듬을 짧게 연주한 후, 첼로가 등장하고 이어서 다른 현악기들이 합세하지요. 변주에 변주가 꼬리를 무는 악장입니다. 여러 차례 변주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폭포수처럼 시원하게 마침표를 찍습니다.
지난달 18일자 칼럼에서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에 대해 이미 이야기했지요. 그러다보니 8번을 거론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오늘 지면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 이렇듯이 들을 음악은 많은데 다 소개할 수 없어 마음 한 구석이 좀 찜찜합니다. 드보르작뿐 아니라 다른 음악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보니 여러분과 함께 들을 곡을 선곡하면서 늘 갈팡질팡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오늘도 그랬습니다. 드보르작이 교향곡 9번에 이어서 곧바로 작곡한 <현악4중주 12번 F장조>, 이른바 ‘아메리카’라는 부제로 불리는 곡을 들을까 생각했습니다. 1893년 작곡한 이 곡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른바 드보르작의 ‘아메리카 시대’(1892~1895)를 대표하는 곡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첼로 협주곡 b단조 Op.104>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아무래도 현악4중주 ‘아메리카’보다는 첼로 협주곡이 대중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그렇습니다. 게다가 이 곡은 ‘첼로 협주곡’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사실 첼로 협주곡은 레퍼토리가 그닥 많지 않지요. 하이든과 슈만, 생상스 등이 첼로 협주곡을 썼고 좀더 세월이 흐르면 중요한 첼로 협주곡이 몇 곡 더 탄생합니다. 영국의 엘가와 러시아의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첼로 협주곡이 있습니다. 20세기로 접어들어서의 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첼로 협주곡은 그다지 레퍼토리가 풍요롭지 않아서 솔리스트로 활동하는 첼리스트들을 애먹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첼로 협주곡이 아마도 드보르작의 곡인 듯합니다. 게다가 이 곡은 드보르작의 아메리카 시대를 마감하는 곡이라고 할 수 있지요. 교향곡 9번과 현악4중주 12번 ‘아메리카’에 이어 드보르작은 연가곡집 <성서의 노래>를 1894년에 작곡합니다. 같은 해 11월에 첼로 협주곡을 쓰기 시작해 다음해 2월에 일단 완성하지요. 친구였던 첼리스트 하누슈 비한(Hanus Wihan)을 염두에 두고 작곡해 그에게 헌정합니다. 이 친구는 드보르작의 고향 친구입니다. 미국으로 떠나오기 전에 보헤미아 지방을 같이 순회 연주하기도 했던 친구였지요. 그러니 이 곡은 당연하게도 보헤미아의 향토색이 짙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향곡 9번에서도 그렇듯이 이 협주곡에서도 미국 음악과의 융합성을 찾아내려고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보헤미아적 색채와 고향에 대한 향수가 담긴 곡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적절할 겁니다. 예컨대 드보르작이 자신의 음악에서 자주 사용하는 싱커페이션(당김음)을 흑인 음악에만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보헤미아를 비롯해 세계 곳곳의 민속음악에서 발견되는 요소입니다. 사실 드보르작은 미국으로 떠나기 한참 전에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a단조> 등에서 이미 싱커페이션 리듬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드보르작은 첼로 협주곡을 몇 차례 수정해 출판하는데, 그렇게 악보를 고치는 과정에서 친구인 하누슈 비한이 과도하게 수정을 요구해 사이가 나빠졌다는 ‘설’도 있고, 초연을 영국의 첼리스트 레오 스턴이 하는 바람에 사이가 벌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곡은 1896년 영국 런던에서 드보르작이 직접 필하모니아 교향악단을 지휘해 초연되지요.
궁핍했던 청년기, 하지만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풍요롭고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았던 드보르작은 54세에 작곡한 이 첼로 협주곡에서 매우 당당한 걸음걸이를 보여줍니다. ‘아메리카 시대’를 대표하는 곡인 교향곡 9번에서 이미 보여줬던 관현악적 호방함이 그의 유일한 첼로 협주곡(젊은 시절에 시도했던 첼로 협주곡은 미완)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지요. 특히 이 협주곡의 관현악 파트는 토속적이면서도 남성적인 열정을 물씬 풍깁니다. 그와 동시에 독주 첼로와 목관악기들이 보헤미아적 애수를 짙게 풍기는 선율, 아련한 향수가 느껴지는 서정적 선율들을 곳곳에서 들려줍니다. 말하자면 이 곡은 남성적 격정과 보헤미아의 애틋한 서정을 동시에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1악장은 서주 없이 클라리넷이 곧바로 첫번째 주제를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어둡고 묵직한 분위기의 선율이지요. 이어서 현과 목관이 합류하면서 강력한 음향의 전체 합주로 고조됩니다. 호른이 연주하는 두번째 주제는 아련한 목가풍 선율이어서 듣는 순간에 곧바로 가슴을 파고들지요.
이어지는 2악장은 애틋한 향수의 느낌으로 가득합니다. 오보에와 파곳의 화음으로 문을 열고, 뒤를 이어 첼로가 아름다운 표정의 노래를 부르지요. 가요풍이 두드러지는 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g단조로 조옮김을 하면서 격렬한 전체 합주가 등장했다가 다시 첼로가 부르는 두번째 노래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마지막 3악장은 보헤미아적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악장이지요. 행진곡풍의 리드미컬한 연주로 막을 올립니다. 밝고 화사한 행진곡이라기보다는 묵직한 저음의 발걸음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이어서 화려한 기교의 첼로 독주가 앞에 등장했던 두 개 악장의 주제를 연상시키는 선율을 연주합니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첼로가 무엇인가를 회상하는 듯한 연주를 고즈넉하게 펼치다가 음악이 한차례 고조되면서 힘차게 마침표를 찍지요.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 카라얀?베를린 필하모닉/1968년/DG
2007년 타계한 로스트로포비치는 생전에 여러 차례 이 곡을 녹음했다. 남성적 힘과 세밀한 기교를 모두 보여줘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로스트로포비치만큼 이 곡에 어울리는 첼리스트도 별로 없을 성싶다. 20대의 젊은 로스트로포비치는 바츨라프 탈리히가 지휘하는 체코 필하모닉과도 이 곡을 협연해 음반으로 남겼는데, 보헤미아적 토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음반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CD로 구하기 어려운 음반이 됐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한 이 음반은 국내 매장에서 가장 많이 선택받고 있는 베스트셀러다. 호방한 힘과 유장하게 흘러가는 첼로의 노래, 아울러 관현악의 밀도도 탄탄하다.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을 함께 수록했다.
▶피에르 푸르니에(Pierre Fournier), 조지 셸?베를린 필하모닉/1962년/DG
프랑스 파리 태생의 피에르 푸르니에(1906~1986)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와는 또 다른 맛을 전해준다. 보다 정갈하고 우아한 연주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연주에 대해서는 보헤미아의 흙냄새가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자의식을 걷어낸 담담하고 유려한 연주에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다. 부드러운 비브라토와 따뜻한 음색 덕택에 오래 들어도 물리지 않는다. LP시절부터 애호가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음반이다. 푸르니에도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을 여러 종의 녹음으로 남겨 놓고 있는데, 조지 셸과의 스튜디오 레코딩이 독주자와 관현악의 절묘한 호흡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호평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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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