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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혜의 꽤 괜찮은 책] 다정한 집밥이 생각나는 날에는 - 『바다거북 수프를 끓이자』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월호
맛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또한 일종의 경험이자 추억이라는 뜻이다. 미야시타 나츠의 『바다거북 수프를 끓이자』를 읽다 보면 이 점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2021.01.04)
코로나로 집콕 생활이 길어지면서 묵혀 두었던 집안일을 하나씩 해치우는 중이다. 지난 주말에는 대대적으로 집안을 정리했다. 안 쓰는 물건을 팔고, 나누고, 버리면서, 물건이 나간 자리를 쓸고 닦으면서 보냈다. 이번 주말은 냉장고 차례. 냉동실 안쪽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변해버린 떡부터 시작해 냉장실 깊숙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화석같은 음식들을 처리했다. 그러던 중 손에 잡힌 정체불명의 까만 봉다리. 뭐지 싶어 꺼내보니 얼마 전 친정에 다녀오는 길에 받아왔던 오이지 무침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엄마표 반찬. 화석(?)들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아, 이게 있었네! 하는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불현듯 어떤 서글픔이 함께 밀려왔다. 오이지 무침을 보고 있자니 요 근래 부쩍 건강이 안 좋아진 엄마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먼 훗날 엄마가 떠나고 나면 나는 분명 이 반찬을 그리워하게 되겠지, 그때마다 무척 마음이 아프겠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걸 언제까지 먹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나니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부랴부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조리법을 물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한껏 감상에 젖은 나와 다르게 엄마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다른 음식도 아니고 오이지 무침을 가지고 왜 그러느냐는 것이다. 뭘 조리법까지 알아내려 하냐며, 그냥 다른 맛있는 음식 많이 먹고 지내라고 엄마는 말했다. 그러게,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다. 사실 엄마의 오이지 무침이 어디 내놓을 정도로 특별히 맛있는 반찬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유난히 독특한 맛인 것도 아니고.
나 역시 어린 시절에는 오이지 무침을 지금만큼 즐겨 먹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성인이 되어서 이렇게 꼬박꼬박 챙겨먹게 된 것은, 오이지 무침을 보고 먼 훗날 오지도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눈물까지 흘릴 뻔한 것은, 아무래도 거기에 얽힌 기억들 때문인 것 같다. 오이지 무침은 내가 어릴 때 가장 자주 나오던 반찬 중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먹을 때마다 마치 엊그제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한다. 당시의 식탁과 거기 둘러앉은 식구들의 모습과 주변의 풍경과 냄새, 그 시절의 공기가.
그런 차원에서 어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삶에 필수적인 영양소를 섭취하는 행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넘어선 무엇 같기도 하다. 당시의 기억과, 그때의 기분과, 그 시절 놓여 있던 상황의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경험. 그렇기에 맛이 있고, 맛이 없고는 썩 중요하지 않다. 맛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또한 일종의 경험이자 추억이라는 뜻이다. 미야시타 나츠의 『바다거북 수프를 끓이자』를 읽다 보면 이 점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바다거북 수프를 끓이자』는 소설가 미야시타 나츠의 음식 에세이집이다. 나는 그의 오랜 팬으로 소설 뿐만 아니라 아이들과의 산골 체험을 적은 전작인 <신들이 노는 정원>을 아주 좋아한다. 비록 크게 빛을 보지는 못해 안타깝지만 저자의 아기자기한 유머가 빛나는 이 책을 나는 우울한 일이 있을 때마다 펼쳐서 비타민처럼 복용하곤 하는데, 그에 비해 <바다거북 수프를 끓이자>는 상대적으로 좀 더 차분하면서 따뜻한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 아이의 엄마로 음식에 관심이 많고 요리에도 조예가 깊은 저자는 소설을 쓸 때도 음식을 먹는 장면에서는 유난히 신이 난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책에서는 음식과 관련된 각종 추억들이 섬세하고도 풍성하게 펼쳐진다.
손주들에게 독특한 것을 먹이고 싶었던 할머니의 김이 들어간 샌드위치부터, 친구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해드렸다던 밤밥, 누군가가 알려준 특별한 수프 레시피, 가족들이 총출동해 씻고 닦고 절이던 매실, 사고로 멈춘 지하철에서 핸드백 안에 들어있던 찐빵에 이르기까지. 음식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읽다보면 인생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추억을 공유한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얼 해주고 싶은 마음 같은 것, 그런 마음을 기쁘게 받아주는 것 또한 일종의 배려라는 사실들에 대해서 말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일본의 식문화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는 것은 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읽고 나면 왠지 추운 날 따뜻한 수프 한 그릇을 먹고 난 뒤처럼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주 화려하거나 대단한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드라마틱하다거나 자극적인 재미가 있다고도 할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책을 덮고 나면 잔잔한 만족감이 명치 끝에서부터 시작해서 온몸에 서서히 퍼지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따뜻하고 다정하며 씩씩한 이야기를 잔뜩 섭취했기 때문일 테다.
그런 측면에서 미야시타 나츠의 글은 가정식을 닮았다. 바로 간소하고 정갈하며 소박해 보이는 집밥. 먹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소위 ‘집밥’이라고 하면 식당에서 파는 음식들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무런 부담 없이 다가와 서서히 물들어 오래도록 머무는 것이 다름아닌 집밥이기도 하다. 매우 적당한 간으로, 너무 달지도 너무 짜지도 너무 맵지도 너무 싱겁지도 않은, 그야말로 딱 적당한 간의 음식. 그릇을 싹싹 비운 후 “아, 맛있었다.” 라는 한 마디를 남기게 만드는 음식. 화려하고 고급스러우며 엄청난 감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단하고 다정하고 편안한 느낌을 남기는 음식. 그리하여 마음이 고달프거나 어려운 순간에 늘 제일 먼저 찾게 되는 그런 음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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