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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이 되는가 -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대학 입학시험이 전부였던 그 시절에도 소년들은 성장한다
어떤 친구들과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 어떻게 관계 맺느냐에 따라 나 자신의 중요한 부분이 결정된다. 어느 교육제도 속에 있건, 많은 소년, 소녀들은 그렇게 자란다.
1980년 영국 북부 지방의 쉐필드. 공립고등학교의 입시준비반. 똑똑하지만 장난기 넘치는 8명의 학생이 ‘옥스브릿지’(옥스퍼드 캠브릿지)에 입학하기 위해 학업에 몰두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보낸 사람이라면 무대 위의 이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으리라.
대입 시험을 앞두고, 서울대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 보이는 성적 좋은 학생들을 모아놓은 우수반 정도를 떠올리면 된다. 이들에게도 시험은 스트레스고, 훌륭한 어른이 되는데 당연히 겪어야만 할 (것 같은) 관문이고, 인생의 전부이기도 하다. 우리가 고3 때 그랬듯이 말이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과목들을 떠올려보면 좀 낯선 기분이 든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 가정, 체육, 음악, 미술… 모든 과목을 조금씩 조금씩 가리키며 전인적인 인간을 만들려는 속셈(?)이었겠지만, 어쩐지 그 어느 과목도 제대로 배운 건 없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머물렀던 학교에서 내가 배웠던 건 뭘까.
그때 선생님이 외우라고 외우라고 일러줬던 수학의 공식들, 지구 둘레를 재는 공식들, 영어 문법들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파기된 지 오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친구들을 배웠다. 그러니까 나와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른 친구들을 보면서 사람에 대해서 배우고, 그 친구들과 관계 맺는 법을 배웠다. 아니, 실패도 하고, 즐거운 추억도 만들면서 스스로 익혔다. 물론 나의 윗사람, 선배 혹은 선생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형성된 나의 성격, 관계 맺기의 방식 등은 여전히 내 일부로 남아있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학교의 의도와는 달리, 나는 그 시절에 더 중요한 것들을 배우고 있었던 거다. 어떤 친구들과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 어떻게 관계 맺느냐에 따라 나 자신의 중요한 부분이 결정된다. 어느 교육제도 속에 있건, 많은 소년, 소녀들은 그렇게 자란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대단히 지적이고 섹시한 이야기
2013년에 초연된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는 작년에 내가 본, 가장 인상적인 연극이기도 하다. 초연 때 무대 위에서 만났던 얼굴들을 그대로 볼 수 있어서 반가웠고, 새로 투입된 배우들의 또 다른 표정이 궁금하기도 했다. 두산 아트센터에서 공연하고 있는 ‘특별한 역사수업’을 올해도 놓치지 않고 들으러 갔다. 김태형 연출가는 두 번째 연출을 맡은 소회를 “작년보다 자신있다”고 밝혔고, 배우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배역을 자연스럽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교정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볕으로 교실은 오늘도 밝고 따뜻하게 비쳐 있다. 연출의 말마따나, <히스토리 보이즈>라는 이 연극은 교실에 쏟아지는 햇볕을 즐기러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러 와도 좋고, 아이들의 시적이고 우아한 농담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히스토리 보이즈>는 2003년 영국의 희곡작가 엘렌 베넷이 70세가 되던 해 발표한 희곡. 영국의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후 토니어워즈 작품상 등 주요 6개 부문 상을 휩쓸었고, 동명의 헐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됐다. 이후 미국, 이탈리아, 호주 등 전국 각지에서 공연되다가 이렇게 두산 아트센터 무대 위에까지 오르게 됐다.
교실 분위기의 무대는 거창한 전환은 없지만,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따뜻한 조명이 정겨운 인상을 준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굿윌헌팅>에 종종 겨뤄지는 얘기라면, 짐작될까? 개성이 다른 선생님과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성장하는 여덟 명의 아이들의 이야기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는 우수반 학생들. 그들과 지식을 이어주는 몇 명의 선생이 등장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키팅 선생님을 떠올리게 하듯, 시험이 세상에 전부가 아니라고 외치는 낭만적인 문학교사 헥터, 오로지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해 고용된 젊고 비판적인 옥스포드 출신의 역사 교사 어윈이 등장한다. 가르치는 방식이 전혀 다른 두 선생님 사이에서 학생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의 개성에 맞는 방식을 찾아 나간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는 것들
헥터의 수업에서 아이들은 수많은 시와 희곡의 말을 암송하고 내뱉는다. 헥터는 아이들에게 인생의 해독제를 건네주고 싶어한다. “시에 나온 상황들을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헥터는 “겪게 될 겁니다. 그때를 위해 여러분은 해독제를 지니는 셈이에요. 시는 예고편 같은 겁니다.”라고 말해주는 교사다.
반면 어윈은 헥터가 알려주는 삶의 진실, 문학의 진실을 시험 답안지 제출용으로 일러주는 교사다. 알고 있는 지식을 어떻게 요리해야 시험 감독관 마음에 들지 가리킨다. 역사는 사실을 쓰는 게 아니라, 흥미로운 관점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가리킨다.
얼핏 보기에는 헥터 선생님은 선하고, 어윈 선생님은 악한 듯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히스토리 보이즈>가 흥미로운 건 이 지점이다. 그리스적인 참된 지식을 가리키는 헥터 선생님의 추행이 드러나고, 논리로 무장해 항상 이기고, 항상 완벽할 것 같은 어윈의 빈틈이 드러나게 된다. 선생님을 바라보는 학생의 시선이,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달라진다.
단순히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모호한 판단의 교차로에 관객을 세워두고, 작가 엘렌 베넷은 70의 노장다운 시선으로 묻는다. 과연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가? 역사란, 진실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얼마나 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가?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말이다. 아이들은 그 필연적인 우연, 우연적인 필연이 벌어지고 있는 이 역사 속에서도 웃고 떠들고, 때로는 아파하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성장한다.
생각해보면, 선생님 혹은 학생이라는 지위가, 어느 학교 출신이라는 신분이 그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사소하다. 그보다는 어떤 관점으로, 어떤 태도로, 역사와 문학과 삶을 대면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모든 역사를 뒤집고 반증하는 방식으로, 알맹이가 없더라도 강렬한 조미료를 중요시하는 어윈, 매사 도전의식이 충만한 데이킨, 모든 것을 심장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포스너. 관객 역시 캐릭터를 이런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의 학교나 직업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의 태도다. 우리 역시, 그런 것을 통해 우리 자신이 된다.
꼭 한번 수업을 듣고 싶은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문학선생님 헥터 역의 배우 최용민, 논리로 무장한 어윈 역의 배우 이명행은 다른 배우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연기를 해낸다. 데이킨 역의 김찬호, 포스너 역의 이제균 역시 무대위에서 반짝반짝 빛을 낸다. <히스토리 보이즈>의 특별한 수업은 4월 20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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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답게 잘, 헤쳐나가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