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칼럼] 소설가의 자기소개

<월간 채널예스>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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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해외 이민을 떠나려고 적금을 붓고 있는 청년 A씨’ 같은 사례를 기사에 쓰면 같은 아이템으로 취재 중이라며 그 A씨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방송사의 요청이 꽤 온다. (2020.12.01)

일러스트_이내

사회부 기자로 일하다 보면 방송작가의 전화를 종종 받게 된다. 자신들이 다루려는 방송 아이템에 대해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더니 내가 쓴 기사가 나왔는데, 그 기사 속의 사례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어 ‘해외 이민을 떠나려고 적금을 붓고 있는 청년 A씨’ 같은 사례를 기사에 쓰면 같은 아이템으로 취재 중이라며 그 A씨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방송사의 요청이 꽤 온다.

기자 입장에서 반가운 연락은 아니다. 우선 기자들끼리는 서로 취재원이나 사례에 해당하는 사람의 연락처를 물어보는 게 (적어도 10년 전까지는) 실례였다. 방송작가들은 기자들이랑 문화가 다른 걸까? 게다가 A씨의 연락처를 넘겨주려면 A씨의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애초에 내가 애써 취재한 사례의 주인을 얼굴도 모르는 남에게 굳이 알려줘야 할 이유는 뭐람? 특히나 상대의 첫 문장이 아래와 같다면 말이다.

 “여기 방송국인데요, ○월 ○일자에 쓴 기사의 A씨 휴대폰 번호 좀 알려주세요.”

물론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자기를 소개하는 방송작가들도 있었지만, 위에 적은 저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저런 전화를 받으면 당연히 기분이 안 좋고, 속이 꼬인 상태로 “어느 방송국의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A씨 연락처가 왜 필요하신 건데요?” 하고 되묻게 된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안 됩니다’라는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그런 전화들을 겪으면서 나는 나를 소개해야 할 때 상대가 궁금해 할 만 한 것을 먼저 한 번에 말하는 습관을 익혔다. “선생님, 지금 혹시 통화 괜찮으신가요? <동아일보> 사회부의 장강명 기자라고 합니다. 이러저러한 일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회사 이름-부서-내 이름-용건의 순서였다. 상대가 궁금해 하는 사항의 순서이기도 할 터였다.

그게 프로페셔널한 자기소개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자기소개를 반복하는 동안 그 문구가 서서히 나의 자기규정이 되어갔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어느 회사의 어떤 부서에서 일하는 신문기자’라고.

그래서 문인들의 모임에 나가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들의 자기소개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신선하고 놀라웠다. 문인들은 다들 “소설 쓰는 ○○○입니다” “시 쓰는 ○○○입니다”라는 식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처음에는 그런 소개가 낯설어서 어리둥절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멋있게 들렸다.

나는 그 전까지 문학계라는 곳이 무척 폐쇄적이고 권위적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문인들이 “몇 년도에 등단한 누구입니다”라는 식으로 자기소개를 하고 서로 누가 더 선배인지 따지지 않을까, 멋대로 공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군더더기 없이 ‘나=어떤 분야의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곧 나도 “소설 쓰는 장강명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설명하게 되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자기규정도 서서히 바뀌었으려나?

이동진 평론가의 독서 에세이 『밤은 책이다』에는 그가 트레이드마크인 빨간 뿔테 안경을 사게 된 계기가 나온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울적하게 지내다가 동네 안경점에 가서 빨간 테 안경을 처음으로 걸치게 되는 이야기다. 그는 “변화의 순간은 일종의 의식(儀式)을 필요로 할 때가 많은데, 내게 그 의식은 빨간 테 안경을 사는 일이었다”고 썼다.

나는 명함을 팠다. 사표를 내고 나서 한 달인가 두 달쯤 뒤였던 것 같다. 직함을 적어야 할 공간에는 ‘소설 씁니다’라고 적었다. ‘직함이 없는 인간’이라는 자격지심을 그렇게 극복하려 했고, 실제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나 소설가요!’ 하고 외치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장강명이라는 이름 옆에 ‘소설 씁니다’라고 적힌 그 노란색 명함을 들고 다닌다. 개도 한 마리 그려져 있다.

작가라면 보다 공적으로 자신을 소개해야 할 경우가 있다. 책을 낼 때마다 앞날개에 그걸 적어야 한다. 어떤 작가들은 작가소개 문구를 쓰는 걸 굉장히 버거워하며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반발하기도 한다. 특히 첫 책을 낼 때 부담스럽다. 어깨에 힘은 들어갔는데 경력은 별 거 없고 자랑은 하고 싶은데 눈치가 보이고……. 그러다가 ‘바람이 많이 불던 날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눈 감는 날까지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뭐 그런 문구를 적게 되나 보다. 나는 색소폰을 불고 마라톤을 몇 번 완주했다, 이런 이야기까지 적었다. 물론 지금 보면 부끄럽다.



내가 여태까지 본 중에 가장 높이 평가하는 책 앞날개의 작가소개는 임성순 작가의 에세이 『잉여롭게 쓸데없게』에 있다. 이 작가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책을 보면 알게 되겠지만, 내가 책을 구매하는 데 저자 약력이 영향을 준 적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왜 이곳에 저자 약력을 적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스마트폰으로 저자가 어떤 인간인지 검색할 수 없었던 과거의 유산일 수도 있겠다.’

그 자체로도 재치 만점인 데다가 임성순이 어떤 사람인지, 『잉여롭게 쓸데없게』라는 책이 어떤 내용일지 대강 감이 잡히면서 동시에 궁금증이 일게 만든다. 자신의 과거 작품들과 수상 경력은 그냥 ‘장편소설을 주로 쓰고 언젠가 상도 받은 적도 있다’고 한 줄로 요약했다. 패기 있고 멋있다.

막 집어든 『관계의 과학』의 저자 소개 문구도 대단히 훌륭하다. 김범준 교수는 자기소개를 책 뒷날개까지 이어지도록 길게 썼다. 이런 식이다. ‘논문 출판을 걱정했던 연구로는 〈혈액형과 성격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 〈윷놀이에서 업는 것과 잡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유리한지 살펴본 연구〉 등이 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마무리한 연구결과를 모두 학술지에 출판할 수 있었다.’ 저자에 대한 신뢰와 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면서, 통계물리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에 대한 부담은 줄어드는, 일석이조의 소개다.

내가 드러내고 싶은 나의 모습과 출판사에서 원하는 문구가 다른 경우도 있다. 특히 장르소설을 내거나 앤솔로지에 참여할 때 그런 경우가 있다. 나는 책날개에 있는 문장도 책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본문 내용과 어울리게 쓰고 싶어 한다. 그러나 편집자들은 그보다는 무슨 문학상을 받았고, 무슨 문학상도 받았고 하는 내용을 넣으려 한다. 그 심정도 이해는 간다. 그 편이 손톱만큼이라도 책 판매에 더 유리하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일러스트_이내대중은 편집자들보다 더 완강하다. 참을성도 부족하다. 사실 기억력도 그리 좋지 않다. 그러니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무언가를 팔아야 할 때는 이해하기 쉽고 짧고 독특한 소개 문구가 있으면 실체와 관계없이 덕을 본다. ‘기자 출신 소설가’ 같은. 소설가뿐 아니라 연예인, 기업인, 정치인, 모두 그렇다. 다들 처음에는 그런 카피를 간절히 바란다. “작가로서의 브랜드를 쌓으라”고 조언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자칫하면 그런 소개 문구가 자신에 대한 규정이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발랄한 상상력’ 같은 딱지를 누가 붙인다면, 글쎄, 나는 싫을 것 같다. 운신의 폭이 좁아지지 않을까. ‘발칙한 상상력’은 더 나쁘다. 그 상상력의 수준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 있음을 거꾸로 암시한다. 발랄이고 발칙이고 간에 30대 중반이 넘어가면 어색해지는 수식어다. 오래도록 소설을 쓰고 싶은 야심 있는 젊은 작가라면 그런 문제를 고민해보는 것도 좋겠다.

‘도회적 감성’이라든가 ‘사회파’라든가 ‘장애인 소설가’ 같은 소개는 어떨까(그리고 ‘기자 출신 소설가’는?). 그것은 정체성일까, 속박일까. 나는 한때 ‘월급사실주의자’라고 내 소개를 하고 다닌 적이 있다. 내가 지어냈고, 지금도 좋아하는 말이다. 내가 당대 현실에 밀착한 글을 쓰며, 내 경력도 그렇고, 무엇보다 내가 갑자기 튀어나온 별종이 아니라 한국문학에 그런 새 물결이 오고 있는데 나는 그 일선에 있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담았다. 그런데 기대와 다르게 나 혼자 쓰는 용어가 되어 버렸다.

작가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아마 작품이 곧 자기소개가 되는 경우이리라. ‘어떤 작품을 쓴 사람’으로 소개되는 것. 소설가에게 그보다 더한 성공이 있을까. 거기서 더 나아가면 작가와 작품이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난 요즘 하루키를 읽고 있어”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다. 나도 내 소개가 될 수 있을 소설, 피와 살이 있는 인간 장강명과 동의어가 될 수 있을 책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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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장강명(소설가)

기자 출신 소설가. 『한국이 싫어서』,『산 자들』, 『책 한번 써봅시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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