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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우X정희원 칼럼] 눈앞에서 버스를 놓친 어느 날의 출근길

전현우X정희원의 거대도시에서 이동하기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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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온갖 수단을 바꿔 타면서 네댓 시간 동안 100km씩 움직이는 이 경험. 조금 길긴 하지만, 2023년 도시를 사는 모두의 경험과 통하는 경험이다. (2023.06.02)


기후 위기 시대, 도시의 이동을 탐구하는 교통, 철학 연구자 전현우와 
도시인의 이동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노년내과 의사 정희원의 크로스 에세이.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언스플래쉬

하루를 마무리하며 노트북을 연다. 오늘도 차 안에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는다. 오늘은 이동 시간만 5시간쯤 되는 것 같다. 수도권 밖으로 출장을 가지 않았던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경인선 급행열차, 시내버스, 도시철도, 광역버스, 걷기, 뛰기, 심지어 공유 자전거까지 온갖 탈것들이 오늘도 내 삶을 가로지른다. 

하루에도 온갖 수단을 바꿔 타면서 네댓 시간 동안 100km씩 움직이는 이 경험. 조금 길긴 하지만, 2023년 도시를 사는 모두의 경험과 통하는 경험이다. 새로운 사람과 만날 때, 이동보다 이야기하기 편한 주제는 없지 않던가? 여기까지 어떻게 이동해 왔냐는 질문에 누구나 자신이 방금까지 걸어온 대장정에 대해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조금 늦은 사람은 아마도 할 말이 더 많을 것이다. 그가 10분 늦은 건, 분명 이동 과정이 울퉁불퉁한 덕이었을 테니. 몇 마디 유도하면 그는 분명 자신의 이동을 망친 요인을 늘어놓고 한바탕 욕을 퍼부을 것이다. 편리하고 쾌적한 이동 경험은 도시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제아무리 고급 승용차라도 보장할 수 없는 일이다. 도시는 혼잡하고, 시끄럽고, 예측 불가능한 곳이니. 거대도시에서는 조용한 새벽을 달리는 도로조차 때로 밀리고, 정신 나간 것 같은 행동을 하는 주변 사람들이 길을 막거나 아예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자가용으로 전차를 몰고 다닌다고 해도 이런 일들을 막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기능 고장으로 전차가 멈춰서지나 않으면 다행일지 모른다.


하루를 열려면 열심히 달려야 한다

이런저런 몽상 속에 선 잠을 자고 일어난 날. 시립대에 회의가 잡힌 날이다. 인천에서 편도로 50km. 무슨 수를 써도 2시간이 걸리는 이 길에 나서기에 앞서 먼저 가져야 할 감정은 겸허함이다. 집 앞 정류장에서 20~25분 간격으로 오는 버스의 시간, 평시에 비슷한 간격으로 벌어지는 급행열차 시간을 맞추는 것부터가 문제이다. 샤워를 마치면 버스 시간부터 살핀다. 버스를 놓치면 20~30분이 날아간다. 다행히 오늘 버스는 15분 뒤에 온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내가 탈 버스는 대체로 15분 뒤에 온다면 10분 이내로 정류장에 들어온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생각할 겨를 따위는 없다. 그날 입어야 할 옷을 고르고, 지금 작업 중인 연구에 꼭 필요한 읽을거리를 기억해 내서 책과 논문 더미 사이에서 찾아내고, 펜 두어 자루나 그 외에 필요한 필수품을 챙기기에도 시간은 부족하다. 회의에 이어 오후에는 강연도 있다. 강사가 아무렇게나 나가면 안 되니 거울이라도 한 번 다시 들여다 본다. 아차, 오늘은 태양이 쏟아져내릴 것 같이 환하다. 선크림을 바르지 않고 아무렇게나 쏘다니면 피부가 벌겋게 익어 버린다. 어느 구석에서 크림을 찾아내 바르다 보니 진한 색 재킷에 크림이 주륵 흐른다... 손수건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일단 떠나지 않으면 30분이 사라진다.(꼭 이럴 때면 뒷 차는 (버스 앱 정보에 따르면) 41분 뒤에 도착한다!) 가방 속에 남은 불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체크할 시간 따위 없었던 덕에 결국 가방은 거대해져 있다. 현관을 나서며 어깨 끈을 당기지 않을 수 없다.

모퉁이를 돌며 내가 탈 버스 시간을 다시 확인해 본다. 3분 뒤 도착! 방법이 없다. 뛰어야 한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전력으로 뛴다. 다행히 주차장에 차가 많이 빠져서 대각선으로 질러 뛰었다. 아, 그렇지만 가로수 사이로 버스가 한 대 정차하는 것이 보인다. 타는 사람도 때마침 없는 듯하다. 부릉... 떠난다. 역으로 가는 다른 버스도 20분 뒤에 온다. 오늘도 시작을 망친 것 같다. 뭘 잘못했을지 생각하는 건 사치.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한다. 500m 떨어진 근처 사거리 정류장의 도착 정보를 뒤진다. 다행히 여기는 뛰어가면 겨우 탈 수 있을 것 같다. 벌써 땀범벅이 되지만 아침부터 택시 타고 탄소를 뿜으며 동네를 벗어날 수야 없다. 타야 할 버스가 저 멀리 오는 것 같지만... 다행히 내가 먼저 신호를 받아 무사히 탈 수 있었다. 삑, 카드 소리가 경쾌하다. 때마침 교통 흐름을 보기 좋은 앞문 바로 뒷자리가 비었다. 앉아서 가쁜 숨을 돌린다.

지글지글 표면을 달구는 햇빛 아래를 달리던 버스는 이내 고속도로에서 나오는 차, 재래시장에 주차된 차, 재개발 지구의 좁은 길로 비집고 들어가는 차들 사이로 뒤섞여 들어간다. 마의 구간. 버스는 한 자릿수 km/h로 이 구역을 달린다. 안 그래도 둔중한 버스는 이제 승용차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대체 저 차는 왜 지금 끼어들까, 이 차는 왜 하필 저런 데 주차를 했을까... 버스 기사와 나는 계속해서 후, 하는 한숨만 쉴 뿐이다. 이렇게 차가 밀린다면 버스 전용 차로를 설정하는 게 순리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되면 길이 이럴 리가 없겠지.1) 서울 바깥에는 아직 버스 중앙 차로가 드물고, 영동 고속 도로의 버스 전용 차로는 승용차 사용자들에게 혐오의 대상인 이상 상황이 변하긴 어려울 것이다. 편도 2차선 도로의 2차로에 정차한 차량, 그리고 공사를 벌이는 차량 옆을 느릿느릿 지나자 그나마 차로가 뚫린다. 곧 역이다.

다행히 오늘은 내가 늘 타던 급행열차 시간이 맞다. 6분쯤 역에 앞서 도달했다. 이 정도면 역사(驛舍) 내 매점에서는 어묵 하나 먹고 승강장 위 매점에서 커피도 하나 살 수 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라고 자축하면서 승강장으로 내려서니 매점이 문을 닫았다. 아아, 장탄식이 나오고 만다. 한 시간 가까이, 카페인 없이, 그것도 아침 시간에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뜻이니. 다행히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은 끄트머리 칸에는 앉을 자리가 남았다. 오늘은 영어 보고서 하나를 살펴봐야 한다. 남은 자리에 엉덩이를 디밀고 걸터 앉아 구겨진 보고서를 가방에서 꺼내 뒤적거리면서 요지를 파악하고 빠르게 죽 읽어 내려간다. 그래도 앉은 덕에 구로까지는 사람들이 밀물처럼 들어차고, 신도림부터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도 모른 채 읽을 수 있었다. 오늘따라 열차는 거의 정시 운행 중이다. 철도 예매 앱을 열어 용산에서 청량리까지 가는 ITX 청춘 열차를 예매한다. 이렇게 하면 다음 전철을 기다리는 것보다 10분 정도는 당길 수 있다. 계단을 오르락거리며 열차를 갈아타면, 2시간에 가까운 대장정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것이다. 내 옆을 휘감아 도는 강변 북로와 한강을 바라보는 이 순간, 회의가 저 하늘의 뭉게구름처럼 평온하게 진행되길 바라는 마음만 남는다.


오늘도 무사히

이 모든 과정이 다행히 하루에 벌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은 실제 있었던 일들이다. 무수히 많은 작은 사건들이 엮여 나를 50km 떨어진 지점까지 실어 나른다. 내 근육의 운동과 신경의 신호는 물론, 집안과 가방 속의 수많은 사물들, 휴대 전화와 연결된 정보 시스템, 어제와 오늘 동료 운전자들이 내린 판단, 버스와 열차를 공유하는 동료 승객들의 움직임, 교통 기관 노동자들의 노동, 차량의 동력 기관, 차로와 주차 공간은 물론 철도 시각표와 매점까지 설정하는 제도, 버스와 열차를 지지하는 노반 기술, 운임을 지불하는 결제 시스템, 사람들을 모았다가 흩어 놓는 건축 설계, 이 모든 것들 옆에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구름...

이들에 대한 분해와 분석은 아마도 무한히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무심히 내딛는 발걸음 하나조차 이렇게 많은 것들과 복잡하게 엮여 있다. 그리고 이런 복잡성에 조명을 비춰 보았던 내 이야기가, 단순한 장광설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은 길을 다니는 당신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일상을, 당신의 과거와 미래를, 당신을 둘러싼 사회를, 나아가 당신이 담겨 있는 물질 세계까지, 이동은 바꿔 왔고 또한 바꿔내고 있다.


<The Infant Samuel>, Reynolds, J. 1776

이런 상황에 늘상 맞서는 우리 모두의 모습은, 마치 옛 기사님들의 달력에 단골로 등장하던 그림, 아기 사무엘과 닮은 듯하다. 이 그림은 사무엘이라는 예언자가 어린 시절 아직 어찌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신의 목소리를 처음 직면하는 장면을 화폭에 옮긴 작품이다.(사무엘 상 3장) 버스를 놓칠 줄 모르고 길에 나서는 내 모습, 그리고 위험과 사고가 늘 곁에 있는 길 위로 나서는 기사님들의 모습과 겹친다면 과장일까. 아기 사무엘 아래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를 처음 적어 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기막힌 표현이라는 생각이 다시 든다. 우연과 숙명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 이동하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진실에 오늘도 무사히 닿길 바란다.



1) 시간당 150대가 통과해야 설정할 수 있는데, 내가 주로 다니는 길은 대부분 이 기준에 미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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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전현우(교통, 철학 연구자)

서강대학교에서 분석철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자연종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교통, 철학 연구자. 과학 철학을 연구하던 중, 대규모 자원과 에너지를 소모하면서도 사람들을 매일같이 끌어들이는 교통 시스템의 마력 덕에 본격적으로 교통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자연과학연구소에서 교통에 대한 관심을 더 발전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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