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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이방인> 불친절하지만 자꾸 보게 되는 드라마
<닥터 이방인> 박훈, 풀꽃 같은 아름다움으로 그저 이방인이었던 박훈이 진정한 의사이자 인간이 되어가는 이야기
공교롭게도 <닥터 이방인>에 와서 이 시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드라마의 중심에 서 있는 박훈(이종석 분)에게 낭독해 주고 싶은 시구기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눈으로 날 기억해 달라 한승희(진세연 분)에게 읍소하는 그를 보노라면 새삼 박훈에게 말해주고 싶다. 잊지 마라,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풀꽃처럼, ‘너도 그렇다’고.
<학교2013>의 고남순―그러고 보니 당시 수없이 많은 시청자들에게 훌쩍 눈물을 훔치게 만들었던 이 캐릭터도 이종석이 연기했다―은 조곤조곤 읊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하고. 강제전학을 갈 위기의 친구를 위해 툭 던졌던 이 시 <풀꽃>, 어지간히 마음을 울렸던 게 아니다. 네가 누구라서, 혹은 네가 유용하고 쓸모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너라서 아름답다 말해주는 시인 까닭이다.
공교롭게도 <닥터 이방인>에 와서 이 시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드라마의 중심에 서 있는 박훈(이종석 분)에게 낭독해 주고 싶은 시구기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눈으로 날 기억해 달라 한승희(진세연 분)에게 읍소하는 그를 보노라면 새삼 박훈에게 말해주고 싶다. 잊지 마라,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풀꽃처럼, ‘너도 그렇다’고.
출처_ SBS
사실 <닥터 이방인>이 썩 잘 된 드라마냐고 물으면 아쉽지만 선뜻 그렇다고 대답해줄 순 없다. 복합장르 드라마라는 것을 감안해도 소재를 모두 담기 버거워 보이고, 박훈을 둘러싸고 남북 밀약과 정치적 권모술수, 개인적 탐욕과 복수에서 사랑까지 너무 많은 이야기가 정신없이 뒤엉켜 있다. 그렇다고 하나하나 친절하게 시청자들에게 설명해주는 드라마도 아니니, 보다가 아니 이것은 무엇에 쓰는 복선인고, 궁금해질 밖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 많은 시청자들의 눈을 꽉 붙들어놓고 있다. 이유가 뭐냐고? 짐작컨대 이는 상당부분 주인공 박훈에 기인하고 있을 터다.
이제 막 20대 후반, 결코 많다 할 수 없는 나이지만 그가 겪은 비극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정치적 술수에 휘말려 북한에 끌려간 것만도 무서운 일인데 김일성의 수술 성공을 위해 어린 나이 총구 앞에 세워지기도 하고, 북한에서라도 잘 사나 싶었더니 처음으로 마음을 붙인 여자 친구가 수용소로 잡혀간다. 여자 친구의 행방은 알 수 없는데 정권은 그를 만수무강 연구소로 끌고 가고, 사람 살리는 일은커녕 생체실험과 수술을 일삼게 된다. 와중에 여자 친구는 처참한 모습으로 마루타가 되어 끌려오고 아버지는 고뇌하는 아들을 보다 못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그를 탈북시킨다. 겨우 살려낸 여자 친구와 함께 탈북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지만 헝가리에서 목숨을 건 도주 끝, 결국 여자 친구를 잃고 마는 데에 이르면 그 참혹함에 온몸을 떨게 된다.
가장 끔찍한 부분은 이 모두를 통틀어 근본적으로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부분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즉 박훈은 거대한 운명 속에서 그저 살고자 발버둥 쳤을 뿐이지만 그에 지나치게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셈이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의 근간에는 놀랍도록 강한 생명력이 넘실댄다는 점이다. 드라마가 용케 너무 어둡거나 무겁지 않은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는 박훈의 힘이 크다. 삶의 고난 속에서도 미소 짓는 법을 잊지 말라고들 하지만, 웃음을 참는 것보다 울음을 숨기는 것이 더 힘든 당연한 이치로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화를 내고 절망하기보다 한번 씨익 웃고 돌아서는 편을 택하는데, 이 캐릭터가 강인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음을 느낄 수 있어 흥미롭다. 그야말로 스스로에 대한 강한 자신감의 표현이며, 이런 고비가 자신을 흔들어 놓을 수 없다는 확신이 아니겠는가.
무릎 꿇고 명우대학병원에 남게 해달라 애원하던 장면도 그렇다. 오준규에게 일견 치욕스럽기까지 한 소리를 듣고도 오히려 미소 짓던 훈은 수현을 마주보고도 부끄러워하거나 난처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당혹해하던 수현에게 “이사장님이 아버지라며? 나 여기 계속 붙어있어야 되는데, 어떻게 안 되겠어?”하고 농담처럼 말을 건넬 뿐. 타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자존심이라 생각하는 헛된 믿음 사이에서, 제 인생의 목표를 위해서 전력투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이런 것이 자신을 흔들어놓지 않는다는 강한 신념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손끝으로 쿡 찌르면 비극적인 드라마가 줄줄 흘러나올 것 같은 캐릭터이기에, 그가 뿜어내는 밝고 건강한 에너지는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다. 앞으로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박훈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굳은 신뢰를 주는 까닭이다. 문형욱(최정우 분)에게 뻔뻔하게 느물거리고 팔랑팔랑 병원을 쏘다니는 모습에 당황스러우면서도 저절로 웃음이 나는 것은 그 때문일 테다.
출처_ SBS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지고지순한 캐릭터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재고 따지고, 외부와 타인의 유혹에 흔들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박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동인(動因)을 오롯이 송재희에 두고 있다. “그래 나 돈에 환장했다. 돈 필요해! 이거면 간 쓸개가 아니라 이 몸뚱아리 다 줄 수도 있어! 왜, 안 돼? 그게 뭐 어때서!” ―<가을동화>의 송혜교 이후로 가장 인상적이라는―이 속물적 외침도 결국 재희를 구하고자 하는 발버둥에서 나온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는 숭고한 노력이 속물적 집착이 되어 버린 아이러니는 또 얼마나 마음을 울리는가. 그녀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놓을 수 있는 박훈을 이해하기에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물론 시종일관 재희만을 찾아 헤매는 훈에게 답답함을 느끼는 시청자들도 이해한다. 수현과 훈의 사랑을 응원하는 시청자들의 의견도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훈의 태도를 무조건 흰 눈으로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애초에 그가 제 일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 드라마는 흘러올 수 있었다. 의사 면허까지 잃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500원에 담긴 마음을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아이 아버지의 수술실에 무작정 뛰어들고, 자칫 명우대학병원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상하고서도 수현 모의 수술을 집도한다. 본래부터 타인의 곤경과 고난을 외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잖은가. 하물며 그 대상이 평생의 운명으로 생각해온 재희다. 훈이 깔끔하게 물러선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수현이 훈에게 매혹된 것도 훈이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버려두고 온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곱디고운 인간이었기 때문에. 훈이 재준마냥 냉정하고 합리적인 성격이었다면 그는 극 내내 재희를 찾아 헤매지는 않았겠지만, 수현도 결코 훈에게 매료되지는 못했으리라. 재미있지 않은가, 그가 가진 인간적 면모가 이야기를 이끌고 있는 것처럼. 게다가 의사의 직업적 소명에 갈망을 느끼는 모습은 앞으로 진정한 의사로 발전해나갈 박훈을 기대하게 한다. 유일하게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인 의사로서 그는 북한의 비인간적 의료 처우에 분노하고 슬퍼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의사 할 일’이 어떤 것인가, 과연 의사인 박훈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뇌하고 번민했을 테다. 비록 북에선 그 이상을 찾지 못했고, 남에서도 날라리 돌팔이 가리봉 의원으로 살아야 했지만 활인(活人)에 대한 갈망을 잊지 않았으리라는 짐작은 그래서다. 말하자면 인간 개인을 잊고 하나하나를 마루타로 취급해야 했던 북에서의 세월이 오히려 박훈을 더욱 인간적인 의사로 만들어준 셈이다.
재준과의 차이점은 이런 데서 두드러진다. 이 둘의 차이는 능력이 아니라 가치관에서 뚜렷이 드러나는데, 훈이 ‘사람을 고치는 의사’라면 재준은 ‘질병을 고치는 의사’이다. “왜 수술했냐고? 의사 좀 돼 보려고 그랬어. 아픈 사람 낫게 해 주는 게 의사잖아, 거기 같은 의사! 근데 왜 거긴 안 했어, 성공 확률이 낮아서? 그럼 그거 높은 환자만 하는 게 의사야? 환자 살고 싶어 하고 살려달라는 사람 있는데, 성공률 낮을 것 같으니까 포기하고 환자를 죽게 만드는 게 의사냐고. 말해 봐.” 사망자 컨퍼런스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훈은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고 당시 어머니를 포기할 수 없었던 수현의 결단을 변호한다. 의사이자 인간으로서 할 일을 모두 해내는 것이다.
결국 <닥터 이방인>은 그저 이방인이었던 박훈이 진정한 의사이자 인간이 되어가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나는 천재 의사가 아닌 인간 박훈이 훨씬 더 가치 있으리라 생각한다. SF를 연상시키는 수술 시뮬레이션, 다들 안 될거라 말리던 수술을 기어코 성공시키던 능력보다 더 주목할 것은 그가 인간이라는 점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 슬퍼해줄 수 있는 인간. 모란처럼 화려한 권력 없이도, 백합같이 찬란한 신기(神技)가 없이도 그저 존재 자체로 풀꽃처럼 사랑스러운.
그래서 나는 훈에게 말해주고 싶다. 발버둥 쳐 보라고. 그게 재희건, 의사로서의 소명이건,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이건 다 좋으니 기나긴 북한 생활 동안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얻기 위해 눈물 흘리고 아우성 치고 읍소도 해 보라고. 그 자체로 아름다울 터다. 눈부시고 찬연한 자태로 온실 속 곱게 피어난 꽃보다 거친 돌밭을 뚫고 힘들게 올라선 풀꽃 민들레가 아름답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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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길어 주절거리는 것이 병이 된 사람. 즐거운 책과 신나는 음악, 따뜻한 드라마와 깊은 영화, 그리고 차 한 잔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