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내가 너에게 말했으니까

회사가 재미없는 곳이 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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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맛있는 거 사 줄게!” 약속하신 모든 페친의 댓글과 얼굴들이 가볍게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배고프니 불꽃같은 기억력이 타오른다. 다 생각난다. 밥, 술, 국수, 고기 모조리 다 기억난다. 자자, 희언(戱言)은 없습니다. 줄을 서시지요!

페이스북을 열심히 하다 보니 책 구매량이 늘었다. 작가 페친도 있고 출판사를 경영하는 페친도 있어 좋은 책들을 소개받다 보니 책 구매가 계속 늘었다. 나 이렇게 똑똑해져도 되나 싶다. 좋은 책을 소개한 글을 보고 ‘네! 사보겠습니다!’라고 댓글을 달았으면 반드시 산다.

고3 때 인생 중 가장 신나게 놀다가 대학에 떨어져서 재수를 하게 되었다. 재수 종합반 학원을 등록하기로 한 날 아침, 어머니께서 나를 깨우시다가 그냥 내 옆에 누우셨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재수학원 등록 이야기가 나왔다.

“이번엔 잘 해라. 두 번은 안 된다.”
“그럼. 두 번 실수는 안 해.”
“넌 언제나 말만 좋지.”


‘넌 언제나 말만 좋지.’라는 어머니 말씀이 비수처럼 박혀 지금도 종종 떠오른다. ‘언제나’는 심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학에서 떨어진 게 사실인데 무슨 말을 하랴. 구차해서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있다가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나가서 재수 종합반에 등록했다.

언젠가 어떤 강의에서 ‘신뢰’를 강조하면서 “약속해!” 혹은 “맹세해!”로 쓰이는 영어 표현인 “I give you my word!”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주 인상적이었다. 직역하면 ‘내가 너에게 말했으니까’가 “약속해!” 혹은 “맹세해!”로 인정되는 것이다. 나의 말의 무게가 그 정도 된다면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 찍고 복사하고 스캔하고 녹음하는 등등의 번거로운 우스개 행동조차 할 필요가 없겠지. 내 말이 곧 약속이 되는 사람이 되자 싶었다. 그래서 빈말을 잘 안 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입으로 한 말이라면 되도록 지키려고 애를 썼다. 어찌 이 빈틈투성이의 인간이 그걸 다 해냈겠는가. 결국 말만 좋은 사람이 된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래도 참 멋진 경지 아닌가. “내가 말했잖아!”로 신뢰가 성립되는 것.

회사에서 쓸데없는 일을 시킨 데 대해 매우 분노한 적이 있다. 나는 쓸데없는 일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회사가 나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노했다. 내가 급하게 종일 했던 일은 내 업무를 다달이 잘 해 오고 있다는 서류와 그 증거물을 구비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나의 일은 1년을 단위로 진행된다.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다. 하루에 일정량을 번역하거나 연구해서 12달을 채우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일하는 스타일은 그렇지가 않다.

나는 내 스타일대로 일해서 지난 4년 동안 회사와 약속한 업무량을 달성해 왔다. 나를 믿고 일을 맡기기를 바라서 내가 약속한 것을 이행했던 것이다. 일하는 방식까지 제어하는 건 회사가 간섭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회사를 ‘단체’라고 말하지 말라. 어떻게 일일이 모든 사람을 신경 쓰냐고 말하지 말라. 전체주의가 찌들어서 그런 것이지, 할 수 없는 것도 비효율적인 것도 아니다. 우린 일대일로 계약을 맺지 않았는가! 일대일의 신뢰를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는 순간 회사는 참으로 재미없는 곳이 된다. 아무리 약속을 지켜도 한 치의 신뢰도 얻을 수 없다면 약속을 지킬 이유가 없게 된다. 감시는 결과를 얻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대선이든 총선이든 인사청문회든 우린 아직 정직과 신뢰에 표를 던지지 않는 것 같다. 경제개발을 막 시작했을 때야 속임수가 빛을 발하는 것 같지만, 서로 믿을 수 없는 데서 비롯되는 비용 낭비는 사회가 성장할수록 더 막대하고 치명적인 것이 된다. 정치가와 행정가는 이 사회가 갈 바를 그리는 사람들이다. ‘저는 이리로 길을 냈습니다. 이 길은 어쩌고 저쩌고….’라고 연신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말을 스스로도 믿지 않으며 듣는 사람도 으레 말뿐이려니 하고 만다면, 이건 원래 그런 거라며 ‘피식’ 웃고 말 문제가 전혀 아니다.

그야말로 ‘암중(暗中)’ 그 자체에서 뱅뱅 돌고 있는 거니까. 물건 하나를 사도 가격이나 성능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우선 우리 사회가 치졸하게 ‘속임수’로 주머니를 털어 가지는 않는다는 총체적 신뢰가 있어야 함께 뒤를 무서워하지 않고 내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천지가 개벽해도 하늘이 어느 날 갑자기 정직과 신뢰를 이 사회에 한 아름 안겨 주고 새 날을 열어 주지 않는다. 그저 ‘나’의 선택과 실행이 쌓이고 모여 만들어질 뿐이다.


내가 맹자의 어머니를 많이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이 부분은 멋지다. 맹자는 그날 저녁 맛있게 돼지고기를 먹었을 터. 요즘은 아토피가 올라와서 육식을 끊었다. 본의 아니게 살을 빼고 있는 중이다. 아, 나는 결국 극한의 아름다움을 정녕코 이루고야 마는 것인가! 미인이 되어도 항상 겸손해야지 다짐해 본다. 그러나 배가 고프다. 나에게 “맛있는 거 사 줄게!” 약속하신 모든 페친의 댓글과 얼굴들이 가볍게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배고프니 불꽃같은 기억력이 타오른다. 다 생각난다. 밥, 술, 국수, 고기 모조리 다 기억난다. 자자, 희언(戱言)은 없습니다. 줄을 서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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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랑 언니의 명랑 고전 탐닉 임자헌 저 | 행성:B잎새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이제는 거의 쓸 일이 없는 한문을 공부하고 사극에서나 볼 법한 옛글을 번역하는 저자는 소위 ‘문자 좀 쓰는 여자’이면서도, 누구보다도 지극히 현대적이고 시크한 요즘 여자이다.이 책은 현대 여성들이라면 다 겪을 법한 소소한 일상의 사건사고에 저자 특유의 기발한 발상과 위트, 독특한 관찰력을 담고 거기에 고전을 살짝 토핑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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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자헌

의욕 넘치게 심리학과에 지원하여 합격했으나 막상 가 보니 원하던 학문이 아니어서 대학시절 내내 방황했다. 어쩌다 보니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연수원에 입학하여 깊은 고민 끝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렸다. 상임연구원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나름 ‘문자 좀 쓰는 여자’가 되었다. 《일성록》 1권을 공동번역하고 3권을 단독 번역했으며, 《정조실록》을 재번역 중이다.

맹랑 언니의 명랑 고전 탐닉

<임자헌> 저12,600원(10% + 5%)

“하루키보다 공자를, 커피보다 맹자를 사랑한 문자 좀 쓰는 언니의 촌철살인 일상 수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이제는 거의 쓸 일이 없는 한문을 공부하고 사극에서나 볼 법한 옛글을 번역하는 저자는 소위 ‘문자 좀 쓰는 여자’이면서도, 누구보다도 지극히 현대적이고 시크한 요즘 여자이다.이 책은 현대 여성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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