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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용의 아직도 고민] 최악의 상황을 자꾸 떠올리게 됩니다
강박사고로 인해 너무 괴롭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독자님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생각들은 강박증의 강박사고일 뿐이에요. (2021.07.06)
<채널예스>에서 격주 화요일마다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아직도 고민’ 상담 칼럼을 연재합니다. 독자 분들의 사연을 받아 채택된 고민에 따뜻한 처방을 드립니다. 익명으로 신청이 가능하며, 간단한 소개(연령 등)와 함께 고민을 보내 주세요. |
독자에게 온 사연
30대 중반 기혼 여성입니다. 현재 신경정신과에 진료 예약을 해놓은 상태이고요.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꾸준하게 강박사고 증세가 있었던 것 같아요. 불안함, 걱정에서부터 나오는 생각들인데 지금에서야 확실히 기억나는 지점은, 결혼 후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몇 가지를 떠올려 보면, 결혼 후에 신랑이 자고 있는 나를 갑자기 목을 조르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신랑은 정말 좋은 사람이고 보이는 그대로의 성격을 가졌는데도 실제와 정 반대인 폭력적이고 이중적인 모습으로 저를 폭행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짐작이지만, 제가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크게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빠가 엄마의 멱살을 잡고 장롱에 밀치는 장면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자고 있었고, 큰 소리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는데 그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라 못 본 척하며 울었더니, 엄마를 밀치던 폭력적인 아빠가 저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사람으로 변해 괜찮냐며, 달려오셨어요. 그 모습이 저에겐 굉장히 공포였던 것 같아요. 사실, 너무 어릴 때이고 그 모습이 내 꿈인지 실제인지 구분할 수는 없어요. 그 또한 강박사고 였을 수도 있고 부모님이 싸우는 장면을 잠결에 왜곡하거나 오해했을 수도 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진실에 대해서는 물어본 적은 없습니다. 진짜일까 봐 두렵기 때문이에요.
임신 후에는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려웠는데, 남들이 보면 임산부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개월 수에도 밖에 나가서 길을 걸으면 누군가 제 배를 칼로 찌르는 상상이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그게 너무 생생해요. 출산 후 한달 정도는 처음 겪는 육아 강도에 심신이 매우 지쳤고 아기를 돌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돌봄만 하기에도 벅찼어요. 놀아주거나 등의 돌봄 이상의 것들을 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때 가장 스트레스 받았던 건 누군가 나에게 ‘모성애가 없다’ 또는 ‘책임감이 없다’ 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제가 모유가 잘 안 나와서 한 달 만에 단유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강박에 관한 대상에 결혼 후에는 신랑, 출산 후에는 아이가 된 거예요. 얼마 전 시댁에 갔는데요. 시댁은 유명 아파트의 고층인데 전망이 매우 좋습니다. 아기를 안고 아파트 단지의 전망을 보다가도 문득 여기서 아기가 떨어지면 얼마나 잔인하게 죽을까, 그런 상상을 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아무렇지 않게 난다는 것이 정말 무섭고 끔찍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을 떠올릴 때는 정말 기분이 아무렇지 않고 제 표정도 너무 평온해요.
더 생각해보면 결혼 전에도 강박사고 증세는 있었던 것 같아요. 계단을 내려가면서 넘어져서 다치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을 하는 수준으로요. 그럴 땐 30년간 버릇인 손톱 물어뜯기를 하며 나름의 진정을 했는데, 결혼을 앞두고 이 버릇을 고쳤다가 결혼 6개월 후 다시 시작됐어요.
육아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인지, 예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출산 후에 이런 경험을 하는 건지. 원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에 익숙했던 제가 새로운 환경에 놓여지면서 강박사고 수위가 더 심해진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생각을 끊어내야 할까요?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처방전
많이 힘드셨죠. 오랜 기간 독자님을 괴롭힌 수많은 생각들로 인해 얼마나 힘드셨을지 참 안타깝습니다. 그 끔찍한 생각들의 대상이 하필이면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들이니, 더더욱 힘드셨겠죠. 이런 생각들로 괴로워하고, 결국 내게 이런 것들을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떠오르는 게 아닐까 자책하는 분들을 진료실에서 자주 뵙게 됩니다. 사실은 내가 배우자를 미워하는 것이 아닐까, 모성애가 없는 나는 엄마로서의 자격이 부족한 게 아닐까 걱정하시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내 본심이 아니라 그저 강박증의 증상인 강박사고일 뿐이죠.
강박사고는 내가 원치 않는 생각이나 이미지가 머릿속에 침투하듯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잔인하거나 폭력적인, 혹은 더럽거나 성적인 내용들이 흔한데, 이런 원치 않는 내용들을 아무리 지워내려 애써도 자꾸만 생생하게 떠오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됩니다.
‘에이, 그래도 결국 마음먹기 나름 아닌가? 안 떠올리려고 노력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분명 계실 거예요. 과연 생각은 얼마나 조절할 수 있는 것인지 지금 다 같이 짧은 실험을 한 번 해보죠.
다음 문장에 나오는 단어를 1분 동안 절대 떠올리지 않는 거예요.
준비되셨죠? 자, 시작합니다.
“핑크 코끼리.”
어떠셨나요? 그 구체적인 모습은 제각각이겠지만, 결국엔 아주 잠시라도 모두의 머릿속에 스쳐 갔을 거예요. 그리고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할수록 더 떠오른다는 것을 느낀 분도 계실 것이고요. 원래 그렇습니다. 생각은 내 마음대로 조절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 모두 하루 종일 쓸데없는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도저히 내 것 같지 않은 끔찍하고, 더럽고, 성적인 생각들도요. 아주 짧게 지나쳐 가기 때문에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뿐이죠. 그런데 강박증에서는 이런 원치 않는 생각들의 빈도와 강도가 훨씬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는 뇌 속의 ‘꼬리핵’이라는, 생각을 거르는 그물 같은 구조에 이상이 있기 때문이에요. 또한 우울증에서도 가장 큰 원인이 되는 세로토닌 호르몬의 이상이 강박증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과 동반되는 경우도 흔하고, 우울증처럼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SSRI) 약물치료를 통해 호전과 완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강박증은 전 인구의 2~3%가 겪게 되는 생각보다 매우 흔한 병이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질병인지도 모르는 채 길게 고통받는 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보통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발생하지만, 몇 년째 방치하다가 뒤늦게 치료받는 경우들이 대부분이에요.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부끄러운 생각들이 내가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란 잘못된 인식, 생각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서 말이죠. 이것이 정신질환의 진정 무서운 점이라고 생각해요. 질병으로 인한 것과 내 마음으로 인한 것을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에 스스로 자책하기도 하고, 타인으로부터 비난 받기도 합니다. 아프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치료의 기회까지 놓치게 되는 질환이 또 있을까요.
독자님께서 지금이라도 정신과 치료를 받기로 결정하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독자님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생각들은 강박증의 강박사고일 뿐이에요. 남편을 사랑하지 못해서, 모성애가 없어서가 아니에요. 반대로 남편과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만큼 절실하게 원치 않는 생각들이라 떠올랐던 것이에요. 오랜 기간 질병으로 힘들어하는 가운데 비난까지 받아온 내 마음을 안아 주세요. 스스로에 대한 비난을 멈춰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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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책 <어쩌다 정신과의사>를 썼고 팟캐스트 <뇌부자들>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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