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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진이 간다 : 허윤진 'I ≠ DOLL'
나를 규정하는 등호에 긋는 X자
'I ≠ DOLL'은 허윤진의 그런 굴곡진 시간 끝에 맺혔다. 아이돌을 꿈꿨던 사람, 그 꿈을 포기했던 사람, 그리고 다시 꿈꾸기 시작한 사람. 아이돌의 자리에 꿈을 치환해 본 사람은 아이돌을 정의하는데 거침이 없다. (2023.01.18)
2023년이 딱 아흐레 지난날, 노래 하나가 나왔다. 르세라핌의 멤버 허윤진의 싱글 'I ≠ DOLL'이었다. 4개월 전 발표한 첫 솔로 싱글 'Raise y_our glass'의 썩 좋았던 느낌을 기억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감성적인 팝 트랙이었던 전작과는 확연히 다른 기타와 스네어 연주가 긴장감을 조성하는 가운데 노랫말이 먼저 귀에 때려 박혔다.
'난 뭘 입어도 죄다 입힌 옷이라며 손가락질 / 내가 뱉은 말도 외운 대본이면 이 말 하겠니 / 어서 챙겨 이미지 / 시작 전에도 이미 진 이 게임은 왜 이리 어려워 / "쪘네", "안 빼고 뭐 해?", "보여지는 직업인데" / 내면은 결국 희미한 뒷전이 돼 / 넌 모르지 / 어제는 인형 같고 / 오늘은 이 X이라 해 / When all they see is vanity(그들이 보는 모든 것이 허영일 때) / They pick apart my body(그들은 내 몸을 갈라놔) / And throw the rest away(그리고 나머지는 버려버리지)'
정말, '때려 박혔다'는 표현이 맞다.
르세라핌으로 데뷔 전, 허윤진에 대한 이미지는 솔직히 다소 희미했다. 있지만 없었고, 없지만 있었다. 아마 케이팝을 두루 살피는 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그가 처음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인 건 2018년. 한때 수많은 시청자를 강제 (국민) 프로듀서로 만들었던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 48'이었다. 지금 케이팝 신 '걸 파워'의 선봉에 선 다양한 멤버를 품은 그룹 아이즈원을 배출한 바로 그 회차다. 당시 플레디스 소속 6개월 차 연습생으로 출연한 허윤진의 프로그램 최종 순위는 26위였다. 전체 100명에 가까운 출연자 가운데 26등이라면 어딜 가도 나름 선방했다는 소리를 듣겠지만 그가 발을 딛고 선 곳은 때론 1위도 금세 잊히고 마는 불안한 터였다. 이후 소속사까지 옮기며 절치부심했지만, 그를 기다린 건 연습생 방출이라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 1년 반 동안 대학을 준비하며 보낸 평범한 수험생 시절은 지금의 싱어송라이터 허윤진을 받치는 큰 주춧돌이 되었다. 다 지나서 할 수 있는 얘기지만 분명 그렇다. 조금 전 평범하다고 했지만, 사실 그가 보낸 시간은 절대 평범할 수 없었다. 그는 모호한 꿈을 찾는 몽상가가 아닌, 구체적인 꿈에 이미 다가가 본 현실주의자였다. 당장이라도 닿을 것 같던 꿈이 손끝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걸 몇 번이나 경험한 사람의 남은 일상이 고요할 수는 없다. 덤덤하게 '그냥 무난하게 대학교 생활을 했으면 더 자유롭고 행복하지 않았을까?' 대상도 대답도 없는 질문을 던지다 '사실은 정말 힘들었다'며 눈물과 함께 진심을 울컥 고백하는 사람 앞에 다시 놓인 꿈으로 향하는 열차. 그것이 비록 자신을 한 번 놓아버린 곳에서 보낸 것이라도 절대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르세라핌이 되었다.
'I ≠ DOLL'은 허윤진의 그런 굴곡진 시간 끝에 맺혔다. 아이돌을 꿈꿨던 사람, 그 꿈을 포기했던 사람, 그리고 다시 꿈꾸기 시작한 사람. 아이돌의 자리에 꿈을 치환해 본 사람은 아이돌을 정의하는데 거침이 없다. 아이돌은 누군가의 우상을 뜻하는 고유 명사인 동시에 한 사람의 생생한 꿈이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녹여 노래하는 것으로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테일러 스위프트의 음악에 영감을 받아 곡을 처음 쓰기 시작했다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자연스러운 접근이었다. 자신을 지지해주는 이들을 향해 '너와 함께 있는 한 아무것도 상관없다(I don't care as long as I'm with you)'는 감사의 메시지로 세상을 향해 나만의 목소리를 낸 이의 다음이 나는 인형도, 세상이 정의하는 아이돌도, 네가 생각하는 그 무엇도 아니라는 직구라니. 당황스러운 만큼 간절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싶다.
노래는 묘하게도 허윤진이 직접 작사와 작곡에 참여한 르세라핌의 두 번째 EP <ANTIFRAGILE>의 수록곡 'No Celestial'과 사운드와 메시지 모두에서 이란성 쌍둥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 쏟아지는 강렬한 디스토션 속 '나는 빌어먹을 천사도 여신도 아닌 그저 나일 뿐(I'm no f***in' angel / I'm no f***in' goddess / 난 나일 뿐이야)'이라며 무대를 신나게 휘젓던 그 모습 그대로, 이제는 허윤진 혼자 서 있다. 자신을 규정하려는 모든 등호에 빨간 X자를 그으며 외친다. 천사? 여신? 인형? 그다음에는 또 뭐? 내가 두 발로 직접 걸어온 시간을 뿌리에 둔 기개가 남다르다. 허윤진이 간다. 나의 꿈으로 채워진 길을, 누구보다 강고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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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