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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지의 제철숙제] 비가 오면 달려가고 싶은 곳이 있나요?
6화 : 소서엔 비 명당이 제철
비 오는 날에만 잠시 열렸다 닫히는 풍경이 있다. 그 풍경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빗소리는 반가운 노크일 것이다. 창밖으로 희우, 기쁜 비가 온다. (2023.07.04)
제철에 진심인 사람이 보내는 숙제 알림장.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요, 제철에 있습니다. 제철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중에 말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을 절기마다 소개합니다. |
학창 시절 한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명이 있으면 대체로 키를 견주어 나눠 부르곤 했다. '작은 신지', '큰 신지' 그렇게. 지금 생각하면 참 부르는 사람만 편하려고 고민도 없이 그랬구나 싶지만, '소서'와 '대서' 앞에선 어쩐지 그때로 돌아가게 된다. 작은 더위 '소서(小暑)' 뒤에 오는 큰 더위 '대서(小暑)'. 소서야, 부르면 비 내리는 운동장을 바라보기 좋아하는 안경 쓴 친구가 나를 돌아보는 것 같고, 대서야, 부르면 가방을 비뚤게 메고 우리 야자 째자, 말하는 결단력 있는 친구가 뜨거운 손으로 팔을 붙잡는 것 같다.
오늘은 그중 소서 이야기. 버스를 타고 지나치는 정류장 곳곳에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능소화가 보일 무렵이면 소서다. 올해 첫 능소화를 목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마가 시작된다. 시골에 있는 부모는 장대비가 내리는 날이면 논둑 밭둑을 정비하느라 장화를 신고 집을 나설 것이다. 비 한 번 오고 나면 풀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랄 때라 김매기에 바쁘기도 하겠지. 소서와 대서 사이, 장마가 만들어내는 풍경 아래서 저마다 다르게 비를 만난다.
얼마 전에는 중고 거래를 할 일이 있었는데, 거래 당일 판매자인 아주머니가 뜬금없이 자신이 지금 절에 있다며 위치를 알려왔다. 다행히 내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절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 '무슨 중고 거래를 절에서 해'라는 표정의 강을 데리고 절에 갔다. 주차장에서 접선해 거래를 마치고 나니, 그냥 돌아가긴 아쉬워 우중 산책을 나섰다. 비에 젖은 숲을 한참 걷다가 경내 처마 아래로 들어서자, 절에서 돌보는 백구 한 마리가 의젓한 뒷모습으로 '비멍'을 하고 있었다. 그 곁에 좀 떨어져 앉아서 우리도 비멍을 했다. 바람결에 실려오는 향냄새를 맡으며 끊겼다가 이어졌다가 하는 개구리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처마 아래 만들어진 물웅덩이의 행렬에 닿았다. 말없이 빗방울이 그리는 동심원을 바라보는데, 한동안 꾹꾹 뭉쳐 있던 마음이 산안개처럼 풀려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 처마 있는 집에 살면 좋겠다."
"나중에 집 짓게 되면 꼭 처마랑 툇마루 있는 공간 만들자."
"비 오는 날마다 이렇게 비멍도 하고."
그러니까 그건 꼭 '처마' 끝에서 떨어진 빗물이 만들어낸 웅덩이여야 했다. 기와지붕 골을 따라 모인 빗물이 처마 아래로 낙하하며 땅에 새긴 무수한 원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분명 우리말에 이 빗물 웅덩이를 뜻하는 표현이 있을 것 같아, 한참을 검색해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풍류를 아는 선조들이 이 자국을 그냥 지나쳤을 리 없는데.(제보를 기다립니다)
처음 내게 빗물 웅덩이의 존재를 알려준 이가 있다. 책 『궁궐 걷는 법』을 쓴 이시우 작가다. 그는 서울의 다섯 궁궐을 매달 다른 주제로 산책하는 '궁궐을 걷는 시간'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도 한데, 작년 이맘때쯤 지인 찬스로 함께 창덕궁을 걸은 적 있다. 여름이 시작된 창덕궁은 눈 닿는 곳마다 푸르렀다. 우리는 이마 위로 손차양을 만들며 궁궐을 천천히 거닐었다. 『궁궐 걷는 법』의 서문에는 그가 창덕궁에서 빗물 웅덩이를 발견한 장면이 나온다.
"저의 시선은 성정각 동쪽 담장 아래 서 있는 살구나무 주변을 맴돌다 자연스럽게 발밑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아!' 하는 짧은 탄성이 나왔습니다. 성정각 기와지붕을 타고 떨어지던 빗물이 만든 웅덩이들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홈이 꽤 파여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어요. 빗방울은 연신 똑똑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중이었고요. 동시에 웅덩이 수면에 동그랗고 작은 물결도 생겼죠." _『궁궐 걷는 법』 중에서
해마다 궁궐을 드나들면서도 빗방울에 패여서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를 눈여겨 본 적은 없었다. 한번 알아보기 시작하니까 계속 보였다. 처마 아래,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그곳에, 비 오는 날이면 다시 차오를 작디작은 호수가 조로록조로록 모여 있었다. 낙선재 담장 아래서 어김없이 웅덩이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고 있는 내게 그가 마지막 코스로 '비 오는 날의 명당'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우리가 나란히 선 곳은 서문에 나온 그 장소, 성정각에 딸려 있는 누각 '희우루' 현판 아래였다. 비를 피해 몸을 숨기기 딱 좋은 이곳에서 비 내리는 궁궐 풍경을 천천히 눈에 담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아름다운 숙제구나, 생각했다. 궁궐을 좋아해 근처에서 약속이 있으면 괜히 들러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다 나오기도, 눈 내린 날 먼길을 달려온 적도 있었지만, 비가 온다고 부러 찾은 적은 없었다. 비를 보면 떠오르는 나만의 장소가 있다는 것, 그것이 하물며 고궁 안에 있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이제 나는 비 내리는 날이면 희우루를 떠올린다. 기쁠 희(喜)에 비 우(雨),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누각. 극심한 가뭄으로 고생하던 해, 누각 중건 공사를 마친 날 반가운 비가 내리자 정조는 이 누각의 이름을 희우루라 짓고 그때의 마음을 글로 남겼다.
"마음이란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니 마음에만 새겨둔다면 자기 혼자만 그 기쁨을 즐기게 되고, 다른 사람과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큰 기쁨을 마음에 새겨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사물에다 새겨두고, 사물에다 새겨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마침내 정자에다 이름 지었으니 기쁨을 새겨두는 뜻이 큰 것이다." _『홍재전서』 중에서
어진 임금의 뜻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비 오는 날의 명당을 알려주는 마음도, 제철 숙제를 고심해 건네는 마음도 여기에 있다 말해도 되려나. 마음에만 새겨두면 혼자서만 그 기쁨을 즐기게 되니, 함께 기뻐하고자 이렇게 글로 새겨둔다. 바라건대 이번 장마는 부디 무사히 지나가기를, 지난해와 같은 큰 피해가 없기를. 그리하여 비의 계절을 지나는 저마다에게, 우중 산책을 나서서 숨어들고 싶은 장소가 하나씩 생기기를.
비 오는 날에만 잠시 열렸다 닫히는 풍경이 있다. 그 풍경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빗소리는 반가운 노크일 것이다. 창밖으로 희우, 기쁜 비가 온다.
소서 무렵의 제철 숙제 비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기 좋은 나만의 '비멍당'을 찾아보세요. 도서관 창가 자리, 통유리창이 있는 카페, 고궁 안의 정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숫가... '비 오는 날 가면 더 좋은 곳의 목록'을 갖고 사는 건 분명 구체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일 거예요. 그러다 어느 비 내리는 날 처마 아래 서게 되거든, 빗물이 만든 웅덩이의 행렬을 찾아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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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일상에 밑줄을 긋는 마음으로 자주 사진을 찍고 무언가를 적는다. 일상을 사랑하기 위해, 일을 더 잘하기 위해 기록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최선을 덜 하는 삶을 고민하는 사람. 이 정도면 됐지, 그럴 수 있어. 나에게도 남에게도 그런 말을 해 주려 노력한다. 너무 사소해서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좋아하는 게 취미다. 오늘을 잘 기억하면, 내일을 기대하고 싶어진다. 그런 마음으로 순간을 모은다. 언젠가 바닷가 근처 작은 숙소의 주인이 되는 게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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