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마지막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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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더 앞을 향해 디뎌보는 것. 저는 문학이 그런 종류의 안간힘 같아요. 어떤 마음의 최선. 어떤 사랑의 최선. 어떤 실험의, 어떤 절망의 고요한 최선요. (2024.06.18)


고명재 시인이 매달 마음 깊이 사랑하는 시를 전합니다.

시인의 사려 깊은 시선을 통해, 환한 사랑의 세계를 만나 보세요.


pexels

기쁨은 흐릿하게 오고

슬픔은 명랑하게 온다


바람의 혀가 투명한 빛 속에

산다, 산다, 산다 할 때


-허수경, 「나는 춤추는 중」 중에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안녕하세요. 채널예스 독자님들. 이 글은 그간 연재해 온 채널예스의 마지막 글입니다. 평소에 미련도 많고 쿨하지도 못한 저로서는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은데요. 이번만큼은 울지 않고 잘 말할 겁니다. 명랑하게 인사를 건넬 거예요. 너무 아름다운 시인의 저 마지막 시처럼(마지막 시집의 맨 끝에 있어요) “기쁨은 흐릿하게 오고 / 슬픔은 명랑하게” 오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탄생과 죽음, 사랑과 냉담,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힘껏 살아내는 존재지요. 힘차게 손을 흔들며 인사 건네요. 그간 사랑으로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함께 읽고 쓰면서 참 행복했어요.

그나저나 열세 달 만의 종착지라니! 이 사실이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일 년을 완성하는 열두 달이 아니라, ‘열세 달이라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어요. 여기에는 ‘한 번 더가 있는 거잖아요. 한 번 더, 한 해(年)를 초과하는 거잖아요. 육상도 빙상도 그런 일이죠. 한 발 더 앞을 향해 디뎌보는 것. 저는 문학이 그런 종류의 안간힘 같아요. 어떤 마음의 최선. 어떤 사랑의 최선. 어떤 실험의, 어떤 절망의 고요한 최선요.

그래서 오늘은 긴 글을 쓰려고 해요.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소개하고 싶은 글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마지막이니까, 맨 끝이니까, 막바지니까 온 힘을 다하는 게 맞겠죠? 그래서 오늘은 중구난방의 글이 될 거 같아요. 중구난방을 ‘박물지(博物志)적이다’라고 예쁘게 봐주셔요. 저의 맥락 없음을 신명이라고 포장해 주셔요. 꽃다발처럼 다양하게 안아주셔요. 그럼 기왕 한 번 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통상 천일야화(千一夜話)라고 불리는 『아라비안나이트』의 번역 과정에 대한 보르헤스의 짧은 이야기를 읽어봅시다.


존경받는 그의 천재적 원문주의는 “아랍텍스트를 원문에 충실하게 온전히 번역한 판본”이라는 부제와 『천 일 밤과 하룻밤의 책(Libro de las mil noches y una noche)』을 쓰려는 그의 착상에서 엿볼 수 있다. (...) 이 페르시아어 제목을 그대로 번역하면 “천 개의 모험”인데 사람들은 이를 “천 일 밤”으로 칭했다. (...) 어쨌거나 애초의 1000일은 이내 1001이 됐다. (...) 이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어 버린 그 하룻밤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리트만은 터키어 ‘binb bir’라는 구문이 와전됐다고 하는데,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1001’이고 ‘많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레인은 1840년 초에 보다 아름다운 이유를 제시해주는데, 짝수가 주는 마술적 불안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목의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갈랑은 1704년부터 원문의 ‘천 일 밤과 하룻밤’의 반복을 없애고 “천일(千一,1001) 밤”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이 제목은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제목을 선호하는 영국을 제외한 유럽에서 아주 익숙해졌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천일야화』의 역자들」 (『영원성의 역사』, 민음사) 중에서


‘백, 천, 만’과 같은 이상한 개념들. 이런 수의 개념은 통상 완전성(백점!)이나 무한성(천년만년)을 뜻하곤 하죠. 그러니까 원래 『아라비안나이트』는 완성과 무한을 뜻하는 ‘1000일 야화(夜話)’로 번역되어야 했는데, 옮겨지는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1001일 밤”으로 번역되어 버렸다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 어떤 학자는 많음을 뜻하는 터키어에서 와전이 일어났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짝수”가 일으키는 불안 때문에 하룻밤을 더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정작 보르헤스는 이 추가된 하룻밤을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1977년 유월의 어느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나 아름답게 말합니다.


여기서 잠시 제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의 제목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목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여기에는 또 다른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나는 ‘천’이란 말이 우리에게 무한의 동의어처럼 여겨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 밤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한한 밤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셀 수 없이 많은 밤들이지요. 그러니까 ‘천 하룻밤’이라는 것은 무한한 밤에 하나를 덧붙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영국식 표현을 떠올려 봅시다. 종종 ‘영원히’라는 말 대신 그들은 ‘영원하고도 하루 forever and a day’라고 말합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에 하루를 덧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여자에게 쓴 하이네의 시구 “나는 당신을 영원히, 심지어는 그 후에도 사랑하리라”를 떠올리게 합니다. 무한의 사상은 『천 하룻밤의 이야기』와 뗄레야 뗄 수 없는 핵심적인 생각입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7일 밤」, (『말하는 보르헤스』, 민음사) 중에서


항하사(恒河沙)라든가 아승기(阿僧祇)라든가 나유타(那由他)라든가. 요즘은 이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말들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최근에 이 말들을 가지고 시를 쓰고 있었거든요. 너무너무 낯설게 느껴지는 거예요! 어떻게 저런 다양한 무한적 개념이 있는 걸까요. ‘항하사’의 항하(恒河)는 겐지스강을 뜻해요. 그러니까 겐지스강의 모든 모래(沙)의 총합을 뜻하죠. 그런데 모래는 계속 깨지면서 더해지지 않나요? 그럼 항하사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수적 개념이 아닌가요. 모래시계처럼 흘러가는 수라니. 유동하는 수라니. 매일매일 불어나는 수라니. 아무튼 이 항하사의 만 배가 아승기래요. (유명 가수 그분 말고 아승기요) 이 아승기의 억 배는 나유타고요. 나유타의 억 배는 불가사의고요. 결국 무량대수(無量大數)라는 말에서 우리는 벼랑을 만나요. 한자 언어권의 언어는 바닥이 나고야 맙니다. 무한에 무한을 더해 지칭하다가 지쳐버린 언어의 끝을 엿본 것 같아요.

그런데 놀랍도록 아름답지 않나요. 끝을 모르고 도전하는 우리의 마음이요. ‘무량대수 다음에는 뭐가 또 있어?’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끝-너머를 상상하곤 합니다. 말 그대로 무한(無限)보다 크고 깊은 것이 우리 안에 있는 거지요. 이 한량없음이, 끝 모름이 멋지지 않나요. 무량대수 너머까지가 우리 가슴에 있다니. 우리는 항하사에도, 아승기에도 하룻밤을 더할 수 있어요. 그 ‘한 스푼의 하룻밤’이 항하사와 아승기조차 무너뜨려요. 천일야화(千一夜話)에 더해진 하룻밤은 그런 거예요. 무한을 깨뜨리는 하룻밤이죠. 무한조차 넘어서는 하룻밤이이에요. 완전한 개념(千)에 한 알의 모래(一)를 더 얹어보는 것. 월경(越境)의 사유죠. 무한조차도 넘어서는 힘이죠.

결국 이 하루 더는 ‘초과( )’일 뿐만 아니라 ‘결여(-)’와도 의미가 통해요. 완전, 완성, 완벽 따위 뻥! 차버리는 거예요. 조금 더 넘치거나 모자라지요. 바로 이것이 문학을 빚어내요. 이를테면 우리가 사랑했던 소설 속의 인물들은 항상 ‘통상적인 인간’을 조금 초과하거나, 조금 부족한 인물이에요. 떠올려 보세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못 말리거나(과잉) 안타까움(부족)을 자아내지요. 오이디스푸스도 그러해요. 그는 위대한데 치명적인 맹점이 하나 있지요. 바로 이 한 조각의 과잉과 결여가, ‘인간 전체에 관한 개념’을 흔들어버려요. 그러니까 천일야화는 ‘1000일의 야화’가 아니라 끝끝내 ‘1001일의 야화’가 되어야 했어요. 하나가 부족해서, 하나가 더 넘치기 때문에, 우리의 내면은 출렁이고 시는 탄생합니다.


가끔, 천수천안(千手千眼)의 손에 펜을 쥐여주고

시를 쓰게 해보고 싶어

하나의 대상을 두고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나오는 천 편의 시

천 편의 시각을 지닌 천 편의 시를 하나로 이어붙이면

대체 그것은 얼마나 길 것인가?


한 손이 한 행만 써도 천 행이 되는 시

천 편이 그냥 한 편이 되어버리는 시!


한때는 나의 이 한 손으로 천 명분의 시를 쓸 수 있겠다는

사이키델릭한 망상에 빠진 적도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차라리 내가 쓴 천 편의 시를 천수천안의 손에 쥐여주고

한 번에 찢어버리게 하는 게 더

사이키델릭하다고 생각해


천 편의 시가 한 번에 찢어지는 소리

말 그대로 마른 하늘, 아니 마른 종이에 날벼락 치는 소리!


그때 어디선가 하나의 웃음소리가 울려올 것이고


뭐, 제아무리 천수천안이라 한들

웃는 소리만은 나랑 같겠지


천수천안이 웃는 게 꼭

내가 웃는 것 같아


누가 한번 더 웃겠지


- 황유원, 「사이키델릭」 전문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학동네)


이토록 시원하고 얼얼한 시가 또 어디 있을까요. 이처럼 호쾌한 시를 쓰는 시인이 아직도 있다니. 저는 이육사나 청마와 같은 시인 이후 ‘우리에게는 황유원이 있다!’라고 외치고 싶어요. 여기 무한한 손과 무한한 눈(千手千眼)을 지닌 존재가 시를 씁니다. “하나의 대상을 두고 동시다발적으로” 시가 태어납니다. “천 편의 시각”으로 “천 편의 시”가 탄생합니다. 그 무한한 시를 “하나로 이어붙이”는, 말 그대로 끝없는 항하사의 시.

머리를 쥐어뜯으며 시를 쓰는 저로서는, “한 손이 한 행만 써도 천 행이 되는 시”가 정말이지 부러운데요. “천 명분의 시”를 “한 손으로” 쓴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 시는 도대체 얼마나 완벽할까요. 그 길이와 엄청난 역량에 관해 생각하다가 이 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어쩌면 이 시는 인류 전체가 쓰고 있는 시에 관한 시원한 농담인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인류가 쓰는 모든 시는 ‘동일한 마음-구조’를 여러 얼굴과 생명이 동시다발적으로 사용하는 행위가 아닐까요. 인류 전체가 천수천안이지요. 끝이 없지요. 현재 전 세계에 몇 명의 시인이 있을까요. 고대부터 지금까지 몇 명의 시인들이 지나갔을까요.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시인이 태어날까요. 무한히 흐르는 시의 강물을 상상해 봅시다. 그 강물을 멀찍이서 바라 봅시다. 그러면 좀 보일지도 모르겠어요. 그 무한한 시도 어쩌면 고작해야 “그냥 한 편”일 뿐인 게 아닐까요.

“천 편이 그냥 한 편이 되어버리는 시!” 그 시는 정말이지 대단하겠지만, 「사이키델릭」은 그런 시를 꿈꾸지 않아요. 이 시의 진정한 매력은 이 ‘완전성’을 긍정하는 게 아니라, 그걸 “찢어버리게 하는 게 더 / 사이키델릭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천수천안의 손에 시를 쥐여주고 그냥 냅다 찢어버리게 하는 겁니다. “천 편의 시가 한 번에 찢어지는 소리”는 얼마나 호쾌할까요. “마른 종이에 날벼락” 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요. 시 따위가 뭐라고, 그게 얼마나 대단하다고 천수천안까지 필요할까요. 그저 “웃는 소리만은 나랑 같”을 것입니다. 해탈(완성)도 무한도 나와 같습니다. 인류 전체가 써 나아가는 시의 강물도, 내가 참여하고 있는 작은 한 편의 시도, 그저 “하나의 웃음소리”인지 몰라요. 완성을 철저히 부수는 호쾌한 태도. 1000개의 손을 넘어서는 1001개의 손. 시인은 어쩌면 한 편을 쓰는(완성하는) 자가 아니라, 계속해서 찢는 자가 아닌가 싶어요.


인생의 절반을 침대에서 보낸 당신의 어머니처럼 나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 늘 병약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절에서 살았는데, 거기에서는 매일 아침 다섯 시면 벌써 절의 주지 스님인 아버지가 제자승들과 함께 올리는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혼자서 나무 밑에 앉아 소설을 읽고 있는데 절에 온 대학생이 와서 늘 그렇게 두꺼운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자기는 책을 읽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할 일이 없고 그래서 죽을 때까지도 다 못 읽는 긴 소설을 제일 좋아한다고 바로 답했다.

그 학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모스크바의 어떤 도서관에 가면 소설책이 하나 있는데 너무나 길어서 평생 걸려도 절대로 끝까지 다 못 읽는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길뿐만 아니라 수수께끼 같고 시베리아의 숲처럼 지혜가 많아서 사람들은 한 번 이 소설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전부 길을 잃고 다시는 결코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모스크바는 붉은 광장이 아니라 도서관이 중심이 되어 어머니에게 꿈의 도시가 되었다.  


- 다와다 요코, 최윤영 옮김, 『영혼 없는 작가』 을유문화사 중에서


여기 누군가의 마음 안에 “꿈의 도시”가 생겨납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살아야 했던, 병약하고 어린 소녀입니다. 이 아이는 소외를 견디기 위해 기나긴 소설을 좋아하게 됩니다.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아이는 시간을 견뎌냅니다. 그런 와중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모스크바의 어떤 도서관에 가면” 절대로 끝나지 않는 소설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수께끼 같고 시베리아의 숲처럼 지혜가 많아서” 읽게 되면 “전부 길을 잃”게 된다는 이야기.

이것은 ‘한 권’의 책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인류가 쌓아온 긴 이야기, 즉 ‘도서관’에 관한 은유인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도서관은 얼마나 무한한 개념입니까. 언제나 장서가 추가되고 갱신되는 곳. 대여와 반납이, 분실과 추가가 동시에 일어나는 곳. 도서관에는 끝이 없고 한계가 없습니다. 인류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없이 탄생하고 끝없이 잊히거나 사멸합니다.

또한 정반대로 이 이야기 속에서 언급되는 “소설책”은 어쩌면 소설책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가장 짧은 책에 관한 반어인지도 모릅니다. 맞아요. 그 책은 바로 시집입니다. 가장 짧지만 언제나 “수수께끼”이며, “시베리아 숲”처럼 광활해서 길을 잃는 곳. 시는 언제나 외국어이며 이동하는 말이며 삶을 배신하고 초과하는 새-말입니다. 얼마 전 너무나도 아름다운 시집이 태어났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시집을 펼쳤습니다. 이 시집을 펼치면 가장 맨 앞에서부터 “입국 심사”가 시작되는데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함께 보면서 우리 잠시라도 각자의 국적을 잊은 채 ‘시 쓰기’에 관해서 생각해 볼까요.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

살아가며 했던 모든 말이 적힌 책을 찢어 파쇄기에 넣는다. 나풀나풀 얇은 가루가 된 종이를 뭉쳐 날개를 만든다. 날개를 달면 거기 적혔던 모든 말을 잊어버린다. 
날고 싶은 방향으로 날아간다.


그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 사람들은 천사를 보았다 말하겠지만
천국의 주민들은 천사라는 단어를 모른다. 
그것은 깃털의 일부가 되었을 따름이고 다른 단어와 같은 무게를 지녔다.

때로는 아무것도 버릴 게 없는 경우도 있다. 가진 게 없거나 이미 버리고 온 사람들. 
울지 않는 아기. 비쩍 마른 노인. 머리가 산발이 된 여자.
버릴 게 생기면 다시 오세요.
천국은 그들의 머리를 떼어 지상으로 힘껏 던진다.


비가 오려나.
어떤 사람이 물방울을 맞았다.
그날 비는 오지 않는다. 그래서 한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


물방울을 맞은 사람이 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오늘의 구름은 양떼구름
외국에서는 물고기의 비늘이라고 부른다.


그래, 천국에서는 하늘과 초원과 바다가 섞여 있지만
그래도 양과 물고기는 있다.

양몰이 개와 그물은 없다.

- 차도하, 「입국 심사」 전문 (『미래의 손』, 봄날의 책)


외국(外國)이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쓸쓸합니다. 안과 밖이 동시에 느껴지는 말. 이 말은 묘한 모험심과 기대를 자극하기도 하지만 강렬한 소외감과 한계를 절감하게도 합니다. 저는 시집을 펼치면 항상 그런 기묘하고도 쓸쓸한 느낌을 받아요. 시 속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격차가 큰 것이, 너무나도 좋고 동시에 가슴 아파요. 때때로 시집을 읽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나게 됐을 때, 저는 잠시 숨을 고르고 시집에서 눈을 뗍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일부러 지연시킵니다. 창밖이나 토익 공부하는 사람들을 멍하게 봐요. 이처럼 아름답고 눈부신 세계가 펼쳐져 있는데! 내 양 손바닥 사이에서 일어서고 있는데! 세상은 너무나 멀쩡히 돌아가고 벚나무는 흔들리고 도서관은 지우개 하나 꼼짝하지 않고. 그 격차가 눈부시게 아름다워요. 『미래의 손』을 펼치면 그런 세계가 열려요. 시인은 「입국 심사」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과연 천국에 당도할 수 있을까요.

이 시에서 시인이 꿈꾸는 천국은 마치 언어를 초월한 곳처럼 보입니다. 우선 입국하려면 나와 가장 가까웠던 것, 친숙했던 개념을 버려야 합니다. 모국-엄마-마음-맘마. 이 모든 ‘미음’들. 나의 탄생과 함께 발생한 친연의 존재들이죠. 실제로 마[ma] 소리는 입술을 붙였다가 떼기만 하면 바로 발산되는 소리(양순음)라서 조음하기에 쉬운 소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엄마’라는 말에는 [m] 음가가 많아요. mother(영어), mama(스와힐리어), Mæ(태국어) me(베트남어) muter(이디시어) 같은 말들요. 시인은 그것을 버려야 한 대요. 최초의 타자(엄마)이자, 최초의 음식(맘마)이자, 최초의 나 자신(맘-마음)인 것. 이것들을 버려야 입국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시인이 계셨죠. 모든 걸 버리고 독일로 훌쩍 떠나간 시인.


두 권의 시집을 내고 한창 주목받을 즈음, 돌연 독일로 떠났잖아. 어떤 특별한 계기 같은 것이 있었어? 

“처음에는 그냥 막연히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왜 떠났는지 사유하게 되더라. 그때는 잘 몰랐지. 나중에 곰곰 생각해보니, 인간의 형식이 바뀌어야 시에서도 새로운 형식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더라고. 나한테는 그게 모국어로부터 한없이 낯설어지는 일이었고.” 

낯설어지면서 갱신되는 어떤 것을 생각하니 근사하다. 

“모국어뿐만 아니라 모국적인 모든 상황에서 낯설어지게 될 때, 어떻게든 새로운 형식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지.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새로운 예술형식은 한 인간의 형식이 변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거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형식이 낡아졌다고 느끼면, 의식적으로 그것을 갱신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때가 닥쳤을 때, 나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거고.” 

결국 누나만의 시를 발견하기 위해, 누나만의 시를 쓰기 위해 떠난 셈이네. 

“한 사람의 재능은, 슬프게도 그것을 가진 사람이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야. 그걸 잘 모르니 우리는 참, 우릴 쉽게 쓰는 것 같아. 나는 시라는 문명의 한 장르에 목숨을 건 대목이 있어. 그래서 떠났지. 정처 없어졌지. 그래서인지 인생의 어떤 순간을 시에 거는 사람을 보면 좋으면서도 쓸쓸하다.”  


- 오은, 『초록을 입고』 난다 중에서


“인생의 어떤 순간을 시에 거는 사람”은 참 눈부십니다. 그래서 차도하 시인의 저 말도 참 찬란합니다. “살아가며 했던 모든 말이 적힌 책을 찢어 파쇄기에 넣는다.” 이 고요한 선언은 기꺼이 자신의 역사를 지우고, 불편한(무한한) 곳으로 자신의 날개를 펼치는 것이죠. 먹는 것, 보는 것, 구분하고 느끼는 것, 사는 것, 말하는 것 모든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이 모든 포기의 양태는 ‘종이로 만든 날개’를 달고 “천국” 혹은 “외국”으로 가기 위함이죠. 그런데 하필 날개가 종이로 만들어진 날개라니. 저는 왜 이 점이 불안하고 위태롭게 느껴질까요. 그런데도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는 “날고 싶은 방향으로 날아간다.”

그래서 이런 구절이 참으로 아프게 다가와요. 우리가 날고 싶은 곳으로 날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버려야 했는지 이미 1연에서 충분히 봤었거든요. 그렇다면 시인이 상상하는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천국은 모국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하늘에 어떤 문양의 구름이 있는데 그것을 어떤 곳에서는 “양떼 구름”이라고 하지만 또 다른 곳(외국)에서는 “물고기의 비늘”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구름을 어떤 곳에서는 초원의 이미지(양떼)로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바다의 이미지(물고기이 비늘)로 바라보는 것이죠. 독일어와 한국어가 너무나 다르듯, 우리는 그렇게 각기 다른 언어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천국은 이것을 통합해냅니다. 구획과 분절을 통합합니다. 도하 시인이 그리고 있는 천국은 바로 그런 곳이에요. 언어를 거두고 존재가 그저 날아다니는 곳. “천사”라는 말조차 없는 어떤 곳. 거기에는 초원과 바다가 동시에 있고, 양과 물고기가 동시에 존재하지요. 그런데 그걸 폭력적으로 휘어잡는 고정점(“양몰이 개와 그물”)은 가차 없이 없다고 선언되는 곳.

인간이 그런 언어를 쓸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지시되는데, 그것을 틀에 가두지는 않을 수 있는 걸까요. 이것은 사실 시 쓰기의 욕망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실 모든 시인은 시를 쓸 때 두 가지의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듯합니다. 첫째, 1000일을 온전하게 채우는 것. 완전한 시 한 편(천국)을 내 앞에 도래시키는 것. 둘째, 동시에 그 천국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것. 1001일이라고 말하거나, “양몰이 개와 그물”이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한계를 빚는 완성(무한)마저 부정하는 것.

사실 (언어로) 천국을 도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죠. 동시에 천국을 완전히 부정하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시인은 이런 불가능 앞에 선 언어적-촛불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두 사람의 말은 정확히 일치합니다. 저는 이런 말들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 차도하, 「입국 심사」

허수경에게 시란 무엇인지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허수경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시란,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삶의 내용이지. 시인은 탄생과 탄생을 거듭하다가 어느 날 폭발해버리는 존재고.”


- 오은, 『초록을 입고』 난다 중에서


우리의 입술은 얇습니다. 초라합니다.

우리는 덧없고 작고 쓸쓸합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언제나 순간적입니다.

‘사랑’이라는 말도 어쩌면 백 년 뒤에는 흩어져 버릴 ‘소리-덩어리’일 뿐인지 몰라요.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결코 무(無)에 귀속될 수 없는
실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가장 이상한 세 단어」 전문 (『끝과 시작』, 문학과 지성사)


맞아요. 쉼보르스카의 말처럼, 우리의 말은 미끄러지고 부족합니다. 그 무엇도 붙잡을 수 없고 점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이렇게 시를 쓰고, 불굴하며, 이렇게 말해냅니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 많이 쓸 것이다.” 시인은 “어느 날 폭발해버리는 존재”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간다는 것이리라. 생각하는 것의 끝에까지 간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너머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적인 삶은 없다. 게다가 지금 인간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항상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극도로 비정한 삶을 인간의 운명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시는, 패배를 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정황에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시의 행복이며 윤리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 이 행복과 윤리가 너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 황현산, 「말라르메의 언어와 시」 중에서 (스테판 말라르메, 황현산 옮김, 『시집』, 문학과 지성사)


1000일의 밤이든, 1001일의 밤이든. 우리는 무한(無限)이라는 개념 앞에 무릎 꿇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두두』라는 아주 조그마한, 티끌처럼 얇고 (빛나는) 시집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이 시집은, 많이 편찮으셨던 오규원 시인의 마지막 시집이기도 한데요. 시가 아닌 ‘시인의 말’을 읽어드림으로써 마지막 인사를 건네면 어떨까 해요. 이 시집을 펼치면 다음과 같은 시인의 말이 쓰여 있는데요. 이 글은 시인이 작고하기 전에 썼던 마지막 시입니다. 2007년 병원에서 잠시 병세가 호전된 1월 20일에, 오규원 시인이 제자 시인의 손바닥에 쓴 시입니다. 우선 앞부분을 한번 살펴볼까요.


시인의 말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어떤 사람이 이제 생의 끝을 앞두고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한이지요. 1000일이지요. “한적한” 동시에 생생하게 “불타는” 실존이지요. 그런데 다음날 21일 오후에 시인은 깨어나 한 행의 시를 더 추가합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한 행을 끝으로 열흘 뒤 시인은 작고합니다. (이창기, 「나무와 그림자―시인 오규원 선생님을 추모하며」, 『문학과사회』 2007년 봄호)


시인의 말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2007. 1. 21 오규원


결국 이 시는 3행짜리 시에서 (제자들에 의해) 4행짜리 시로 나아갑니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이 짧은 한 행이, 1000일의 밤 위에 더해집니다. 무한한 밤에 하룻밤을 더해보는 것. 하나의 삶에 하나의 행을 덧대보는 것. 끝까지 완성되지 않을 것이지만, 시인들은 끝까지 도전할 것입니다. 그 용기를 잃지 않게 많이들 시를 읽어주세요. 시를 사랑해주세요. 응원해주세요. 만져주세요. 마지막 문장은 진실한 문장을 들려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옮깁니다. 모두들 건강하셔요. 안녕. 안녕. 사랑으로 읽고 쓰셔요.


“남아 있고 싶다 이 도서관이 철거되는 날에도 이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을 것이다 나는” 


- 차도하, 「독서 유예」 중에서, (『미래의 손』, 봄날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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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명재(시인)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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