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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용의 아직도 고민] 부모의 이혼이 트라우마가 됐어요
제가 완전히 드러나게 될까 봐 무서워요
모든 순간에 책임져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엄청나게 크게 받겠지만, 그것은 느낌일 뿐 꼭 내 느낌이 진실은 아니란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저 다르게, 주변의 남들처럼 해봐도 돼요. (2021.06.22)
<채널예스>에서 격주 화요일마다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아직도 고민’ 상담 칼럼을 연재합니다. 독자 분들의 사연을 받아 채택된 고민에 따뜻한 처방을 드립니다. 익명으로 신청이 가능하며, 간단한 소개(연령 등)와 함께 고민을 보내 주세요. |
스물 아홉 살 여자, 직장인입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의 이혼 과정을 눈 앞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1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 지금은 다소 기억이 흐릿해지긴 했지만, 특정 주요 장면들이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 마음 한 켠에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 생활에 지장을 줄 때도 있어 고민이 되는 부분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때 당시 가정법원 관계자분들 앞에서 진술을 받기도 했고, 남은 생을 아빠, 엄마 중 누구와 살고 싶은지 부모님이 앞에 계신 상황에서 선택을 해야하기도 했습니다. 저와 6살 차이 나는 동생은 어려서 결정권이 없었으므로, 저의 말과 행동 하나에 평생의 삶이 결정되는 부분이자 판단이 내려지는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저의 책임이 막중했습니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상사가 지나친 책임감을 요구할 때, 혹은 상사가 싫은 소리나 미운 소리를 하기 시작하면 가슴에 콕 박혀 순간적으로 눈물이 흐른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순간적으로 제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도 책임을 져야하는 장녀로 부담이 되었고, 직장 안에서도 매 순간 책임져야 일들이 연속이다 보니 가끔은 모든 게 부담되어 어디론가 도망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숨어 버리고만 싶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스트레스를 지나치게 받을 때는 차에 치여서 기절하는 상상,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서 협박하며 칼을 찌르는 상상, 물에 잠겨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 상상 같은 공상을 하곤 합니다. 이런 생각들을 멈추고 싶지만 은연 중에 하게 됩니다. 스스로 판단 하에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 같아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이번을 기회로 답변을 꼭 받아보고 싶습니다. 남을 과하게 의식하진 않지만 이런 모습들을 남에게 비춰지고 싶지 않은데, 회사에서 완전히 드러나게 될까 봐 두렵고 무서울 때가 종종 있어서 고민입니다. 도와주세요.
많이 힘드셨죠. 자신과 동생의 인생이 걸린 판단을 내리려는 중학생 아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만으로도 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렇게까지 무너져가는 가정의 모습을 긴 시간 동안 매 순간 바라본 아이의 마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글에서는 이혼의 과정만 얘기하셨지만, 아마도 그 오래전부터 잦은 다툼을 보아왔겠죠. 그리고 아이로서 응당 받아야 할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상황들이 많았을 거예요. 어린 아이가 자기 자신은 물론 동생까지 챙겨야 했던, 게다가 부모 사이의 다툼을 말리고 중재해야 했던 과거를 진료실에서 자주 듣게 됩니다. 그 환경 속에서 느낀 부담은 얼마나 컸을까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심한 다툼과 이혼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에게 더 큰 상처가 됩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아이의 뇌는 계속 성장하며, 그 성장 과정 도중 트라우마로 인한 뇌의 상처는 아주 길게 지속됩니다. 아이를 향한 신체적 폭력, 언어적 폭력, 성적 폭력, 방임, 그리고 부모 사이의 다툼. 아이에게 가능한 트라우마들 중 마지막 상황을 앞선 네 가지에 비해 훨씬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혼자서 생존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가정이 깨질 수 있다는 상황은 말 그대로 내 세상이 무너지는 위협으로 다가오거든요.
세상에 대한 걱정 없이 컸어야 할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힘듦 속에서 아이의 무의식은 한순간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한다면 무의식적인 방어기제가 발동하는 것이고, 아들러에 따르면 라이프스타일이 결정되는 순간이죠. 다양한 방향이 있습니다. 그 중압감과 분노를 외부로 분출하며 비행청소년이 되기도 하고, 친구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는 아이들도, 다 자신이 짊어지며 과도하게 책임지는 성격이 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보내주신 사연 글에서 ‘책임’이라는 단어가 유독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독자님이 바라보는 세상은 ‘책임져야만 하는 곳’이며, ‘책임지는 태도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명제가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연에서 이야기한 다양한 공상은 백일몽이라는 방어기제입니다. 보통은 유쾌한 상상을 함으로써 부정적인 현실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내 마음을 쉬게끔 하는 시도로 쓰이죠. 그런데 독자 님이 상상하는 다양한 장면들은 모두 하나같이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내용입니다. 그것도 나 자신이 적극적으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벌어진, 그래서 더 이상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상황들이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독자 님 마음속 책임감의 무게를 보여주는 증거들이죠.
평소 책임감에 얼마나 짓눌려 있길래 이런 상상들까지 필요한 걸까요. 분명 어린 시절에는 엄청난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겠지만, 지금은 과연 무엇을 이렇게까지 책임져야 하는 걸까요. 한 번 스스로 질문해 보세요. 어떤 것들이 있나요? 그것들을 책임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어떤 건가요? 그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확률은 실제로 얼마나 될까요?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정도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요? 독자 님과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진료실에서 종종 드리게 되는 질문들입니다. 분명 독자 님은 상황에 비해 과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계실 것이라 생각해요. 어린 시절 만들어진 생각의 틀에 계속 갇혀 있을 때 이런 현상이 발생하죠.
사고방식은 일종의 습관이라고 진료실에서 자주 말씀드려요. 너무도 당연하게 그래야 할 것 같아 계속 그렇게 생각해왔지만, 그 시각의 틀에서 벗어나는 순간 크게 변화할 수 있어요. 모든 순간에 책임져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엄청나게 크게 받겠지만, 그것은 느낌일 뿐 꼭 내 느낌이 진실은 아니란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저 다르게, 주변의 남들처럼 해봐도 돼요. 그래도 된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을 해보셔야만, 그 다른 경험이 쌓여갈 때 바뀌실 수 있게 될 거예요.
지금의 나를 만든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바꿀 수 없기에 내 삶은 결정되어버린 것 아니냐고 많은 분들이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지금의 성격은 온전히 과거 환경만이 만들어 낸 걸까요? 분명 환경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결국 그 속에서 어떤 모습의 사람이 될 것인지 결정은 독자님 스스로 한 것입니다. 그 힘듦 속에서 버티기 위해 책임감 강한 사람이 되는 라이프스타일을 당시의 어린 독자 님이 결정했듯, 이제 어떤 라이프스타일로 살아갈지는 지금의 독자님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나는 어찌할 수 없지만, 지금의 나는 내 손이 닿는 곳에 있으며, 지금부터의 내 모습이 쌓여 미래의 나를 만들어가니까요. 책임감의 무게에서 조금씩 벗어나 더 가벼운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의 행복과 여유들을 느끼는 삶, 굳이 상상속으로 도피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러한 삶이 독자 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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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책 <어쩌다 정신과의사>를 썼고 팟캐스트 <뇌부자들>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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