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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동안, 입은요?] 마감식이란 게 길게 보면…
쓰는 동안, 입은요? 1화 - 공복
세상에 소설가는 너무나 많고, 그들은 제각기 다양한 것을 먹으며 쓴다. 그리고 이 세계에 당연히, 아무것도 먹지 않는(못하는) 작가도 있는 것이다. (2022.11.10)
소설가는 마감 때 무엇을 먹을까? 염승숙 소설가와 윤고은 소설가가 글쓰기와 음식에 관한 에세이를 번갈아 연재합니다. 매주 목요일을 기대해주세요. |
사람의 눈썹 위 어디쯤, 배터리 잔량 표시등이 있다면. 나는 아마도, 오전 중에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1% 정도... 자고 일어났는데 어째서 전원이 꺼져버릴 것 같은 상태인지 나로서도 모르겠지만, 해명할 수 없지만, 아무튼 1%다. 가만 놓아두면 조금쯤은 버틸지 몰라도 그저 기약 없이 방전되어버리고 말 태세로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물론 그 순간에 나는 이것을 간절히 원한다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온전히 방전되고 싶어요. 제발 나를 가만 내버려 두세요... 버지니아 울프는 방을, 앨리스 먼로는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난 뒤의) 식탁을 원했다지만 나로서는 단 한 순간, 침대만이 절실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바람은 바람일 뿐, 곧 무법자가 달려든다.
"아침이에요, 엄마! 일어나요! 날씨가 좋아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이는 커튼을 열지 않아도 날씨가 좋아 보이는 천리안을 가졌어요)
작고 마른 아이가 점프하다시피 품에 안기면 나는 윽, 소리를 내면서도 몸에 힘을 준다. 육아는 어렵지만, 딱 한 가지의 진실만 유념하려고 한다. 아이의 무게를 견디는 것. 아이를 먹여 살찌우고 뼈를 자라게 하는 그 이상의, 존재 자체의 무게를 견딘다. 인내하는 건 어디까지나 아이가 아니라 부모여야 한다는 점을 매일 명심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아침마다 아이가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무게를 버티는 사이, 내 배터리 퍼센티지가 오른다. 순식간에 5%, 10%, 20%... 쭉쭉 올라간다. 아이가 주는, 그 망설임 없이 따뜻한 체온의 힘은 놀랍다. 고속 충전으로 50% 정도는 채워졌을 때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내 몸이나 다른 물건들에 생채기를 내지 않을 수 있다. 오로지 그 사실에 주의한다. 도저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침이 있는데 그럴 땐 발을 삐끗하거나 그릇을 깨뜨리거나 뜨거운 물에 데거나 삶은 달걀의 껍데기를 까면서조차 손을 베이고 만다.
그러니 공기의 균열을 내는 소리를 예민하게 감지하며 다다다다 달려온 아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묻곤 한다.
"엄마, 충전해 줄까?"
"좋지!"
아이는 나를(실제로는 내가), 으스러지게 안아준다. 합일의 안도감. 지극히 단순하고 충만한, 포개짐의 기쁨. 일상은 사고의 연속이지만 그럴수록 잔여 배터리의 양을 잘 체크해야 한다고 느낀다. 충전은, 충분할수록 좋다. 누구나 잔여 배터리의 양이 100%에 가깝기를 원하니까.
분명히 자고 일어났는데도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는 이유는, 잠을 잘 못 자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밤에 오래 깨어 있을뿐더러 쉽게 잠에 들지도 못한다. 아닌가, 잠들지 못해서 깨어 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가까스로 잠드는 시간은 새벽이 다 저물어갈 무렵이고, 아이의 생체리듬에 맞춰 일어나게 되니 언제나 강제 기상인 셈. 재밌는 건 아이의 수면 패턴에 따라 나의 수면 시간이 매해 한 시간씩 줄어들어왔다는 사실인데 이건 기상이변만큼이나 내게 위협적이다.
나는 대체로 새벽 3~4시에 잠든다. 아이는 네 살 무렵까지 오전 10시에 일어나다가, 다섯 살이 되자 9시에 일어나고, 여섯 살이 되니 8시에 일어나고 있다. 내가 더 일찍 자야 한다는 걸 알지만 쉽지가 않다. 자정 전에 잔다든가 백번 양보해서 새벽 2시 전엔 자러 가자고 늘 결심해도, 불면은 끈질긴 친구 같다. 가지 마! 더 놀자! 집요하게 옷깃을 붙든다. 그 친구 참 체력도 좋지.
잠을 깊게 못 드는 건 어릴 때부터라서 만성화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체는 신비해서 나는 주기적으로 정전(停電)을 겪는다. 의식의 스위치가 저절로 내려가 버려서, 아이를 전신주처럼 붙들고 열두 시간을 내리 잠에 취해 있기도 하는 것. 그마저도 서너 시간 주기로 깨고, 멍하니 집 안을 서성이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가 곯아떨어지는 패턴이지만. 어쨌든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잘 먹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른다.(뭘 못한다는 얘기가 길어지니 민망합니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어딘가 많이 모자란... 그런 서글픈 느낌적인 느낌... 흑)
잠에서 깨어나면 일단 정신상태가 몽롱하고, 육체의 상태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하다. 유산균 한 알을 물 한 잔과 함께 삼키고 나면, 그래서 자연스레 두 가지 상황에 놓인다.
하나는 아무것도 못 먹겠는 상황.
다른 하나는 먹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상황.
나는 아주 찬찬히, 먹지 않고 시간을 보낸다. 아이의 먹을 것을 챙기느라 분주히 움직여야 하지만, 정작 내 몸에 들어가는 건 없는 편이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정오 가까이 이어진다. 식사라고 부를 만한 것을 먹는다면 12시에서 1시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
특별한 일정이 없다면 나는 매일 오후 6시쯤 저녁을 먹고, 이후로는 전혀 먹지 않는다. 마감을 앞두고 밤늦도록 원고를 쓰거나 봐야 한다 해도, 물이나 차를 마실 뿐 다른 건 먹지 않는다. 술이나 커피를 마시지도 않고, 군것질을 하는 일도 없다. 한때는 야심한 시각에 에너지 음료나 다크초콜릿을 먹어보려고 한 적도 있는데 시도로만 그쳤다. 초콜릿을 먹는 것보다, 초콜릿을 어째서 알루미늄 포일로 포장하는지가 더 궁금했던 것이다. 언젠가 동료 작가 A에게 그 말을 했더니, 그녀는 내게 "다크여서 그런 거야!"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경악스럽다는 듯 덧붙였다.
"어떻게 소설을 쓰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을 수가 있어?"
세상에 소설가는 너무나 많고, 그들은 제각기 다양한 것을 먹으며 쓴다. 그럴 거라 생각한다. 밀크초콜릿을 사랑하고, 아이스크림을 냉동실 가득 채워 넣고 계속 먹어줘야 마감을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작가도 있다. 그것 또한 이해한다. 그리고 이 세계에 당연히, 아무것도 먹지 않는(못하는) 작가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공복은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상태'다.
아침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밥은 물론이고 가벼운 과일, 견과류, 우유와 시리얼, 빵, 감자와 고구마 등, 여러 가지를 도전해 봤지만 잠에서 깬 직후는 정말로 먹을 수가 없다. 이런 말은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슬프게도 나이가 들수록 더 그런 것 같다.
레프 톨스토이는 아침마다 삶은 달걀 두 개를, 빅토르 위고는 날달걀 두 개를 먹고 글을 썼다기에 달걀을 삶는 것에 대해 고심하던 때도 있었다.(날달걀은 도전의 욕구가 생기지 않았어요) 나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가정 가사' 과목을 배운 세대이고, 그래서 달걀 삶는 법이 사진과 함께 설명된 교과서까지 기억이 나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었는데. 흠. 물에 적당한 소금과 식초를 넣고, 달걀을 국자에 담아 깨지지 않게 넣고, 물이 끓으면 적당히 10분쯤 삶고 나서 찬물에 담갔다가, 껍질을 잘 으스러뜨려서 깐다. 아주, 간단하다.
무엇보다 그냥 달걀만 삶아서 먹으면 되는 일인데... 내 생각에 나는 다소 산만한 성격이고, 쓸모없고 난삽한 호기심을 갖고 있다. '날달걀 섭취, 건강에 괜찮을까?'라는 뉴스 검색부터 달걀의 조리법, 에그 쿠커의 사용 후기를 모조리 찾고(대체로 구글 검색 페이지의 1부터 끝까지입니다), 살모넬라균의 나무위키를 정독하고, 끝내 '닭장이란 게 길게 보면'으로 시작하는 책 『고기로 태어나서』까지 읽고 절망한다. 그리고 또 달걀의 등급을 공부하고, 동물 복지와 자유 방목에 힘쓰는 무항생제 달걀 판매처를 검색하여 어떻게든, 분연히, 구매한다. 다시 말하지만 아침에 눈을 떠서 1등급 달걀을 삶아, 입에 넣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나는 항상 과정엔 집중하지만 기어이 먹는 것엔 실패한다. 자고 일어난 뒤에도, 아니 오전 내내 뭔가 먹으려고 할수록 부자연스러워지고 마는데 이건 아무래도 소화 기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배 속에 음식물이 들어간 것보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게 더 편안하다고 느껴지는 탓이다. 먹는다는 건 영양의 차원에서 꽤 중요하므로, 아침에는 뭘 좀 먹어줘야 하지 않겠어? 하는 걱정 어린 말들도 듣지만, 먹겠습니까? '예', '아니오'로 이어지는 화살표가 있다면 '아니오' 쪽으로의 자동 선택... 공복은 결국 공심(空心)의 문제인 것인지도 모른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어야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인정하기 싫지만 소설을 쓰는 사람은 대부분 예민하고, 허영이 많고, 이기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호기심으로 가장한 지적 희구가 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열패감에 자주 휩싸이며, 순수한 인정 욕망에 마구 휘둘리니까. 나는 때때로 내가 너무나 호사스러울 정도로 시간을 내버리고 있다고 느낀다. 먹고 싶지 않을 때 먹지 않고, 먹히지 않을 때 억지로 밀어 넣지 않는 것, 공복을 오래 유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육체적으로 노동의 강도가 센 직업이거나 긴 출퇴근을 반복하는 직장인이라면 어려운 선택일 수 있다.
그러니까 이건 어떻게 해서든, 내가 글쓰기에 편하다고 느끼는 환경과 자리와 몸을 만들려는 절박한 제스처일 수도 있고, 그저 소화 불량에서 기인하는 불안에 강박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이라고도 느껴지지만, 어쩔 수가 없다. 마감이 임박해오면 먹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당장 어제 내가 낭비해버린 시간과 노트북의 전력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초조해지고, 다급해지고, 죄스러워진다. 소설가라면 언제 어디서든 글 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응급실 의사와 같다고 말한 필립 로스는 바보 멍청이야... 괜한 원망도 해가면서, 나는 풀어내야 할 이야기, 마무리 지어야 하는 원고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감식의 최우선은, 어쨌거나 공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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