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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완의 다음으로 가는 마음] 끝과 시작 - 마지막 회

마지막 회. 끝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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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이모가 다 같이 모인 손자 손녀들 앞에서 좋은 말씀 한번 해주시라고 농담 삼아 얘기를 했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그대들이 사는 세상은 내가 산 세상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나의 얘기가 필요 없다, 그냥 각자 방식으로 열심히 살아가시라"고 하셨다. (2023.02.07)


영화감독 박지완의 '다음으로 가는 마음'
마지막 회


일러스트_박은현 

우리의 인생에 끝이 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무언가 끝난다는 것은 비극적 사실일까 혹은 안도할 일인가.

'연재'라는 형식으로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닿는 일에 조금 적응될 만하니, 마지막 글을 써야하는 시간이 왔다. 그렇다고 해서 글이 잘 써지거나 안 써지는 것도 핑계일 뿐이고, 시작과 끝 역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약속일 뿐, 끝에는 언제나 다시 시작이 이어진다고 생각하자.

그렇지만 그래도 이 연재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듯, 마지막 역시 기억할 만한 어떤 순간이기를 바란다.

여전히 안 본 사람이 더 많은 나의 영화, <내가 죽던 날>에 "인생이 네 생각보다 길어"라는 대사가 있다. 짧은 것보다는 덜 하지만, 그래도 나는 꽤나 잔인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끝을 정할 수 없다는 것, 끝을 마주하기까지 계속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는 얘기는 큰 사랑을 담아야만 조금 괜찮은 말이 된다. 그러니 예정된 마지막은 덤덤하게 끝을 맞이할 기회를 준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이 영화를 만드는 나에게는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보통 글은 나 혼자 썼다. 바꿔 말하면 남에게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 혼자 쓴다. 그러나 연재의 경우에는 2주 간격으로 주제를 정하고 초고를 쓰고 그걸 편집자와 함께 보고 얘기 나눈 다음, 그 글이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또 종종 주변에서 읽은 사람들의 의견을 받게 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과정이 매우 빠르게 회전되었다. 마치 약속 시간에 맞춰 서두르느라 옷을 덜 입은 채로 누군가와 만나러 가는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매번 놀랍게도 편집자의 피드백은 나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단순히 잘 썼다 못 썼다가 아니라 내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더 섬세하게 살필 수 있게 했다. 신기했다.

적어도 시작하려면, 첫 글자라도 쓰려면 나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한다. 너무 길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도망 다니던 지점에서 글이 막혔다. 바꾸고 싶은 과거의 얘기도 아니고 약속할 수 없는 미래의 얘기도 아니면서 현재의 나를 구석구석 들여다봐야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문장이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동안 시나리오를 위해 지어내는, 괜찮은 거짓말을 쓰려고 애쓰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글쓰기였다.

나의 할아버지는 내 영화가 개봉하기 조금 전에 돌아가셨다. 98세이셨으니 흔히 말하는 호상이고, 또 자식들에게 둘러싸여 살던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어쩌면 할아버지의 죽음은 여러모로 괜찮은 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몹시 슬펐다. 당시에는 영화 개봉 직전의 과정이 마무리되는 중이라 매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어서 복잡한 그 슬픔을 차분히 들여다볼 여력이 없었다. 할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그 정도의 시간을 들이지 못했다. 나쁘게 말하면 할아버지의 인생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훔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1923년생이셨으니 너무나 많은 한국의 역사를 지나왔고, 참여했으며, 결과들을 맞닥뜨리는 사람으로서의 소회를 듣고 싶었다. 어떤 후회와 기쁨 그리고 슬픔이 있었는지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비밀을 좀 들어보고 싶었다.(물론 부모님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으나, 나와 부모님은 시간으로도 관계로도 너무 가까워서 아직은 감당할 만한 배포를 갖추지 못하였다)

할아버지는 말씀이 많은 분은 아니었다. 90살 생신이었던가. 막내 이모가 다 같이 모인 손자 손녀들 앞에서 좋은 말씀 한번 해주시라고 농담 삼아 얘기를 했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그대들이 사는 세상은 내가 산 세상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나의 얘기가 필요 없다, 그냥 각자 방식으로 열심히 살아가시라"고 하셨다.

영화가 개봉한 후로 1년 정도 나는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이상할 정도로 자주 울었다. 울면서도 정확히 무엇이 슬픈 것인지, 이것은 과장된 슬픔은 아닌지 생각했다. 자세히 알게 되면 이상한 서운함과 서러움이 사라질까.

할아버지의 일생을 객관적으로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서 거슬러 올라가서 알아보면 어떨까 하고 사촌동생에게 말했다. 그러자 사촌동생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전화여서 볼 수는 없었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그 당시 개개인들이 생존을 위해 했던 선택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 매우 다를 텐데, 그걸 기록으로만 보고 나서 할아버지의 인생을 평가하지 않을 수 있어? 무엇보다 할아버지가 원할까?"라고 물었다. 무서운 질문이었다.

초등학생 때 종종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는데, 언제나 일주일이 되기 전에 존댓말로 적힌 정성스러운 답장이 왔다. 왜 그러셨을까,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르치려고 그러신 걸까 싶었는데, 나이가 들어서도 존댓말로 얘기를 나눌 때가 많았다. 그러다 조카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왔다. 할아버지를 닮은 마음이 나에게도 있는가 보다 싶었다.

할아버지는 미스터리한 사람이었다. 손자 손녀의 입학식과 졸업식에 참석하실 만큼 다정하면서도 어느 순간 이후에는 나의 직업을 물어보지 않았다. 영화를 하겠다고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 학교를 갈 때가 그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눈 마지막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일이라, 어려운 길을 가시려는 구려." 뭐 이런 대화였다. 그러면서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받아도 된다고 하면서 세뱃돈을 챙겨주셨다.(사촌들 중 나만 받았던 꽤 긴 몇 년이 있었다) 참으로 민망하면서도 매번 '감사합니다'하면서 받아 들고 나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독신으로 지내신 세월이 길었던 할아버지가 혼자 살기를 선택한 손녀에 대해 보이는 약간의 지지라고 멋대로 생각했더니, 평소 못 사 먹는 맛있는 걸 사 먹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인생이 길다'라는 대사를 잔인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에 대한 응원으로 쓰고 싶었던 나의 마음은 어쩌면 할아버지에게서 왔다. 할아버지가 그걸 아셨더라도 딱히 좋아하지는 않으셨을 거라 생각한다. 그냥 덤덤하게 '그랬군요' 하셨을 것 같다. 나의 불안에 대해서도 거짓말하는 어려운 길을 택했으니 넉넉히 받아들여야 된다고 냉정하게 얘기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에 끝이 있다는 것, 그러나 그러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무언가 시작된다는 것.

10개짜리 연재가 끝나는 시점에 할아버지까지 끌고 와서 인생의 끝을 얘기하는 것만 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들킨 것만 같다. 나는 여전히 내 마음에 드는 것만 찾으면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영화가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기를 바라는 모순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산다는 것을 이곳에 내내 고백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 이 글을 읽어준 사람들은 누구보다 나의 독백을 길게 들어준 셈이라 나에게는 오랫동안 각별한 관계로 기억될 것 같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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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지완(영화감독)

단편 영화 <여고생이다>, 장편 영화 <내가 죽던 날>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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