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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여성들이 꿈꿔온 남자 친구’ 그 매력은?
<섹스 앤 더 시티>의 에이든(존 코베트)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파국을 일방적인 한쪽의 탓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서로 달랐을 뿐이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구두 디자이너의 작품이래도, 발등에 진짜 다이아몬드가 총총히 박혔대도, 내 발에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니까. 모든 걸 갖췄으나 설명할 수 없는 딱 한 가지 때문에 먼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없는 남자. 다른 모든 여자들에게 완벽하게 무난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나를 망설이게 하는 남자. 에이든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구두는 검정색이었다. 앞코는 너무 과하지 않을 만큼 뾰족했고 7cm의 굽은 날렵하면서도 안정적이었다. 이렇게 심플한 디자인일수록 소재가 중요하다는 건 판매원의 말이었다. 저희 브랜드 세일 잘 안 하는 건 아시죠?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그의 목소리가 몹시 진지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행운의 기회를 거머쥐게 되었는데 감사하며 날름 집어가지는 못할망정 도무지 뭘 망설이고 있느냐는 게 그의 요지였다.
사. 같이 간 친구도 옆구리를 찔렀다. 이런 거 하나 있으면 많이 신게 되더라. 여기 저기 웬만하면 다 잘 어울리고. 친구 분이 뭘 좀 아시네요. 판매원이 반색했다. 고객님, 이거 정말 사이즈가 없어서 못 판다니까요. 그는 마침내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 사이즈도 다 완판이고 지금 이거 딱 하나 남은 거예요. 다시 한 번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정말로 구두는 내 발에 꼭 맞는 듯 보였다. 나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친구가 다시 말했다. 정말 괜찮다니까. 이만큼 무난하기도 어려워. 나는 거울에서 슬며시 시선을 거두었다. 친구는 무난하다, 라고 말했다. 바로 그 표현이 나를 계속 망설이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한번 걸어보세요. 판매원이 권하는 대로 나는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딛어 보았다. 말 그대로 무난했다. 열 걸음 쯤 걸었을 때 무언가 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오른쪽과 왼쪽의 느낌이 다른 것이다. 오른쪽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반면, 왼쪽은 그렇지 않았다. 심각하다는 뜻이 아니다. 새끼발가락의 끝부분이 조금, 아주 조금, 불편했다. 지나치게 딱 맞아서 그런 듯도 했다. 새 신발이라 그래요. 판매원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누구나 좌우 발 크기가 비대칭인 걸요. 왼쪽은 저희가 가진 기구로 조금 늘려드리면 돼요. 문제는 구두가 아니라 내 발이라는 그의 진단은 정말로 사실일지도 몰랐다. 나는 마음 한 구석의 미심쩍음을 해결하지 못한 채 지갑을 열었다.
구두를 집에 들고 들어오니, 물건 보는 눈 매섭기로 우리 동네 최고인 남편이 한 마디 한다. 잘 샀네. 평소, 신발장의 그 많은 것들은 국 끓여먹을 거냐는 입장이던 친정어머니도 이런 디자인은 관리만 잘 하면 십년도 더 신을 수 있다고 모처럼 칭찬하신다. 귀 얇기로 따지면 국가대표급인 이 몸, 그제야 안심이 된다. 새 신발을 신고 모임에 나간 날, 내 새 구두가 아주 잠깐 화제에 오른다. 요즘 수제화 브랜드에서는 그렇게 무난한 구두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어디서 샀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마음속에 작은 뿌듯함마저 차올랐다. 그 구두 속에서, 왼쪽 새끼발가락이 짓이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도 점점 더 불편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한다.
앞으로 매주 화요일, 정이현 작가의 칼럼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를 연재합니다. 칼럼을 읽고 댓글을 남겨주시면 총 10명을 뽑아 선물을 드립니다. (기간: 12월말 마감) 채널예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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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