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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지의 제철숙제] 여름 더위를 식히는 여덟 가지 방법
7화 : 대서엔 복달임이 제철
자연에 순응하며 때를 기다리면 곧 더위가 물러가고 시원한 계절이 오리라는 걸 알았던 조상들은 예로부터 삼복을 쉬어가는 날로 삼았다. 초복, 중복, 말복은 긴 여름을 지나는 동안 멈추었다 가는 세 번의 정거장인 셈이다. (2023.07.25)
제철에 진심인 사람이 보내는 숙제 알림장.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요, 제철에 있습니다. 제철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중에 말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을 절기마다 소개합니다. |
매미 소리가 요란해질 무렵이면 대서다. 장마철 빽빽한 빗소리에 가려졌던 매미 울음소리가 창을 넘어 들어오고 열대야 예보가 시시때때로 흘러나오며 담벼락 아래로 능소화가 툭툭 떨어지는 계절. 열두 번째 절기이자 여름의 마지막 절기인 '대서(大暑)'는 큰 더위라는 이름 그대로 무더위가 절정에 이르는 때다. 한낮의 뙤약볕은 거대한 돋보기를 통과한 빛처럼 뜨거워서 나무 벤치에서, 정류장 지붕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다. 더위에 '염소 뿔도 녹는다'는 속담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님을 실감하게 되는 날씨다.
여름이 가장 미움을 받는 것도 아마 이 무렵일 것이다. 불볕더위와 습도는 사람을 쉬이 지치게 만들고, 다들 서늘한 계절을 그리워하며 여름이 싫다는 말을 무시로 내놓는다. 나는 여름에 귀라도 달린 것처럼 그런 말 앞에서 괜히 움찔한다. 더위가 정점에 이르렀다는 건 앞으로 차차 식어갈 일만 남았다는 것. 대서 무렵이면 자전거 페달을 힘겹게 밟아 여름 언덕의 꼭대기에 오른 기분이다. 매년 겪으면서도 그 자리에 올라서야 '아, 맞아, 여름이란 이런 거였지' 한다. 이제 바람을 가르며 언덕을 내려갈 일만 남았고 그 아래엔 마중 나온 가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이 언덕 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 여름 안에만 있는 것들을 자꾸 돌아보게 된다. 더위에 지치는 것도 여름이어서 가능한 일. 한겨울의 혹한 속에서는 어쩌면 그리워할지 모를 순간.
24절기에 속하지는 않지만 이 무렵은 삼복(三伏) 때이기도 하다. 삼복은 일종의 중국식 절기로, 진나라에서 유래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던 시절 여름을 나는 일이 얼마나 고되었는지는 "삼복지간(三伏之間)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속담에서 느껴진다. 더위에 몸의 기운이 쉽게 약해지니, 입술에 붙은 조그만 밥알도 무겁게 느껴질 만큼 한여름엔 사소한 일도 힘겨워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더위를 어떻게 이겨냈을까. 이겨내려 하지 않았던 게 조상들의 지혜다. 복날의 '복(伏)'자는 엎드린다는 뜻. 무더위를 두려워하며 세 번 엎드리고 나면 여름이 지나간다는 말로 읽힌다. 자연에 순응하며 때를 기다리면 곧 더위가 물러가고 시원한 계절이 오리라는 걸 알았던 조상들은 예로부터 삼복을 쉬어가는 날로 삼았다. 초복, 중복, 말복은 긴 여름을 지나는 동안 멈추었다 가는 세 번의 정거장인 셈이다. 복날에는 더위를 피해 물가나 숲을 찾아 기력을 보충하는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복달임 한다"라고 했다. 뙤약볕 아래 농사일을 계속해서는 몸을 해치기 십상이므로, 아무리 바빠도 복날 하루쯤은 시간을 내어 미리 장만한 술과 음식을 들고 계곡을 찾아가 놀았던 것이다. 복날은 농부들에게 더위를 피해 쉴 고마운 명분이 되어주었다. 하루짜리 여름 방학처럼.
'피서를 핑계로 마련한 술자리'를 뜻하는 '하삭음(河朔飮)'도 복달임 중 하나이다. 후한 말, 유송(劉松)이 삼복더위를 피해 하삭(중국 황하 북쪽 지방)에서 밤낮으로 술을 마셨던 고사에서 유래했다는데, 술 마실 핑계를 지어내는 애주가의 역사는 이리도 길구나 싶어 웃음이 샌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시원한 계곡에 모여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더위를 잊는 하삭음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이때 애용된 술잔 중 하나가 연잎이었다. 연잎에 술을 담고 비녀로 잎을 찔러 구멍을 낸 다음 줄기를 통해 흐르는 술을 마시면 연꽃 향기가 스미고 술이 차가워져 좋았다고. 풍류에 이토록 진심일 수가 있다니...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20대에 처음 취직을 하고 여름휴가를 썼을 땐, 왜 이 무렵이 휴가철이 돼야 하는지 의아했다. 선선한 바람 부는 좋은 계절 다 놔두고 어째서 일 년 중 무더위가 가장 기승을 부릴 때를 휴가철로 정해둔 걸까. 이제는 안다. 그건 마땅히 쉬어야 할 때 쉬어갈 명분을 주는 일임을.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복달임의 민족이자 하삭음의 민족인 것이다. 여름 아래서, 나는 기왕이면 잘 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게 휴식의 태도를 자연스레 알려주었던 건 고향마을의 농부들이었다. 그 이야기를 언젠가 글로 풀어 쓴 적 있다.
열아홉 살까지 살았던 시골 마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야말로 정말 중요했다. 여름이면 해가 높이 뜨기 전인 아침과 맹렬한 더위가 좀 수그러든 저녁에만 들판에 나가 일을 하고, 쨍쨍한 한낮에는 모두가 쉬었다. 그래야 무사히 기운을 회복해서 진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럴 때 나무 그늘에서 쉬는 사람에게 누구도 게으르다고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낮에 조금 더 일을 해놓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이 있으면 나서서 말렸다. 그러다 큰일 난다고. 괜한 욕심 부리지 말라고.
여름은 휴식의 자세를 익히기에 좋은 계절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이 쓴 글 중에 '소서팔사(消署八事)' 즉, 더위를 식히는 여덟 가지 방법에 대한 글이 있다. 한여름 무더위가 시작되면, 시원한 물을 한 모금씩 마시듯 이 글을 읽어본다.
1. 소나무 숲에서 활쏘기 2.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네 타기 3. 넓은 정자에서 투호하기 4. 대자리 깔고 바둑 두기 5. 서쪽 연못에서 연꽃 구경하기 6. 동쪽 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 7. 비 오는 날 시 짓기 8. 달밤에 개울가에서 발 담그기 |
시대는 달라졌지만 읽다보면 땀이 식으며 바람 한 줄기가 스치는 기분이다. 자연스레 나만의 목록도 적어보고 싶어진다. 평상에 누워 여름 밤하늘 보기,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을 찾아 책 읽기, 한낮에 시원하게 얼린 잔에 맥주 마시기, 계곡물에 발 담그고 수박 먹기... 여덟 가지 목록을 보태고 지우고 새로 쓰는 동안 여름은 깊어갈 것이다. 여름이 이토록 더운 것은 우리에게 쉬어갈 명분을 만들어주려고. 무엇보다 죄책감 없이 쉬는 방법을 천천히 배워가라고.
휴식이란 스스로에게 쉼을 허락하는 일이라는 것. 그러니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휴식이 아니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것이 휴식이다.
_우지현, 『풍덩!』 p.236
대서 무렵의 제철 숙제 더위를 식힐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여덟 가지만 찾아서 적어보세요. 그 목록을 하나씩 실천하며 휴식의 자세를 취해보는 거예요. 복달임과 하삭음도 빼놓지 마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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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현> 저17,82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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