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 칼럼] 깊고 오래된 숲

김지연의 그림의 등을 쓰다듬기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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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멀리 돌아올수록 좋다. 늘어난 발자국의 숫자는 작품의 두께를 더한다. 한 사람이 지어낸 삶이, 작품과 함께 거기 있다. (2023.11.29)


예술과와 관객을 잇는 현대미술 비평가 김지연 작가의 에세이.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오랜만이에요.” 그림 앞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도 없는 전시장에서 누군가를 만난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끼던 중 가벽 뒤에서 그림과 꼭 닮은 사람이 해사하게 웃으며 나타났다. 대학 졸업 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건 십 년도 더 된 일이었다.

우리는 같은 과 동기로 함께 미술 이론을 공부했고, 언니는 회화를 복수 전공했다. 게임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몇 년 전 다시 작업을 시작한 그는 사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동안 흘렀던 그의 시간이 그림 속에 살아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그가 돌아온 길을 알 것만 같았다. 전시장의 흰 벽에 마침내 도착한 그의 흔적에서 오래된 숲의 향이 느껴졌다.

맑은 얼굴을 가진 나무의 정령들이 봄의 소식을 듣고 깨어나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로 뒤엉킨 채 함께 바람을 맞으며 웅성거렸다. 굽이굽이 마디가 꺾이는 선이 화면에 끈적하게 달라붙었고, 짧게 끊기는 힘찬 붓질이 곧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절대적 시간이 있어야만 가질 수 있는 숲의 빛깔과 밀도가 천천히, 그러나 거부할 수 없게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림에서 다음 그림으로 옮기는 시간이 길어졌다. 진득함과 산뜻함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단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니는 게임 캐릭터를 그리던 버릇 탓인지, 자기 그림에 등장하는 정령들이 경망스럽다며  웃었다. 하지만 무게를 더하는 것보다 덜어내는 일에 더 내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상기된 볼로 가볍게 웃는 이 질긴 생명의 얼굴들이 좋았다. 붓질의 방향과 글의 행간에서 헤매 본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삶의 모퉁이를 돌며 무릎이 꺾일 때마다, 다시 털고 일어나 앞을 바라보며 걸어온 시간이 보였다. 식물의 마디에 성장의 순간이 담겨 있듯, 붓질이 꺾인 마디마다 풀썩 내려앉은 마음과 잠시 숨고르는 시간, 다시 일어나 걷는 용기가 고루 담겨 있었다. 모퉁이를 여러 번 돌아온 사람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안다. 자주 무릎이 꺾였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장면이라는 것을.

그림 앞에서 다시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까지 흘러온 마음의 모양을 짐작할 수 있다고. 우리 여기에서 이렇게 만나려고 많이 헤맨 것 같다고. 숲의 기운과 함께 그의 시간도 내게 밀려왔다. 오랜만에 함께 저녁을 먹으며 실패와 죽음과 기다림에 관한 많은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그림을 먼저 보았기 때문인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의 주석처럼 느껴졌다.


최성임 <아주 오래된 나무>_철제 프레임, 스테인리스 스틸, 플라스틱공, PE망, 실_가변크기 2023 ⓒsungim choi

한참을 돌고 돌아서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지난가을 서교동의 어느 골목에도 그런 오래된 숲이 있었다. 주택을 개조한 전시장의 마당에 들어서자 붉은색 폭포가 쏟아졌다. 그물망 안에 플라스틱 공을 촘촘히 담아 만든 설치물은 3층 옥상에서부터 마당까지 기다랗게 늘어져 있었다. 마치 숲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아 온 나무의 뿌리 같았다. <아주 오래된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작품이었다.

나무의 뿌리를 지나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수천 개의 황금색 와이어 끈을 엮어서 만든 이불, 노안으로 흐려진 시야를 표현한 수만 장의 드로잉처럼 규모나 수량 면에서 관객을 압도하는 작품들이 연이어 보였다. 또한 소리가 들렸다. 끈을 엮거나 구슬을 꿰는 행위를 반복하는 동안 작업실에서 수집한 소리, 아니 지난하게 쌓아온 시간의 증거였다.

작가는 자신을 12인분의 밥을 하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결혼한 뒤 네 아이를 낳고 살림을 하는 과정은 작업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수만 개 단위의 유닛을 만들어도 지치지 않는 동력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집 안을 돌아다니는 십 수 개의 발, 아이들과 부대낀 살갗, 타인을 돌보며 틈틈이 구슬과 와이어를 엮는 시간 등 작가가 직접 겪어낸 몸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작품이 되었다. 하나의 몸이 통과한 시간은 에너지로 전환되어 이곳에서 뜨겁게 쏟아졌다.

제주도 중산간의 깊은 숲을 걷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곶자왈에는 옹이가 박힌 나무, 무성한 수풀, 땅 위로 드러난 뿌리, 붉은 흙과 검은 돌이 얽히고 설켜 있었다. 높이 솟아 햇빛을 그대로 받아내는 삼나무부터, 빛이 들지 않는 그늘에 자라는 고사리와 이끼, 그 사이를 차례로 채우는 산딸나무와 쥐똥나무, 때죽나무까지, 모든 것이 살아 숨쉬는 곳이었다. 도심의 아파트 단지나 공원에 옮겨 심은 아름다운 수형의 나무와는 달랐다. 오래된 나무들을 품은 숲은 긴 시간을 통과하며 자기만의 모습을 만들고 있었다.


김여진 <뿌리가 되려는 손>_Oil on canvas_145.5*112.1(cm)_2021

작가의 삶은 필연적으로 작품에 드러난다. 작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작품 세계를 쌓는 재료가 된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통과한 사람이 만든 작품 속에는 그동안 걸어온 발자국의 숫자가 어김없이 드러난다. 때로는 멀리 돌아올수록 좋다. 늘어난 발자국의 숫자는 작품의 두께를 더한다. 한 사람이 지어낸 삶이, 작품과 함께 거기 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예술의 경험이며 작업의 과정이라고 누가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봄의 전시장에서 언니가 그린 그림들을 둘러보다가 한 그림 앞에 멈추어 섰다. 수많은 나뭇가지 다발이 정령의 가슴을 관통하고 있었다. 가슴을 뚫은 뾰족한 가지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숲의 정령은 맑고 산뜻한 표정을 지었다. <많은 일을 겪은 사람>이라는 제목을 가진 그림은, 그린 사람과 닮아 있었다.


김여진 <많은 일을 겪은 사람>_Oil on linen_77*65(cm)_2021

삶의 어떤 경험들은 우리를 사정없이 관통한다. 아프게 가슴을 찌르는 것을 견디고, 온몸을 후벼파는 것들을 온전히 받아낸 뒤에도 여전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을 때, 좌절이나 상처까지도 삶의 유일함을 만드는 마디나 옹이가 된다. 그리고 작가의 손은 이렇게 아름다운 밀도를 만들어낸다. 커다란 캔버스 위를 힘차게 지나간 붓질의 흔적을 딛고 숲의 정령들이 가볍게 웃는다. 작은 시간들이 꿰어낸 수천수만 단위의 유닛들이 모여 커다란 집을 휘감을 정도로 폭발하는 에너지를 생성한다.

모퉁이를 돌고 돌아 무릎이 꺾이고 다시 일어나는 시간 동안 마디와 옹이를 만들며 오랫동안 기른 나무가 있다. 그 나무를 베어 품이 넓은 집을 짓는다. 그곳에서는 봄이 오면 새순이 돋고 여름이 오면 잎이 무성해지며 초록의 냄새가 짙어진다. 지나온 시간을 되짚는 손이 뿌리가 되고, 내일을 향하는 손은 멀리 뻗어나가는 가지가 된다. 작품의 앞에 서면, 시간을 통과해야만 품을 수 있는 넓고 깊은 숲이 밀려온다. 가지와 줄기와 뿌리가 부지런히 부대끼며 만들어낸 마찰열과 그늘에서도 무성하게 자라난 이끼의 냄새가 가득한 숲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예술은 끈질기게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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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연(미술비평가)

미술비평가. 예술과 도시, 사람의 마음을 관찰하며 목격한 아름다운 장면의 다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현대미술과 도시문화에 관한 글을 다수 매체에 기고하며, 대학과 기관, 문화 공간 등에서 글쓰기와 현대미술 강의를 한다. 비평지 <크리티크 M>의 편집위원이며, 예술 감상 워크샵, 라디오 방송 등 예술과 사람을 잇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쓴 책으로 『당신을 보면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2023), 『필연으로 향하는 우연』(2023), 『반짝이는 어떤 것』(2022), 『보통의 감상』(2020), 『마리나의 눈』(202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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