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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새로운 2000년대에 : KISS OF LIFE
키스 오브 라이프, 매력적인 시작
폭발하던 90년대의 막연한 긍정도, 숫자 하나 바뀔 뿐인데, 마치 세상 모든 것이 끝장나고 새롭게 시작될 것만 같던 세기말의 뭉글뭉글한 이상한 기운도 어느 정도 잦아든 상태였다. 몇 년째 흥행 중인 Y2K 유행 속에서도 특별히 적극적으로 소환되지는 않았던 '그때'를 키스 오브 라이프가 수면 위로 정확하게 끌어 올린 것이다. (2023.07.19)
지난 7월 5일 데뷔한 4인조 여성 그룹 '키스 오브 라이프'에서 처음 공개된 멤버는 나띠였다. 어딘가 이름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맞다. 2015년 JYP 엔터테인먼트가 기획해 무려 트와이스를 배출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식스틴(SIXTEEN)'에서 최종 라운드까지 진출하며 깊은 인상을 남긴 바로 그 사람. '식스틴' 방영 당시 겨우 13살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아니 무언가를 시작하기조차 너무 어린 나이였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이후 솔로 명의의 싱글을 내거나 또 다른 아이돌 서바이벌 <아이돌 학교>에 출연하면서도 확실한 활동 방향을 잡지는 못하는 것 같던 그가 돌아온 것이었다. 놀라운 건, 그렇게 화려하다면 화려한 과거를 가진 나띠가 '키스 오브 라이프'의 이름 아래 완벽히 새로운 사람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데뷔 앨범으로는 이례적으로 멤버 전원의 솔로곡을 담고 있는 <KISS OF LIFE>는 노래뿐만이 아닌 서로 스토리가 이어지는 각 솔로곡의 뮤직비디오도 함께 공개했다. 이게 유효했다. 데뷔 그룹이라면 으레 공개하기 마련인 멤버별 이미지나 스토리 필름이 아닌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으로 온전히 완성한 솔로곡 뮤직비디오 네 편은 멤버들의 실력과 가상의 그룹 결성 스토리를 동시에 담아내며 기분 좋은 시너지 효과를 만들었다. 케이팝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나띠나 시대를 풍미한 가수 심신이 아버지로 (여자)아이들 미연의 솔로 앨범, 르세라핌의 <UNFORGIVEN>의 작사·작곡에 참여해 데뷔 전부터 유명세를 탄 메인 보컬 벨 등 그룹 외적으로 뽑아내려면 얼마든지 뽑아낼 이야깃거리가 있었지만, 이들에 대해 가장 '이야기하고 싶게' 만드는 건 '키스 오브 라이프' 이름으로 발표된 음악과 영상이었다.
더구나 그 음악과 영상들이 지향하는 바가 너무나도 명확했다. 때는 바야흐로 2000년대 초·중반. 폭발하던 90년대의 막연한 긍정도, 숫자 하나 바뀔 뿐인데, 마치 세상 모든 것이 끝장나고 새롭게 시작될 것만 같던 세기말의 뭉글뭉글한 이상한 기운도 어느 정도 잦아든 상태였다. 미국은 제니퍼 로페즈, 한국은 이효리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몇 년째 흥행 중인 Y2K 유행 속에서도 특별히 적극적으로 소환되지는 않았던 '그때'를 키스 오브 라이프가 수면 위로 정확하게 끌어 올린 것이다.
맨 처음 공개된 나띠의 솔로곡 'Sugarcoat'를 보자. 90년대를 호령했던 여성 그룹 'SWV'나 'TLC'로부터 왔음이 분명한 힙합 베이스의 고혹적인 R&B 선율 위로 나띠의 쫀쫀하고 가요적인 목소리가 흘러내린다. 그 시절 교포 R&B 원톱 애즈원(AS ONE)의 음악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뮤직비디오 내용은 또 어떤가. 거리에서 춤을 추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나띠가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전단지에 이끌려 오디션장의 문을 열고 힘차게 뛰어오르는 모습으로 영상은 마무리 된다. 2005년, 아르바이트를 하며 댄서의 꿈을 어렵게 키워나가는 주인공 이효리를 중심으로 7분이 넘는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애니모션' 광고가 필연적으로 떠오른다. 심지어 낮은 채도와 세피아 톤으로 누른 영상미마저 고증에 충실하다. 20여년 만에 만났지만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여전히 익숙하고 반가운 친구 그 자체다.
다른 멤버들의 솔로곡과 뮤직비디오도 마찬가지다. 퍼포먼스를 중시하는 케이팝의 특성에 천착한 과격한 댄스 팝이나 플레이리스트 친화적으로 살랑이는 노래들 가운데 키스 오브 라이프의 줏대는 더욱 빛난다. 2000년대 중반 한참 인기를 끈 록과 힙합을 기반에 둔 둔탁한 비트를 바탕으로 쥴리, 벨, 하늘이 각자의 꺾인 꿈과 새로운 출발을 노래하고 연기한다. 마음 둘 곳 없이 방황하던 청춘의 한가운데 피어난 사랑, 부모님의 기대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 느끼는 혼란, 현실과 가상 사이 벽을 깨고 우정과 사랑을 모두 쟁취하는 10대의 일상. 그렇게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 만나 자유롭게 뛰고 소리치며 같은 꿈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게 타이틀 곡 '쉿 (Shhh)'의 뮤직비디오와 그룹 키스 오브 라이프가 완성되었다. 실력과 허구, 새로움과 익숙함이 기분 좋게 호응한 매력적인 데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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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