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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의 술 맛 멋] 하얀 배꽃이 눈처럼 내립니다

6화 : 청년 양조인의 팔팔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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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에 어찌 단맛만 있으랴.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처럼,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처럼, 삶의 달고 시고 쓰고 묽고 푸르른 그 맛을 오롯이 담아낸 탁주를 한 잔 또 한 잔 들이켜 본다. (2023.04.18)


소설가 김혜나가 전통주를 음미하며,
소설가의 일상, 술의 향과 맛, 시와 소설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격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우리술스타>라는 유튜브 채널에서는 다양한 양조인을 초대해 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영상을 만들어 방영하고 있다. 매 회차 재밌게 보던 중, 팔팔양조장의 두 대표가 출연해 막걸리를 소개하는 모습을 보았다. '팔팔막걸리'라는 이름을 보고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 만드는 술이리라 짐작했는데, 젊은 대표 두 명이 양조 과정을 진지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시선을 끌었다.

'팔팔' 하면 먼저 '88서울올림픽'과 '88담배'가 떠오른다. 흔히들 예스럽거나 촌스러운 물건 혹은 발상을 가리켜 '쌍팔년도식'이라며 우스갯소리도 하니 팔팔막걸리 또한, 어딘가 지난 세기의 옛 술처럼 다가오는 구석이 있다. 그래서인지 딱히 손이 가질 않았는데, 유튜브 영상에서 마주한 양조장 대표는 젊다 못해 힙스러움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알고 보니 '팔팔막걸리'의 본뜻은 양조장을 세운 대표 두 명이 모두 1988년생이라는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스무 살 무렵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스물여덟 살에 등단한 나는 습작기에나 등단 이후에나 늘 나이 어린 작가였다. 갓 등단했을 적 문단에 내 또래 작가가 있기는 했으나 소수였고, 출판사 작가 모임이나 송년회, 문학상 시상식 자리에서 언제나 선배 작가하고만 자리했다. 십여 년간 작가로 일해 오며 나보다 나이 어린 동료를 거의 만나질 못하다 보니, 나는 여전히 젊다는 인식이 있었다. 한데 우리 술을 알아가며 마주한 주류업계 종사자들은 상상 이상으로 젊어서 쉬이 적응이 되질 않았다. 전통주 업계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양조장이나 도매업, 주점의 대표 및 실장 직급의 분들 모두 나보다 현저하게 어린 20대에서 30대 청년이었다. 동료 작가들 사이에서 20대 소설가를 마주하면 막냇동생 같은 인상을 받곤 하는데, 주류업계 청년들은 내가 해온 것과는 다른 공부를 하고 경력을 쌓아와서인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1988년생이라는 팔팔양조장 대표 또한 젊은 나이에 취미로 술을 빚기 시작해 양조장에 취직했다가 창업까지 한 청년 사업가였다. 하지만 말이 좋아 청년 사업가지, 자동화 공정 없는 소규모 양조장을 운영하다 보니 밤낮없이 손수 술을 빚느라 어마어마한 양의 노동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밤잠도 못 자고 일하면서도 술 빚기에 진심일 뿐만 아니라, 술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고 사랑하는 모습이 커다란 신뢰감을 안겨 주었다.

그 진심에 이끌려 팔팔막걸리를 마시려고 뚜껑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화사한 돌배향이었다. 잘 빚은 술에서는 대개 과일향이 난다고 하지만, 이 정도로 돌배향이 가득 차오르는 탁주는 처음이었다. 잔에 따른 뒤 한 모금 머금고 천천히 혀를 굴려보니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달큰한 배를 한입 가득 베어 문 듯했다.



여덟 살 무렵, 불암산 근처 상계동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주공아파트 단지 근처에 배나무가 늘어선 과수원이 있어 어머니는 종종 아파트 주민분들과 함께 그곳에 다녀왔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는 신문지에 둘둘 말아 가져온 커다란 배를 꺼내어 껍질을 깎아 주었다. 그 맛이 어찌나 달고 시원한지 이루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후에 그보다 훨씬 크고 값비싼 배를 많이 먹어봤지만, 어릴 때 맛본 과수원의 배처럼 달고 시원한 맛은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다 팔팔막걸리를 마시니 어린 시절에 맛본 과수원 배의 맛과 질감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당도가 있는 탁주를 좋아하지만, 많이 마시다 보면 그 단맛에 질려버리고 마는 때가 있다. 한데 팔팔막걸리는 달큰하고 청량한 맛 뒤로 이어지는 쌉싸름한 맛의 조화와 균형이 좋아 물리지 않고 계속 마실 수 있었다. 술을 마시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한 병을 다 비운 채였다. 술을 마시고 난 뒤에도 내내 가시질 않는 잘 익은 배 향... 수목원에서 느껴봄 직한 산뜻한 향기에 취하니 백가흠의 단편 소설 「배꽃이 지고 첫 문장이 떠올랐다.


하얀 배꽃이 눈처럼 내립니다.

뚱뚱한 여자가 배나무 아래 섭니다. 바람에 날리는 꽃잎에 눈앞이 어지럽습니다.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배나무를 올려다봅니다. 눈부신 하얀 꽃잎이 바람을 타고 여자의 몸을 감쌉니다.

_백가흠, 『귀뚜라미가 온다』에 실린 단편 소설  「배꽃이 지고」 중에서


배꽃이 눈처럼 나리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장면으로 시작하는 단편 소설 「배꽃이 지고」를 읽으면 은은한 배꽃 향기가 온몸 가득 퍼져나가는 듯하다. 곧바로 달고 청량한 배 맛도 떠올라 입에 침이 한가득 고인다. 한데 읽으면 읽을수록 배의 과육 안쪽 시고 떫은 씨앗 주변을 씹는 듯한 이야기가 나타난다. 인간이, 인간의 삶이 이렇게까지 쓰고 시릴 수 있을까? 진저리나는 삶의 진상과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역설적으로 묘파하는 소설. 읽어나갈수록 잔인하고 폭력적인 묘사에 환멸이 날 지경인데도 불구하고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은 바로 문체에 있다. 귓가에서 나긋나긋하게 속삭이는 듯한 감미롭고 서정적인 구어체 문장은 마치 배꽃이 나리는 과수원의 풍경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만 같다. 서정성과 환상성에 이끌려 끝내 소설을 다 읽을 수밖에 없고, 우리네 삶의 단맛 쓴맛 신맛을 모두 맛본 듯 저릿한 마음이 밀려들고 만다.

팔팔막걸리를 마실 때마다 소설 「배꽃이 지고」를 떠올리게 된다. 처음부터 훅 치고 들어오는, 잘 익은 배 과육을 한입 가득 베어 문 듯한 맛. 과육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과즙의 청량함과 안쪽의 미미한 산미, 마지막으로 씁쓸한 뒷맛이 따라온다. 술이 가진 맛과 향이 기이한 균형을 이루며 순차적으로 달고도 쓴맛을 음미할 수 있다.

인간의 삶에 어찌 단맛만 있으랴.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처럼,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처럼, 삶의 달고 시고 쓰고 묽고 푸르른 그 맛을 오롯이 담아낸 탁주를 한 잔 또 한 잔 들이켜 본다.



귀뚜라미가 온다
귀뚜라미가 온다
백가흠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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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혜나(소설가)

소설가. 장편 소설 『제리』로 제34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청귤』, 중편 소설 『그랑 주떼』, 장편 소설 『정크』, 『나의 골드스타 전화기』,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이 있다. 제4회 수림문학상을 수상했다. 국내에서 요가 지도자 과정을 이수한 뒤 인도 마이소르에서 아쉬탕가 요가를 수련하고 요가 철학을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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