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영사기(映思記)
제약이 없는 규율 - <죽은 시인의 사회>
‘외형의 규율’이 아닌 ‘내형의 규율’을 추구하라!
학생들은 하나 둘 씩 책상 위에 올라가 외친다. ‘캡틴, 오 마이 캡틴(선장, 오 나의 선장)!’ 학생들은 스스로 키팅 선생의 선원이 되기로 기꺼이 결심한 것이다. 선생이 선장이 되다니, 이제 그들은 그야말로 인생이라는 항로 속에서 한 배를 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선언일 뿐인 외형적 규율보다 생활이 되는 내형적 규율이 훨씬 더 촘촘한 것이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말이다.
굳이 잘 보이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 칼럼의 담당자는 나와 인터뷰를 한 차례 한 적이 있었는데 매우 수줍어하면서도 자유로운 사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 이유는 인터뷰 제안을 할 때는 매우 쑥스럽게 말했지만, 정작 인터뷰를 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각을 해서 사진작가와 나를 기다리게 해놓고선 “아. 이거 뭐 그렇게 돼버렸습니다.”라며 태연하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나도 자주 약속에 늦는지라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우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칼럼을 청탁하면서 또 수줍은 듯, “바쁘시겠지만 좋은 원고를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하고선, 막상 원고 방향에 대해 물어보자 “그냥 쓰고 싶은 대로 맘껏 쓰시면 됩니다.”라고 대범하게 말했다. 나는 ‘쓰고 싶은 대로 맘껏’이라는 표현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냥 영화가 소재만 된다면, 이야기가 금성으로 날아가건, 달나라에 불시착하건 아무 상관하지 않겠다는 주의였다. 멋지지 않은가. 연재기간도 1년이 되건, 2년이 되건, 작가가 스스로 지치지 않거나 죽어버리지만 않는다면(실제로 이렇게 표현했다)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다 했다. 거, 참 이래도 되나 싶은가, 라는 생각보다는 ‘이야. 이거 정말 아무렇게나잖아.’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다시 말하자면 멋진 제안이었다.
그런데, 나는 사실 이런 ‘전혀 규율 없음이 하나의 엄격한 규율’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말이냐면, 예전에 밑줄이 전혀 그어지지 않는 노트를 써본 적이 있었는데, 글을 쓸 때마다 눈으로 줄을 그어가며 쓸 수밖에 없었다. 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쓰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썼다가는 나 자신조차 읽지 못하게 될 정도로 엉망이 돼버린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간간이 체크를 하며 글을 썼는데, 그 때 얻은 깨달음은 ‘유형이건, 무형이건 모든 것에는 나름의 규율이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즉, 세상에는 외형적으로 존재하는 규율(즉, 줄이 그어진 노트)과 내형적으로 존재하는 규율(즉, 눈으로 줄을 그어야 하는 노트)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규율 따위야 전혀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이야기는 산으로 가고, 문장은 대각선으로 내려오고, 맥주는 거품만 따라지게 된다.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