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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흥의 카피라이터와 문장] 보이는 게 다일지 몰라
<월간 채널예스> 2021년 2월호
그렇게 다 다른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어쩌면 다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동료에게 자신의 베스트를 보여주고, 서로에게서 최선을 읽어내는 것. (2021.02.04)
나방은 자신에게 주어진 네모 칸 귀퉁이로 열심히 날아가서 잠시 머물다가 다른 귀퉁이로 날아갔다.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세 번째 귀퉁이, 네 번째 귀퉁이로 날아가는 일 밖에는. 초원은 넓고 하늘은 광활한데, 저 멀리 집들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먼 바다에서는 이따금 증기선의 낭만적인 소리가 들려오는데 나방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 버지니아 울프「나방의 죽음」 중에서, 『천천히 스미는』
장 자끄 상뻬가 보들레르의 시에서 제목을 가져온 일러스트 작품집 『사치와 평온과 쾌락』을 좋아한다.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그림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나는 신께서 인생에 딱 세 가지 갖고 싶은 걸 주겠노라 하신다면 사치와 평온과 쾌락을 말하리라 뜬금없이 결심했었다. 다 갖겠다는 욕심을 욕심 없는 양 포장해서 보이고 싶어 한 내 심보를 고약하게 보셨을까? 사치와 평온과 쾌락이 동시 구현되는 삶이란 그렇게 쉬이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어쩌면 대단한 사치와 평온과 쾌락을 기대하느라 내 삶에 이미 깃들어있는 사치와 평온과 쾌락을 못 보는 건 아닐까, 하는.
오랫동안 나의 사치는 만년필이었다. 폴로셔츠의 두 번째 단추와 세 번째 단추 사이에 파커 만년필을 사선으로 꽂는 것이었다. 회의실이나 엘리베이터는 물론이고 점심을 먹는 순두부집이나 맥주집 테이블의 노가리 앞에서도, 늦은 밤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있을 때도, 파커의 화살촉은 어김없이 45도로 셔츠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종종 흰색 셔츠에 검푸르게 잉크가 번져 몇 번 입지도 않은 옷을 버리기도 했지만 그딴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을 잘 할 수만 있다면.
어느날 선배가 자판기 앞에서 물었다. “근데 조끼는 왜 입어?" 더운 날씨라 간편하게 입었으면 됐지 뭐 하러 조끼까지 입느냐는 것이었다. 조끼 입는 걸 유난히 좋아라 해서 반팔 셔츠 위로도 즐겨 입던 시절이었다. 밀크커피가 든 종이컵을 어정쩡하게 든 채로 나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하였는데 어찌 홍시냐 하오시냐며 난감해 하던 장금이의 심정이 그랬으려나? 셔츠에 없는 주머니가 조끼엔 있다는 둥, 담배 넣고 다니기에 좋다는 둥, 산만한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좋아하는 대상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내가 좋아하는 이유를 선명하게 안다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안다, 내가 셔츠 위에 조끼를 입는 진짜 이유를. 내가 나의 베스트로 보인다고 생각할 때 일에서 나의 베스트가 나온다는 믿음, 그거다. 그렇게 말하면 꼭 네가 그런다고 정우성 되냐 묻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내가 의도하는 건‘나의’ 베스트지 월드 베스트가 아니라고 보살의 마음으로 말해주면서도 그래서 이해할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스트라이프 양말을 신는 것도, 카멜 브라운 구두를 신는 것도, 드레스셔츠를 입으면 웬만하면 넥타이를 매는 것도, 크리스탈 그레이 컬러의 안경을 쓰는 것도, 실은 다 나의 베스트 컨디션을 만들어 일의 베스트를 만들어보려고 하는 짓이다. 그렇게 그날 대답했다면 선배는 뭐라 했을까? 우린 영혼의 파트너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배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벨트 없이 언제나 서스펜더를 멋지게 소화하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흔히 외양이 뭐가 중요하냐 정작 중요한 건 내면이 아니냐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남의 내면을 볼 줄 아느냐 묻는다면 어떨까? 나는 차마 그렇다고는 못하겠다. 나는 겉을 보겠다. 겉은 보이지만 안은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는 안을 꿰뚫어 볼 능력이 내겐 없다. 안에 있는 뭔가는 어떻게든 겉에 드러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문제는 내게 그걸 읽어낼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 아름다움은 보는 자의 눈에 달려 있다 하지 않던가. 겉으로 보이는 것들 중에서 무엇에 주목할지 판단하는 것도 나, 거기서 무엇을 읽어낼지 역시 나에게 달린 일이다. 그렇다면 보이지도 않는 안을 들여다보겠다고 애쓸 게 아니라, 겉으로 빤히 보이는 것들을 나는 과연 제대로 보는지 스스로 묻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겉은 중요하지 않다고 외치면서 나의 내면에 가득 찬 진정성을 왜 몰라주느냐 징징대지 말고, 드러나 보이는 나를 상대의 눈으로 먼저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내 외양의 스타일과 태도와 표정과 목소리를 그렇게. 내면에 충만한 의욕 말고,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일의 결과물을 그렇게.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여우가 분명 어린왕자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 말 바로 앞에 있는 이 문장을 더 깊게 기억해두고 싶다.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야야만 잘 보인다.” 내가 어린왕자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같은 챕터에 있는데,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넌 아무것도 얻은 게 없지 않냐는 어린왕자의 질문에 여우가 대답하는 장면이다. “얻은 게 있지. 저 밀밭의 색깔이 있으니까.”밀밭의 색깔은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이다. 보이는 게 다일지 몰라. 지금 네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이 다일지 몰라. 그 사람을 너는 정말 보고 있느냐. 그 사람의 눈빛을, 목소리를, 신발을, 정말 마음을 다하여 보느냐. 겉으로 보이는 것도 못 보고 안 보면서, 보이지 않는 내면은 무슨... 여우는 어린왕자 너머로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비 오던 날이었다. 비 올 땐 부추전에 막걸린데 뭐 그런 싱거운 얘기를 하며 통닭집에 둘러앉아 소주 한잔을 하던 저녁이었다. 부추가 오신채다, 오신채가 뭐냐? 마늘 같은 거다, 그러다가 누가 홍합이 그렇다던데 그러자, 홍합은 부추나 마늘 같은 게 아니다 맞다 덤앤더머 같은 논쟁을 하던 중이었다. 후배 심이 조용히 말했다. “홍합 말예요, 그 색깔을 보세요, 너무 예쁘지 않나요?” 좌중은 그 말에 빵 터져 그 저녁 내내 심을 홍합선생이라 부르며 웃었지만 심은 사뭇 진지했다. ‘진짠데...’ 혼잣말을 하면서. 통닭집의 심이 아니었다면 난 정말 큰일 날 뻔했다. 홍합이 예쁘다는 걸 내내 모르고 살 뻔했으니 말이다. 예뻐도 예쁜 줄 모르고, 아름다워도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채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밉고 싫고 괴로운 것들에만 주목하다가 지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아름다운 건 홍합처럼 그렇게 빤히 보이는 자리에 늘 있는데 보지를 못 하고 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광고는 여러 직종의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일이다. 유독 광고라는 일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무슨 일을 업으로 하든 인간이 하는 일에 자기 혼자 온전히 다 하는 일이란, 없다. 카피라이터는 카피라이터의 일을 하고 아트디렉터는 아트디렉터의 일을 하며 광고주는 광고주의 일을 한다. 그렇게 다 다른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어쩌면 다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동료에게 자신의 베스트를 보여주고, 서로에게서 최선을 읽어내는 것. 남들이 보기엔 그것이 세 번째 귀퉁이에서 네 번째 귀퉁이로 날아가는 나방처럼 심상해 보일지라도, 보이는 것을 보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초원은 넓고 하늘은 광활한데 저 멀리 집들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먼 바다에서 이따금 증기선의 낭만적인 소리가 들려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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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마음을 흔드는 건 다 카피다>를 쓴 카피라이터
<버지니아 울프> 등저/<강경이>,<박지홍> 편/<강경이> 역13,500원(10% + 5%)
“좋은 에세이를 읽을 때 우리는 모든 능력이 활발하게 깨어 즐거움의 햇볕을 쬐는 느낌이 든다. 또 좋은 에세이는 첫 문장부터 우리를 사로잡아 삶을 더 강렬해진 형태의 무아지경으로 빠뜨린다.” ― 버지니아 울프 영미 작가들이 펼치는 산문의 향연 현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절,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