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신유진의 글 쓰는 식탁] 아낌없이

<월간 채널예스> 202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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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매사에 여행 가방 하나가 전부인 것처럼, 애초에 가진 게 별로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는 마음으로 나를 탈탈 털어 쓴다. 그러면 삶이 조금 덜 무거운 것 같다. (2022.07.06)

언스플래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일상이 나를 과격하게 반겼다. 밀린 번역과 원고 마감, 곧 나올 신간의 교정까지. 여행하며 얻은 에너지를 아낌없이 쓴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또 소진될 것인가? 아니다, 이제는 아낌없이 쓰면 금세 채워진다는 것을 안다. 내가 절망적으로 소진됐다 느낄 때는 잃고 얻을 것을 계산하며 치사하게 쓸 때, 그럴 때 나는 금세 바닥나 버린다. 요즘은 매사에 여행 가방 하나가 전부인 것처럼, 애초에 가진 게 별로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는 마음으로 나를 탈탈 털어 쓴다. 그러면 삶이 조금 덜 무거운 것 같다.

해야 할 일에 나를 말끔히 비워내면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다닌다. 지금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 초여름. 계절을 즐기러 산에도 가고 숲에도 간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집에서 약 15km 떨어진 조용한 절이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떤 날에는 뜬금없이 대웅전에 들어가 예전에 어떤 스님께 배웠던 대로 절을 올리기도 한다. 소원이나 빌어보자 하는 마음에 무릎을 굽히면 몸치가 춤을 추는 것처럼 동작이 헷갈려 어느새 소원이고 뭐고 까맣게 잊는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텅 빈 동그라미 안에 있는 것 같다. 텅 빈 동그라미, 그 안에서는 진짜 쉬는 것 같은데…. 그러니 나를 위해서라도 소원 같은 것은 빌지 않는 게 좋겠다. 약속하지 말고, 다짐도 그만하고. 그러나 무언가를 하지 않겠다는 것 역시 다짐이 아니던가. 내 나이 마흔하나, 아직도 선생님께 일기 검사를 받는 초등학생처럼 자꾸 뭘 다짐한다. 혼날까 봐 무서운 것인지 칭찬받고 싶은 것인지. 가만히 보면 나처럼 웃기고 유치한 사람이 없다.

웃긴 사람의 유치한 이야기 하나.

여행 동안에 부모님께 맡긴 이안이(반려견)를 데리러 본가에 갔는데, 아빠가 눈에 실핏줄이 터져 매우 피곤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이유를 물으니 이안이 때문이란다. 이안이가 매일 새벽 세 시에 장난감을 물고 와서 놀아 달라고 보채는 바람에 잠을 못 잤다고. 이게 다 이안이를 맡기고 간 나 때문이라고 큰소리를 치는데, 나는 그런 아빠가 조금 밉상이다 싶어서 “왜 못 자? 모른 척하고 자는 거 잘하면서.”라고 말해버렸다. 이안이 돌봐 줘서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그 말이 먼저 튀어나온 것은 내가 아빠를 닮았기 때문이다. 잘 다녀왔냐, 재미있었냐, 반가운 인사 대신에 나 때문에 고생했다고 미운 소리를 하는 아빠를 똑 닮아서.

“아빠가 강아지를 보면 얼마나 봤겠어. 엄마가 다 했겠지. 아빠는 늘 생색만 내.”

내가 투덜거리자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이번에는 아빠가 돌봤어. 새벽에 일어나서 이안이랑 놀아 주고, 산책도 시켜 주고, 품에 꼭 안고 다니더라.”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 아빠를 봤다. 네 발 달린 개를 안고 다니는 것들은 다 정신병자라고 말했던 사람이 이안이를 안고 다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걷다가 힘든지 풀썩 주저앉더라고.”

아빠는 고개를 돌렸지만, 눈은 이미 이안이를 찾고 있었고, 이안이는 어느새 아빠 무릎 밑에 앉아 아빠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아빠도 그걸 봤을까?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사랑만 원하는 그 눈빛 말이다. 내가 이안이처럼 아빠 무릎 밑에 앉아서 그를 그렇게 바라봤다면 우리 사이가 조금은 달랐을까. 가끔 강아지처럼 사람 앞에 앉아 있는 상상을 한다. 사랑이 전부인 눈빛으로 앞발 대신 손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을. 나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쓸데없는 말만 하고 살아서 강아지가 되고 싶은 모양이다.

아빠 무릎 밑에 앉아 사랑한다는 말은 못 했지만, 말 대신 용돈을 넣은 봉투를 슬쩍 두고 왔다. 사랑은 눈빛 대신 봉투를 타고 아빠의 가슴 깊은 곳에 닿았을 것이다. 여행도 다녀오고 아빠 용돈도 드리고 통장은 텅텅 비었지만, 소진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금세 채워질 것 같다. 나 자신에게도, 아빠에게도 치사하진 않았으니까. 나는 웃기지만 치사하지 않고, 내 삶은 유치하지만 소소한 재미는 있다.

이것은 요즘 나의 이야기다. 나를 닮아 별거 없지만, 이제 나는 내 이야기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큰 소망 없이, 다짐 없이, 있는 그대로 당신에게 보낼 수 있으니까. 아낌없이 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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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유진(작가, 번역가)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웠다. 산문집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몽 카페』를 썼고, 아니 에르노의 소설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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