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호정의 옛 담 너머] 병이 낫고 나니 봄바람은 가 버렸고

현호정 칼럼 – 11화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현호정 소설가가 포착한 ‘나를 아프게 하던 존재를 약으로 여기는 순간’. (2024.08.20)


현호정 소설가가 신화, 설화, 전설, 역사 등
다양한 옛이야기를 색다른 관점에서 읽으며,
현대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을 전합니다.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pexels.

수능을 치른 다음 날이었다. 느긋하게 교실로 들어온 친구 하나가 책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반을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수능은 만병통치약인가 봐! 내 모든 병이 다 나았어!”

와그르르 함께 웃던 순간의 순수. 그것은 지금까지도 마음속 깊은 우물에 소중히 고여 시시로 가문 밭을 축이게 한다. 자기 병의 원인을 자기 병의 약이라 불러주던 그 애의 목소리에 자조는커녕 한 방울의 의심도 섞여 있지 않았다는 건 신비한 진실이다. 그 애는 정말 그렇게 여기는 듯했다. 수능이 병의 원인이라는 사실과 수능이 병의 약이라는 판단은 충돌하지 않으며, 병의 원인으로서의 수능과 약으로서의 수능은 공존 가능한 개념이라고. 그때 나는 그 논리가 이치에 맞는지는 몰라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근래 다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생리를 시작해 몸이 안 좋다는 말에 친구 미섭이 “너 이제 팔자 폈다, 축하해!”라고 답해준 거다. 생리 전 증후군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물론이고 일단 시작을 했으니 끝도 날 테니까. 이렇게 아프고 앞으로 여러 날 더 아프겠지만 거짓 없이 기쁜 마음으로 축하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고통을 만드는 존재로서의 생리와 고통을 없애는 존재로서의 생리가 맞물린 채 그저 받아들여졌다. 이때 나는 이 공존이 아름다운지는 몰라도 이치에 맞다고 생각했다.

나를 아프게 하던 존재로부터 멀어지면서 내가 그걸 약으로 여길 수 있게 된다니 야릇하다. 사전적 의미로 병은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현상”1 이다. 인간은 한 현상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떠나가는 쪽은 오히려 현상이 아닐까. 조선 시대 사람들이 천연두를 ‘손님’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을 떠올린다. 위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 역병이 부디 순하게 머물다 고이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손님의 방문을 환영하는 마음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손님신’이 천연두를 앓게 하는 역할 뿐 아니라 낫게 하는 치료 신 역할까지 수행한다2 는 설정이 환대의 순수를 수호했다. 책 『신탁 콤플렉스』에 따르면 “손님신의 의미가 실현되는 과정에서 의미를 결정하는 쪽은 손님네를 맞이하는 인간들이다. 환대와 적대(박대)에 따라 손님신의 성격과 의미는 재구성된다.”3 손님굿에서도 신을 잘 대우한 노고할미는 보호를 받지만, 손님신 중 하나인 ‘각시손님’에게 하룻밤 자 주면 배를 빌려주겠다고 지껄인 뱃사공은 목이 잘리고 그의 일곱 아들도 전부 천연두에 걸린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만은,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 말의 문인 이조년이 지은 이 시조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는 마지막 구절로 잘 알려져 있다. 다정이라는 병과 환대의 전략을 나란히 놓고 싶어진 건 어떤 예감에서였다. 질문 하나. 우리는 병과 같은 다정이 우리의 대문을 두드릴 때에 환대할 것인지 박대할 것인지 자기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가? 질문 둘. 다정은 환대를 받으면 순해지고 박대를 받으면 사나워지는가? 그러니까, 나를 아프게 한 다정은 내가 박대해서 사나워졌던 걸까?

‘다정’을 해석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양하겠으나 나는 가장 단순한 예를 들어보고 싶다. 누굴 너무 많이 사랑하게 됐을 때 말이다. 내가 이 존재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말 것을 그냥 알게 되는 순간에 말이다. 품으로 파고드는 커다란 병에게 환영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과연 나는 그럴 수 있었을까. 사랑은 늘 환대할 수밖에 없는 손님이자 늘 사나워져 아프게 하는 손님이라는 점이 싫고 이상하다. 그래도 나는 가지 말라고 부탁했었다. 조금만 더 머물다 가라고 했다. 난 그냥 무한히 앓고 싶었던 것도 같다. 낫고 싶지 않았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그래야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배꽃에 달빛 희고 은하수 깊은 밤, 봄에 마음을 걸어두었던 나뭇가지에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소쩍새가 앉아 있다. 앓던 시절이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언젠가 돌아가게 된대도 그곳은 이미 내가 아는 그곳이 아닐 것이다. 남은 슬픔을 모두 거기 바친다.

병이 낫고 나니 봄바람은 가버렸고 / 病起春風去

시름이 많아 여름밤도 길구나 / 愁多夏夜長

잠깐잠깐 잠자리에 들었다가 / 暫時安枕?

금방새 고향을 그린다네 / 忽已戀家鄕

불을 붙이면 솔그을음이 침침하고 / 敲火松煤暗

문을 열면 대나무가 시원하게 느껴져 / 開門竹氣?

아마 저 멀리 소내 위에는 / 遙知苕上’月

달그림자가 서편 담을 비치련만 / 流影照西墻4

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병4 (病)’의 첫 번째 뜻 - 생물체의 전신이나 일부분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현상.

2 조현설, 『신탁 콤플렉스』, 이학사, 2024, 131~132면.

3 같은 책 135면.

4 정약용, 「밤」, 『다산시문집』 제4권. 번역 한국고전번역원 양홍렬, 1994. 링크



추천 기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3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현호정(소설가)

『단명소녀 투쟁기』 『고고의 구멍』, 『삼색도』 등을 썼다. 2020년 박지리문학상, 2023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신탁 콤플렉스

<조현설> 저15,200원(5% + 2%)

신화학자 조현설의 신탁 콤플렉스로 신화 새롭게 읽기 신화학자 조현설 교수(서울대 국문과)는 오랫동안 신화와 전설, 민담 등 옛이야기를 들여다보다가 그 안에서 신탁(오라클)의 역설을 발견하고 이를 신탁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였다. 이 책은 지은이 조현설 교수가 신화와 전설, 나아가 민요와 굿놀이 등에 스며 있..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끝나지 않는 오월을 향한 간절한 노래

[2024 노벨문학상 수상]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 간의 광주, 그리고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의 철저한 노력으로 담아낸 역작. 열다섯 살 소년 동호의 죽음을 중심으로 그 당시 고통받았지만,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꺼내 보이면서 그 시대를 증언한다.

고통 속에서도 타오르는, 어떤 사랑에 대하여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23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이자 가장 최근작. 말해지지 않는 지난 시간들이 수십 년을 건너 한 외딴집에서 되살아난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지극한 사랑”이 불꽃처럼 뜨겁게 피어오른다. 작가의 바람처럼 이 작품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전세계가 주목한 한강의 대표작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장편소설이자 한강 소설가의 대표작.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고통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표현해낸 섬세한 문장과 파격적인 내용이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나무가 되고자 한 여성의 이야기.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

[2024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소설가의 아름답고 고요한 문체가 돋보이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작품.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소설이다. ‘흰’이라는 한 글자에서 시작한 소설은 모든 애도의 시간을 문장들로 표현해냈다. 한강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