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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릭의 창작 일기] 트위터가 사라진다고? - 마지막 회

슬릭의 창작 일기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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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가 없어질까 봐 걱정하는 사람들의 트윗에는 '무관심에 가까운 관심'을 잃는 것에 대한 걱정이 가득하다. 나 역시 이 '조용한 사랑'이 소중하다. (2022.12.08)

일러스트_한아인

요즘 들어 트위터 타임라인이 시끄럽다. 트위터를 인수한 일론 머스크의 파격적인 기행이 잇따르면서 트위터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유저들은 이제 어디 가서 서로의 근황을 공허에 외치고 쓸데없는 세상만사를 알 수 있겠냐며 한탄하고 있다. 종종 자신의 다른 SNS 계정을 공유하며 인연을 이어가자는 트윗도 보인다. 내 소중한 트위터가 없어진다고? 눈앞이 캄캄하다. 그동안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인연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지만 소중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 내 머릿속에도 몇 스쳐 지나간다.

지금 와서 보면 나에게 트위터란 커다란 집단 기억 창고와도 같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심지어 한꺼번에 인지하기도 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떤 일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었는지 마음함, 북마크, 리트윗들로 알 수 있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자기 자신의 타임라인을 몇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트위터 고수들은 자신의 트윗들을 종종 지워버리곤 하지만, 남아있는 흔적들만으로도 어떤 시공간을 지냈었는지 기억할 수 있다. 마치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함께 써낸 단체 일기와도 같다. 누군가 멋진 말을 남기면 너나없이 자신의 타임라인에 이식하기도 하고. 나의 별 시덥지 않은 트윗에도 꾸준히 마음을 눌러주는 친구들이 고맙기도 한. 왜 다른 SNS와 다른 트위터만의 감성이 생겨난 걸까. 트위터는 그 어느 SNS보다도 배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진입 장벽도 높다고 소문나 있다.

사실 트위터 밖의 세상에서 트위터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은 것도 알고 있다.(나는 트위터뿐만 아니라 온갖 SNS와 커뮤니티를 과도하게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어나는 모든 이슈에 깐깐하고 비판적인 말을 얹거나, '오타쿠'라 불리는 서브컬처 향유자들의 필터링 없는 발언들이 다른 SNS에 캡처되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내가 쓴 것도 아닌데 살짝 민망해지곤 한다. 완벽한 익명이 보장되고, 연속성을 가질 필요도 없으며, 텍스트 위주의 자아가 형성되는 공간이다 보니 대면을 요하는 사회 속에서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이 자극적으로 오가는 것이다. 그러니 트위터를 자주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가 이런 말을 했더라'보다는 '트위터에 이런 말이 있더라'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트위터 생태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트위터에 발화되는 모든 말이 한 사람의 손끝에서 생성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 가서 "나 트위터 해"라든가, "내 트위터 아이디 알려줄까?"라는 말을 하는 것은 트위터 헤비 유저들에게는 알몸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창피함을 드러내는 듯하기도 하다.

나의 경우는 상황이 좀 달랐다. SNS를 노래 발매의 홍보 수단으로 써야 했기 때문에 내 신분이 노출되는 계정을 운영했다. 아무래도 내가 누군지 알아줬으면 좋겠는지라, 이름을 걸고 말하기 부끄럽거나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트윗을 남기기가 쉽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본계정에서 말하기 힘든 트윗을 하기 위해 부계정을 만들기도 했지만, 신분을 딱히 숨기고 싶지는 않았기에 결국 부계정에서 사귄 '트친(트위터 친구)'들도 전부 내가 슬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조금 더 작은 채널의 슬릭 계정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인기 많고 신분은 알려지지 않은 재미있는 계정들이 부러웠지만, 유머 감각 하나로 온라인 친구를 사귀기엔 나는 너무 재미없는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트위터가 존폐의 위기에 놓인 이때까지도 그 익명성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그렇지만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된 소중한 인연이 너무나 많다. 엄청나게 내향적인 성격인 나에게 트위터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내 붉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당신의 음악이 좋아요. 저도 노래를 만드는 사람인데 우리 친해질래요?" 같은 멋진 말은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지만, 그 말을 전하고 싶은 다른 음악가들을 조용히 팔로우 하고, 그들의 트윗에 마음을 찍으며 넌지시 당신을 지지하는 마음을 표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단번에 그 표현을 알아채고 마치 오래전부터 서로 알던 사이인 것처럼 서로의 삶을 고요히 목도했다. '배고프다', '방귀 뀌고 싶다'와 같이 별것 아닌 말을 내가 남기기엔 민망했지만, 그들이 남겨주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서 볼 수 없는 자조적 솔직함은 우리 모두 불행속에 있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조용히 웃긴 사람들이 가장 웃기지 않을까. 트위터를 하며 여실히 느꼈다. 인터넷을 떠도는 텍스트 유머는 적어도 절반 넘는 출처가 트위터일 것이다. 세상에 떠도는 재밌고 귀엽고 충격적인 일들을 가장 빠르게 공유하는 사람들도 트위터에 다 모여있다. 틱톡이나 유튜브 영상처럼 높은 조회수가 큰 영향력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인스타그램처럼 높은 팔로워 수가 수익과 연결되지도 않지만 트위터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흥미로운 모든 것을 주변에 공유하는 데에 매우 진심이다. 오히려 금전적 이득과 전혀 상관없기 때문에 그 진심이 더욱 와닿는다. 다만 누군가를 조롱하거나 비웃는 데에도 이 진정성을 휘두르기에 안타까울 뿐이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에도 매우 진심이지만 그 반대의 감각에도 오감이 트여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또 트위터 아니겠는가. 트위터에서는 무언가에 대한 불편함을 호소하는 트윗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트위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종종 트위터를 '프로 불편러'들이 모인 곳이라 일컫는다. 이것도 불만, 저것도 불편이니 그 불편함을 목격하는 것이 피곤한 것이다. 그 불편함들을 가만히 읽다 보면 문득 슬퍼진다. 대부분의 '불편한' 트윗들은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어떤 사람들을 기준으로 꾸려지고 있는지,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것들이다. 물론 이런 트윗들이 그 트윗을 쓴 유저에게만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불만일 수도 있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프로 불편러'들의 예민함은 우리 사회가 특정 계층에게 불공평한 방식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사실을 시시각각 깨우쳐준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한편, 트위터가 없어질까 봐 걱정하는 사람들의 트윗에는 '무관심에 가까운 관심'을 잃는 것에 대한 걱정이 가득하다. 나 역시 이 '조용한 사랑'이 소중하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은 이름도 사는 곳도, 나이도 아닌 닉네임, 오늘의 기분, 최근 눈여겨보는 연예인과 같은 것이지만 누군가의 일상이 나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모아 공유하는 다른 SNS에서 나만 멈춰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다가도 트위터에 접속해 '탁 트인 공원 같은데 가고 싶다 마음이 넘 갑갑해' 같은 트윗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위로를 받는 것이다. 위 문장은 실제로 방금 전 내 트친이 올린 트윗이다.

이제 트위터는 어디로 흘러갈까. 연일 트위터가 크게 변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실트(실시간 트렌드)에 '서비스 종료'라는 단어가 올라오고 있다. 트위터 고객센터에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트위터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 업로드되었지만, 일론 머스크가 운영하는 트위터는 이전과 다른 분위기를 가질 것이라는 사람들의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가지고 있던 것의 소중함은 비로소 그것을 잃고 나서 깨닫게 된다고 하는데, 과연 트위터를 잃어버린 트윗러들은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서로 누군지도 모르는 우리는 어떻게 또 서로를 알아보고 조용한 사랑을 나눌까.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트위터로 알게 된 '소소함의 재미'를 잊지 않는다면 어떤 플랫폼에서든 그것이 재현될 것이라 믿는다. 그곳에는 이상한 성인 광고도, 악의로 가득 찬 가짜 계정도, 뜻 모를 조롱과 비난도 없기를 바란다.


<연재 후기>

2022년은 내게 무너지는 한 해였다. 감정적으로 견디기 힘든 일을 겪고 잘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 숨만 붙은 채 보내는 하루들의 총합. 오늘은 어제보다 더 슬펐고, 내일은 더 슬플 거라는 생각에 잠겨 스스로를 고립하고 저주했다. 이런 상태로 하는 창작은 매우 괴롭다. 창작의 기쁨과 성취감으로 형성된 자아는 마주해야 하는 현실과 감정으로부터 끝없이 도망가기 바빴다. 그리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창작을 하는 순간도, 하지 않는 순간도 서로 다른 형태의 괴로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날의 상태에 따라 그나마 덜 참혹할 것 같은 괴로움을 선택하며 살았다. 그렇게 수동적으로, 때로는 피동적으로 쫓겨 다닌 하루 끝에는 습관적으로 술을 찾았고, 아주 잠깐의 느슨한 시간 속에 숨어있다 보면 어김없이 아침 햇빛은 지나치게 아름다운 밝기로 지나치게 끔찍한 나의 알몸을 낱낱이 까발렸다.

이런 종류의 일상적 고통은 서사의 형태를 갖추기가 어렵다. 고여있고, 머물러 있고, 둔하며 고요하다. 어렸을 때 자주 꾸던, 밑도 끝도 없이 도망만 다니는 꿈과 비슷한 것이다. 그 꿈에서 나는 누군가와 전혀 즐겁지 않은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데, 아무리 기발한 생각으로 숨어있어도 상대는 너무 쉽게 나를 찾아내고, 나는 잠시의 안도감도 느끼지 못한 채 영원히 도망 다녀야 한다. 머릿속에는 전혀 그럴듯한 — 시간을 들여 인지하거나 고찰할 수 있는 — 모양의 생각이나 느낌을 만들어낼 수 없다. '도망가야 해' 라고 쓰인 말풍선 하나만 둥둥 떠다니며 어떠한 생각의 줄기도 뻗치지 못하는 것이다. 꿈을 깨고 나서도 비슷한 상태였다. 씨앗도 심지 않고, 햇빛도 쬐지 않고, 물도 주지 않으면서 무언가 발아하길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꼴이었다.

그러나 내 상태가 어떻든, 나에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다. 책임져야 하는 계약이 있었다. 채워야 하는 빈칸이 있었고 지켜야 하는 기한이 있었다. 무너져 가루가 되어 있는 나는 안타깝게도 아직 한글을 쓸 줄 알고, 마감을 어길 때 느낄 죄송함과 괴로움도 알았다.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가장 아름다운 동력은 아니었지만, 나는 불분명하게 고장 난 모터의 소리를 내며 탈탈 혹은 엉엉 내달렸다. 그렇게 매달 삼 천여 자를 기록했다. 써야 하니 살아있을 수 있었다.


큰 상실을 하고 나면 작은 연결의 기쁨을 발견할 줄 아는 능력을 잃는다. 삐뚠 얼굴이 되고 모난 생각에 사로잡힌다. 올해의 나는 그런 엉망진창의 모습을 하고도 나를 돌봐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몰랐다. 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기다려주는 사람들을 외면했다.

<채널예스> 미디어콘텐츠 팀의 김윤주 선생님께, 초고를 읽어준 친구들과 독자분들께 염치 불고하고 말씀드리고 싶다. 나름 감춘다고 애썼지만, 단어마다 튀어나왔을 뜻 모를 괴로움을 함께해 주셔서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그동안 슬릭의 창작일기를 들여다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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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슬릭(뮤지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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