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계별 장르소설 읽기 프로젝트 – 입문(1)
입문 단계에는 좋은 작가를 따라 책읽기의 가닥을 잡아가는 게 좋다.
전체 과정은 ‘입문→심화→마니아’로 구분했다. 초-중-고급 같은 표현을 피하다 보니 낯선 단계 구분이 되었지만 표현은 중요하지 않다. 이 세 단계에 따라, 가능한 한 개인 취향을 배제하며 목록을 정리했다.
운영하고 있는 일본 미스터리 커뮤니티에는 주위 분들에게 미스터리를 권하고 싶은데 어떤 작품부터 권해야 좋겠는지 회원들의 의견을 구하는 글이 종종 올라온다. 회사 동료에게 어떤 책을 추천하면 서로 미스터리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관계가 될지 묻는 질문에 무척 많은 댓글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다. 일본 미스터리를 처음 경험하는 분에게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을 권하는 경우도 보았는데, 이는 장난기 섞인 추천일 것이다. 자칫 잘못 추천했다가는 오해를 산다.
그즈음부터 초보 단계에서 시작해 점차 수준을 높여갈 수 있는 가이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비공개로 운영하는 개인 사이트에 목록을 정리하며 작품마다 간략한 설명을 정리하기 시작한 지 여러 달 되었다. 그러다 판타스틱 장르 백서의 ‘단계별 장르소설 읽기 프로젝트’ 일본 미스터리 부문을 맡아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착수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개인 사이트가 아니기 때문에 매회 원고 분량에 한계가 있고, 연재 횟수 또한 정해져 있어 그동안 기록한 내용을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었다. 또 그간 정리해온 내용은 분류나 구분이 조금 복잡한 편이라 이 프로젝트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목록만 참고하고 보충하는 수준에서 새로 정리하기로 했다.
전체 과정은 ‘입문→심화→마니아’로 구분했다. 초-중-고급 같은 표현을 피하다 보니 낯선 단계 구분이 되었지만 표현은 중요하지 않다. 이 세 단계에 따라, 가능한 한 개인 취향을 배제하며 목록을 정리했다. 우리 독자들과 일본 독자들의 서평을 참고하며 목록을 정리했는데, 요 몇 년 사이 워낙 많은 일본 미스터리가 출간되어 그 전부를 검토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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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젝트의 단계별 구분에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입문’은 일본 미스터리라는 새로운 세계에 막 발을 내디딘 분들이 아무 준비 없이 읽어도 편하게 독서를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을 골랐다. ‘심화’은 메모장이나 필기도구를 준비하면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들, 그리고 ‘마니아’는 작가나 작품의 배경을 조사하고, 주제와 소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공부한 뒤라야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을 골랐다.
미스터리를 즐겨 읽는 사람들끼리 대화를 나눌 때 당연히 지키는 규칙을 이곳에도 적용했다. 작품의 결말이나 자세한 줄거리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결말을 알고 읽는 미스터리는 이미 미스터리가 아니다. 독자끼리는 상대가 그 작품을 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는 작품의 줄거리조차 입에 올리기 꺼린다. 이 프로젝트는 이미 읽은 분보다는 앞으로 읽을 분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이 규칙은 필수다.
단계별 장르소설 읽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글에 이미 설명되어 있듯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 같은 작품을 만나 이 장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분들이 대상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로 시작했다면 내친김에 ‘가가 형사 시리즈’를 몇 편 더 읽자. 아직 『용의자 X의 헌신』을 읽지 않았더라도 걱정 말자. 사실 많은 분들이 이 작품으로 일본 미스터리에 발을 적시기 시작했지만 이 프로젝트에서는 ‘심화’ 단계에 둘 소설이기 때문이다. 우선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는 『악의』와 『신참자』를 먼저 읽는 편이 좋다. 원한다면 가가 형사의 대학 시절부터 엿볼 수 있으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붉은 손가락』도 결말 부분에서 밀려오는 묵직한 감동 때문에 목록에서 제외하기는 아깝다. 또 이런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의 감동이 마음에 든다면 『비밀』, 『편지』, 『도키오』 같은 작품들로 다른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은 시대소설을 제외하면 대부분 입문 단계에 어울린다. 그만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이제는 더 설명이 필요 없는 『화차』를 비롯해 『누군가』, 『이름 없는 독』, 『용은 잠들다』 같은 작품은 읽기 쉬우면서도 재미있다. 최근에 발표된 작품을 비롯한 두툼한 장편들도 어렵지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분량 때문에 조금 뒤로 미루는 편이 좋겠다. 대신 『스텝파더 스텝』처럼 여러모로 경쾌한 미야베 미유키를 즐긴다.
요코야마 히데오
『64』로 돌아온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들도 대개 입문 단계에서 미스터리의 재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클라이머즈 하이』는 이번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수많은 사망자를 낸 비행기 사고를 둘러싸고 경쟁하는 취재기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길지 않은 장편이다. 읽는 속도가 빠른 분은 세 시간 안에 읽어내기도 한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진면목은 연작단편집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종신 검시관』, 『동기』, 『제3의 시효』 등은 경찰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빼어난 경찰소설이다. 『루팡의 소식』 같은 초기작은 뛰어난 엔터테인먼트 소설가의 탄생 순간을 엿볼 수 있는 수작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은 입문 단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장편이 부담스러운 분들은 미야베 미유키가 편집한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전3권)으로 먼저 호흡 조절을 한 다음, 입문 단계에서도 수월하게 소화할 수 있는 『점과 선』, 『제로의 초점』 같은 장편을 고른다. 사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미스터리는 미야베 미유키와 마찬가지로 분량에 대한 부담만 제외하면 입문 단계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시대감이 느껴지지만 그 가운데 당시 사회 현실을 간접 경험할 수 있다.
화려한 명성을 자랑하지 않아도 기타모리 고라는 작가가 들려주는 맥주집 가나리야 이야기 연작 또한 귀 기울일 만하다. 가나리야의 주인 구도 데쓰야가 풀어내는 미스터리를 담은 『꽃 아래 봄에 죽기를』과 『벚꽃 흩날리는 밤에』는 ‘수수께끼의 끝에 인생의 비애가 있다’는 카피처럼 애잔한 감상에 젖게 만든다. 2010년,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작가의 데뷔 즈음 고생담을 듣고 작품을 읽으면 그 애처로움은 더욱 깊어진다. 나머지 두 작품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함께 입문 단계에 담아 즐기면 되겠다.
위에 이야기한 작품들은 장,단편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영상물은 나름 재해석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원작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소설을 읽은 뒤에 영상물을 통해 보충하는 방식을 택하는 편이 안전하다.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의 『게임의 이름은 유괴』처럼 원작의 결말 뒤에 영화만의 반전을 이어붙이는 재미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일본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우리 영화도 찾아볼 만하다. 얼핏 떠오르는 작품만 꼽아도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2012),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영화명 <하울링(2012)> ),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2009)>, <용의자 X>(2012), <방황하는 칼날>(2014) 등이 있다.
수수께끼 풀이에 몰두하고 싶은 분들은 ‘본격추리’로 불리는 일본산 퍼즐 미스터리를 고른다. 빼놓을 수 없는 본격추리는 역시 요코미조 세이시의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이 시리즈는 입문, 심화, 마니아 세 단계에 걸쳐 두루 나누었다. 우선 『여왕벌』. 번번이 지각 등장으로 독자에게 갈증을 안겨주는 명탐정이 이 작품에서는 일찌감치 등장한다. 긴다이치 탐정을 책으로 처음 접하는 분들은 시리즈 순서와 상관없이 이 작품으로 시작해도 무난하다. 『이누가미 일족』, 『밤 산책』, 『삼수탑』 역시 입문 단계에서 즐길 만한 작품.
본격추리의 새로운 시대를 연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는 본격추리 독자라면 반드시 거치는 작품들이다. 입문 단계에서는 『십각관의 살인』을 권한다. 1987년에 발표되었다는 점과 고전 추리소설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애정이 담긴 작품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잊지 못할 경험이 된다. 풋내가 날지 몰라도 일본 미스터리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아야츠지 유키토와 함께 신본격 1세대인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일본의 엘러리 퀸’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깔끔한 논리적 해결을 추구하는 본격추리로 일관한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데 학생 시리즈의 『월광게임,: Y의 비극 ’88』을 입문 단계에서 읽으며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도전장을 경험한다. ‘심화’에 여러 작품을 올리게 될 우타노 쇼고의 작품 가운데 중편집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도 입문 단계에서 독자 자신의 논리력을 점검하는 데 도움이 될 작품이다.
지금까지 무게감 있는 작가를 중심으로 작품을 꼽았다. 입문 단계에는 좋은 작가를 따라 책읽기의 가닥을 잡아가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다. 다음부터는 작품의 특징을 중심으로 미스터리의 하위 장르를 살피며 고르게 된다. 입문 단계 두 번째는 일본 미스터리의 최근 경향을 중심으로 비교적 최신작들을 살펴보고 서술트릭 작품들과 몇몇 주변 장르를 함께 둘러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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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장르소설,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 화차, 아야즈치 유키토
전업 번역자. 중앙일보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번역을 업으로 삼고 있다. ‘일본미스터리즐기기’ 카페 운영자이며 아직 창작은 하지 않지만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이기도 하다.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 기리노 나쓰오의 《다크》, 《IN》,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과 존 딕슨 카의 《셜록 홈즈의 미공개 사건》을 비롯해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오리하라 이치 등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또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나니와 몬스터》을 비롯한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와다 료의 《노보우의 성》, 《바람의 왼팔》을 비롯한 시대·역사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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