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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동안, 입은요?] 공복이란 무엇인가

쓰는 동안, 입은요? 2화 - 포도 코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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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오늘 먹는 것이 마지막 포도라고 생각하면 포도와 접촉하는 그 시간이 너무 황홀해서 멈출 수가 없다. 포도만의 새콤달콤함이 영혼을 살짝 코팅해주는 느낌이랄까? (2022.11.17)


소설가는 마감 때 무엇을 먹을까?
염승숙 소설가와 윤고은 소설가가 글쓰기와 음식에 관한 에세이를 번갈아 연재합니다.
매주 목요일을 기대해주세요.


언스플래쉬

시작은 따뜻한 물 한 컵이다. 가을부터 봄까지는 그 물에 레몬 한 조각을 넣기도 한다. 무농약 레몬을 써야 시간이 절약된다. 그렇게 물을 한 컵 마시고 나면 나의 공복 친구들이 하나둘 등장한다. 유산균, 홍삼, 들기름, 블루베리, 꿀, 오트밀, 사과, 셀러리, 당근... 단골 멤버들이다. 

공복은 마치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밭 같아서 누가 오더라도 또렷한 발자국을 남길 수 있지만, 가끔은 발자국 하나가 아니라 뒤로 벌러덩 드러눕는 독식자도 있다. 이를테면 아침 공복에 특히 좋다는 포도 말인데 내가 공복에 먹는 포도의 규모는 적어도 한 송이 이상이다. 여름 끝자락부터 포도알이 쭈그러드는 계절이 올 때까지 매일 아침 한 송이씩을 먹는다. 매번 오늘 먹는 것이 마지막 포도라고 생각하면 포도와 접촉하는 그 시간이 너무 황홀해서 멈출 수가 없다. 포도만의 새콤달콤함이 영혼을 살짝 코팅해주는 느낌이랄까? 아침 포도는 내 기분에 불필요한 먼지가 내려앉지 않도록 돕고, 포도를 너무 사랑하는 나는 공복감이 급속도로 줄어든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고, 아직도 공복 타이밍을 노리는 대기자들이 많이 남아 있고... 그런 것이다. 결국, 한정적인 공복을 어떻게 최대한 활용하느냐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공복에 섭취하면 더 좋다는 식품을 볼 때마다 좀 난감한 기분이 드는 건 내가 관심을 품을수록 결과적으로 공복감은 계속 줄어들게 되고, 유산균부터 당근까지 이어지는 공복 대기자들을 어떻게 다 수용할지를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꾸준한 섭취를 위해서는 아침 공복이 제일 좋은데, 그게 가장 좋은 시간대인 만큼 결국 나는 며칠 단위로 교대 시스템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래야 늘 부족한 공복이 고루 돌아갈 수 있으니까.

공복감이 다 차면 이제 아침 식사를 시작한다. 설마 지금까지 먹은 건 뭐냐고 물을 사람이 있으려나? 공복 타이밍에 만나면 좋을 음식과 아침 식사는 별개다. 아침 식사에 공복 친구들을 끼워줄 수는 있지만 그들만으로는 부족하다.

낮에는 책 관련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밤이 되면 소설을 쓰는 것이 일상의 리듬이 된 지 3년이 넘었다. 소설과 라디오는 때로 완전히 반대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은 혼자 쓰는 세계. 누구도 초대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지만 분명 '나 혼자'여서 가능한 매혹이 거기에 있다. 그에 비하면 라디오는 굳이 혼자일 이유가 없는 세계다. 소설을 쓰는 책상 앞에서는 입을 꼭 다물고 있을 때가 많지만, 온에어 표시등 앞에서는 계속 말이 흘러야 한다. 혼자여서 매혹적인 세계와 굳이 혼자일 필요가 없는 세계 사이를 지하철로 오가는 건 내게 분명한 자극이 되는데 이동이야말로 내 머릿속 이야기들이 고여 있지 않고 통통 움직이게 돕는 윤활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 세계가 너무 멀어 괴로운 순간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원고 마감에 쫓기고 있을 때다. 거의 추격전 수준으로 쫓고 쫓긴다는 기분이 드는 시기에는 특단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기상 시간을 앞당기는 것이다. 취침 시간을 늦추는 것보다는 기상 시간을 옮기는 편이 내게 조금 더 효율적이다.

새벽 4시 부근에 알람 스무 개를 맞춰놓고 그중 세 번째 알람쯤에는 원고가 게재될 지면 이름이나 작품 제목, 때로는 그보다 더 구체적인 정보와 다짐을 써넣는다. 이렇게 해두면 솔직히 첫 번째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뜨게 된다. 10분 단위로 시간을 확인하며 김밥처럼 댕강댕강 썰린 잠을 이어가다가 마침내 4시쯤엔 완전히 일어나게 된다.

새벽 4시 기상이 내게 그리 흔한 건 아니지만 역시 따뜻한 물을 한 컵 마시는 건 변함이 없고(이 경우엔 레몬 생략) 한 시간쯤 글을 쓴다. 5시가 넘어가면 공복의 효과를 끌어올리기 위해 공복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나는 아침 공복을 그냥 두지 못하는 사람, 어떻게든 이 황금 시간대를 활용해야 하는 사람, 그래서 마감은 급박하지만 올리브 오일이라든지 들기름도 한 숟가락 먹고 사과도 베어 먹고 그러다 따뜻한 커피 한 잔도 내릴 수 있게 된다. 평소 흐름대로 자연스럽게 손 닿는 것들을 챙기다 보면, 차차 이 시간을 내 것으로 지배할 힘이 생기는 기분이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아침 고요 속에 머물 때의 기분은 꽤 근사하기도 하다. 물론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다는 게 맹점이지만. 힘을 보충하며 목표인 아침 9시를 향해 가는 것이다. "밤에 원고를 꼭 보내놓을게"라고 말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 모든 편집자들이 출근하기 전에! 이렇게 내 원고는 대부분 공복 속에서 탄생한다. 공복과 공복의 최대 효과를 누리려는 친구들 틈에서. 갓 구운 빵을 내놓는 기분으로 약간의 설렘과 피로를 동반한 채.

늘 아침 9시 이전 송고에 성공하는 건 아니다. 일주일에 네 번은 나도 출근해야 하니 아침 9시가 아니라 때로는 8시 전에 원고를 보내놓아야 한다. 내가 진행하는 라디오는 분명 점심 시간대 프로그램인데 생방송에 앞서 녹음할 분량도 있고, 또 집에서 꽤 먼 거리에 방송국이 있기 때문에 아침 9시 혹은 8시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지하철로 한 시간 반 거리, 때로는 버스도 타고 택시도 타지만 어쨌든 심리적으로는 모두 '원고 밖' 세계다. 아직 마감 처리하지 못한 원고를 올 풀린 채로 보낼 수도 없고, 이걸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한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인데 그렇다고 아주 드문 일도 아니다.

만약, 아침 7시가 넘도록 원고를 마무리하지 못했다면?(마치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아니다. 오늘은 좋은 예감! 반드시!) 아침 7시쯤에는 중대한 결심을 해야 한다. 그즈음 되면 쫓기듯 쓰고 싶지는 않다는 충동 같은 게 솟기도 하고(왜 이제야 그런 생각을!) 진행 중인 원고가 이미 망했다는 포기도 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 단 하루만 더 있다면, 정말 세상 완벽한 원고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착각인지 확신인지 모를 것도 따라붙는다. 그러면 일단 원고를 덮고 출근 준비에 집중한다. 집중이라 함은 서둘러 아침 식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먼 길을 가야 하는데 아직 아침 안 먹었잖아... 공복을 달랬을 뿐.

최근에는 장편 소설을 연재 중이라 두 달에 한 번씩 마감일을 맞이하고 있다. 얼마 전 여섯 번째 마감을 했고, 그때가 아침 9시 이전 송고에 실패한 상황이었다. 나는 결국 노트북을 껴안고 출근하는 쪽을 택했다. 지하철 인파 속으로 몸을 얹어 놓으면서 아침 9시가 막 지났을 때 편집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월요일까지라 함은 월요일 아침을 말씀하신 거였겠죠?"로 시작되는 내용인데 요지는 오늘 밤에 꼭 보낼 것이며 이번엔 믿어도 좋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한심하기 짝이 없는 문자였다. 등단 후 15년 가까이 수많은 마감일을 거치면서 송고 시스템에 숙련되었을 법도 한데, 이제 와서 갑자기 편집자의 시간과 나의 시간 사이에 시차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월요일이 정확히 몇시로 마감되는 것이냐를 새삼 묻는다는 게 말이다. 그것이 6회 원고에 대한 것이었으므로 이미 앞서 다섯 번이나 비슷한 대화를 주고받았던 편집자는 이 능청스러운 문자의 절박함을 간파하고는 웃는 톤의 답을 보내왔다. 화요일(내일 오전 9시)를 기다리고 있겠다는 내용으로.

공식 마감일도 아니고 그것을 이미 넘긴 후 내가 약속한 그 진짜 마감일까지 넘겨버릴 때의 마음은 아무리 해도 단련되지 않는다. 습자지처럼 바람만 불어도 바들바들. 그러니 편집자가 보내준 답 문자 속의 '웃는 톤'. 이런 건 마치 '포도 코팅' 같은 것이다. 그 힘으로 나는 방금 벌게 된 새 하루를 반듯하게 다림질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마감 때면 영화 <섹스 앤 더 시티 2>에 나왔던 대사 하나가 자주 떠오르는데, 주인공 캐리가 아부다비에서 충동적인 키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다.

"이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미국과의 시차를 고려해서, 미국 기준으로는 아직 그 날짜가 되지 않았으니 오지 않은 미래로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내 책상이 있는 이곳에서 편집자의 책상이 있는 그곳 사이에는 아무런 시차가 없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게 아쉬운 지점이지만, 공복을 끌어안고 마감을 하는 심정은 분명 세상과 동떨어진 계절에 존재한다. 8시 41분, 오늘은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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