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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이름 앞에서 우는 사람 - <수프와 이데올로기>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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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일상은 나뉠 수 없었다"는 말을 곱씹는다. 진상이 규명될 때 비로소 시작되는 애도, 각각의 이름들 앞에 설 때 비로소 정확해지는 슬픔에 대하여 생각한다. (2022.11.04)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계의 배 속에 아오모리 마늘 40쪽과 인삼을 넣어 냄비에 5시간 넘게 끓이면 맹탕이던 국물은 노랗게 진해지고, 푹 고아진 닭과 마늘은 잘게 부서져 한 그릇에 담긴다. 장을 봐서 재료를 다듬고 긴 시간 끓여 식힌 다음 식탁 위에 먹기 좋게 담아내는 시간을 모두 더하면 어림잡아 한나절. 달마다 한 번씩만 요리했대도, 80대 노모가 평생 품어온 수프의 시간은 이미 인생이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생의 담금질로 점점 더 좋은 맛을 내는 국물을 들이키는 동안,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도 한 그릇의 공동체로 어우러진다. 제주 4.3의 생존자인 재일 조선인 강정희 씨, 그런 어머니의 기억을 공유하는 아나키스트이자 다큐멘터리스트 양영희 감독, '미국인과 일본인 사위는 절대 안 된다'던 집안에 발을 들인 양영희 감독의 일본인 남편 아라이 카오루 씨. 이들은 그렇게 '식구'가 된다.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강정희씨는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 미군의 대공습을 피해 제주도로 피난했다. 해방과 분단, 그리고 학살의 참극이 자신을 겨눌 줄은 그 시절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학교 운동장에 일렬로 줄을 세우고 와다다다다... 논밭에서 움직이는 머리통만 있으면 또 가차 없이..."

2015년, 대동맥류 수술을 마치고 나온 강정희 씨는 병원 침대에 누워 줄곧 터부시해왔던 4.3의 기억을 딸의 카메라 앞에서 털어놓는다. 다시 오사카로 피신해 제주도 출신의 재일 조선인 량공선 씨와 결혼한 그는, 이후 평생 남한 정부와 등지고 살아간다. 북송 사업으로 세 아들을 평양에 보낸 뒤엔 북한에 사는 가족을 뒷바라지하는 것을 소명처럼 여겼다. 자라난 막내딸은 영화감독이 되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 활동가인 아버지의 삶을 <디어 평양>에, 북한에 사는 오빠와 조카들의 안부를 <굿바이, 평양>에 담더니, 이제 어머니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한다.

"정치와 일상은 나뉠 수 없었다."

영화의 첫머리에서 양영희 감독은 말한다. 정답고 호탕한 오사카 방언으로 채워지는 가족의 대화엔 '어머니', '아버지', '삼촌' 같은 한국어 호칭이 원래 제 것인 양 문장마다 따라붙고, 4.3을 회고할 땐 시간의 더께 위로 제주 방언이 삐죽 솟아 나온다. 제1언어와 민족 언어, 개인의 지정학적 역사가 뒤섞인 가족의 말들은 그들이 닭고기 수프를 논할 때조차 매 순간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들의 말소리는 곧 굴곡진 역사가 여전히 흐르는 소리처럼 들린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대부분 이런 불가분의 관계로 가득 차 있다. 이 영화에서 재일 조선인의 고단함과 제주 4.3 생존자의 슬픔은 하나이고, 재일 조선인 가정에 일본인 남편을 소개한 딸의 용기는 곧 제주에서 학살로 희생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와 결혼했을지 모르는 약혼자의 존재를 질문하는 용기로 이어진다.



"어머니, 기억나요? 김봉희씨."

서서히 알츠하이머가 진행되어 이제는 당사자인 어머니 조차 희미한 꿈결 속에서 그려내는 인물을, 상상 속에서만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낯선 고인의 이름을 양영희 감독은 이 영화에서 여러 차례 부른다. 그건 마치 다큐멘터리로 무형의 위패를 세우는 작업과도 같다.

2018년, 제주 4.3사건 70주년에 정부가 조선국적자의 입국을 허용하면서, 강정희 씨도 제주도를 찾을 수 있게 됐다. 알츠하이머가 진행된 상태로 뒤 제주4.3평화공원을 찾은 강정희 씨, 그리고 양영희 감독과 아라이 카오루 씨가 공개 추모식에 참석한 장면이 있다. 진상 규명, 희생자의 명예 회복, 국가 공권력의 과오를 후대에서라도 바로 잡으려는 노력과 사과의 언어가 연단에서 흘러 나오자 양영희 감독은 광장에 앉아 마치 처음 슬퍼하는 사람처럼 서럽게 눈물을 흘린다. 강정희 씨는 놀랍게도 애국가를 따라부르려 애썼고, 아라이 카오루 씨는 품 안에 량공선 씨의 초상 사진을 품은 채였다. 그곳에서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가족은 희생자들 중 신원이 밝혀진 이들의 이름이 탑처럼 쌓인 위패봉안소와 위령비가 세워진 묘역을 둘러본다. 과거의 약혼자 고 김봉희씨의 남동생과 연락이 닿았지만, 초로의 노인은 이제 제주 4.3을 "떠올리기도 싫고, (위령비를) 신청하지도 않겠다며,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했단다. 이윽고 제주4.3연구소를 찾은 양영희 감독이 허물어져 내린 얼굴로 고백한다. 

"그렇게까지 한국을 부인하고 북한을 지지할 이유가 되는 건지, 4.3이 그렇게 큰지 이해가 잘 안됐거든요.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까, 이런 고향을 품고 어떻게 살았나 싶어요."

여기 와서 보니까, 생긴 일들. 그러니까 2018년 4월 3일에 양영희 감독 가족에게 일어난 일들을 가족사의 역사화라고 불러도 될까. 비밀스러웠던 트라우마와 감정적 차원의 위로가 일종의 제의로서 공식화되고, 억울하게 죽은 무수한 희생에 각자의 이름 세 글자가 붙여진 풍경을 목도한 자리. 그 자리에서 누군가는 70년이 지나 비로소 애도하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괜찮을까. 

문득 앞서 지나간 한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생존자 증언 채록을 위해 제주4.3연구소 일원들이 강정희씨의 집을 찾아온 때다. 강정희씨는 고통만큼이나 사명감을 되새긴 얼굴과 허리를 곧추세운 반듯한 자세로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말하려 애썼다. 새벽녘 두 동생을 데리고 30km를 걸어 어두컴컴한 바다 위의 밀항선에 뛰어 내렸던 18살의 기억을 어제 일처럼 회고했다. 그 모습엔, 감히 말하자면, 생존을 위해 사투한 사람의 긍지마저 배어 있었다. 진실을 듣겠다는 형형한 눈동자들을 울타리 삼아 그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듯 보였다.



10월29일 이후, 나는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자주 생각한다. '돕는 행동에는 전염성이 있으므로 서로 도울 것'(집단행동연구자 메흐디 무사이드 박사)이라는 말만큼 "정치와 일상은 나뉠 수 없었다"는 말을 곱씹는다. 진상이 규명될 때 비로소 시작되는 애도, 각각의 이름들 앞에 설 때 비로소 정확해지는 슬픔에 대하여 생각한다. 다 알아도 결코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어서, 한참이나 뒤늦게 찾아오는 이해의 순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평생 가족의 영화를 만들어 온 어느 다큐멘터리스트가 뒤늦게 흘리는 눈물과 고백을 기억하면서, 위패도 영정사진도 없는 빈소에 매일 조문 가는 이들의 세상과 다시 최선을 다해 불화하기로 한다. 정치적 일상과 정치적 애도에는 기간이 없다는 사실을 계속 믿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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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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