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떠나는 브라이언 맥나이트
이즘 특집
한결같은 걸음이 특징을 만들고, 자연스럽게 본보기를 생성했다. 그는 R&B와 팝의 요소를 버무려 이룬 부드러운 곡조, 로맨틱하게 애정을 표하는 가사를 일관되게 펼침으로써 색이 뚜렷한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2020.09.25)
미국 가수 브라이언 맥나이트(Brian McKnight)가 지난 6월 새 앨범 <Exodus>를 발표했다. 2017년에 낸 전작의 제목이 '창세기'(Genesis)였고, 이번 앨범은 '출애굽기'이니 얼핏 성경 시리즈로 여겨질 수 있겠다. 하지만 성서에 관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으며, 가스펠이나 CCM의 성격을 띠지도 않는다. 두 작품 모두 내내 연정만 표할 뿐이다. 혹여나 구약을 테마로 했다면 음악 팬들은 개신교 기준 서른일곱 장의 앨범을 더 만나야 한다. 그 기나긴 여정이 펼쳐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종교와 무관하긴 해도 '탈출'이라는 뜻의 표제에는 확실히 각별한 의미가 서려 있다. <Exodus>가 마지막 음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뮤지션 경력에 온전한 마침표를 찍는 것은 아니다. 신곡으로 채운 음반은 더 내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다. 따라서 공연이나 리메이크 음반 제작 등 여타 활동에 대한 여지는 남아 있다. 은퇴 선언에 훗날을 지혜롭게 대비해 뒀다.
자신은 그동안 누군가를 생각하며 곡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두 아이를 낳았으며, 십수 년을 같이 산 전 부인이 들으면 서러움을 넘어 기분 잡칠 발언이다. 반면에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올해 초부터 <Exodus>가 마지막 앨범임을 공언해 왔다. 그는 2003년 이혼 후 2014년 새 인연을 만나 2017년 두 번째 가약을 맺었다. 1992년 데뷔해 지금까지 달콤한 사랑 노래를 상당수 만들고 불렀지만 한 인터뷰에서 사실 현재의 아내를 만난 뒤에는 그녀가 거의 모든 노래에 영감이 됐다고 밝혔다. 지천명을 넘긴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소중한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창작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사랑과 가정 핑계를 댔으나 거듭된 상업적 부진도 음악계에서 발을 빼는 데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1993년 버네사 윌리엄스(Vanessa Williams)와 부른 드라마 <비버리힐즈의 아이들>(Beverly Hills 90210) 사운드트랙 'Love is'를 시작으로 'One last cry', 'You should be mine (Don't waste your time)', 'Back at one' 등 다수의 히트곡을 배출하며 1990년대의 대표 R&B 스타가 됐다. 차트 진입에는 실패했으나 1997년에 출시한 'Anytime'은 우리나라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새천년에 넘어와서는 빌보드 싱글 차트 100위 안에도 들지 못할 때가 허다했다. 영광의 시절보다 시련의 시기가 훨씬 길었다.
그럼에도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성적에 초연한 듯 본인만의 어법을 고수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Exodus> 역시 차분한 곡 위주로 꾸렸다. 포근한 느낌의 반주와 가성이 잘 어우러진 'Stay on ur mind', 어쿠스틱 타악기와 온화한 키보드 연주를 앞세워 담백함을 제공하는 'Hula girl (Leilani)' 적당한 리듬감으로 90년대 R&B 발라드 형식을 재현한 'When I'm gone' 등 편안하게 감상하기에 무난한 노래들이 마련돼 있다. 이따금 나오는 리드미컬한 곡도 번잡하거나 우악스럽지 않다. 앨범은 그저 순하기만 하다.
물론 듣기 편하다고 해서 다 인기를 얻는 것은 아니다. 브라이언 맥나이트의 곡들은 오늘날 R&B 동향과 멀찍이 거리를 둔다. 젊은 음악 애호가들은 대체로 이런 심심한 음악을 선호하지 않는다. 더욱이 젊은 세대는 그들과 비슷한 연령의 가수들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결국 싱글로 낸 노래들과 앨범은 어느 차트에도 입장하지 못했다. 약 30년의 음악 생활을 정리하며 작별을 고하는 자리도 그늘이 잔뜩 졌다. 그래미 시상식에 열일곱 번이나 후보로 호명됐지만 단 한 번도 상을 가져가지 못한 사실을 떠올리면 그의 퇴장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진다.
작금의 상황은 오랜 세월 한 우물만 판 것에 기인한다.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데뷔 이래 단 한 번도 컨템퍼러리 R&B 영역을 이탈한 적이 없다. <Exodus>까지 열여섯 편의 모든 앨범에 어느 정도 탄력이 있는 곡, 각 시절에 뜨던 R&B 트렌드를 흡수한 곡을 몇몇 싣곤 했으나 큰 줄기는 언제나 잠잠한 R&B, 어덜트 컨템퍼러리였다. 동료 뮤지션들의 초대를 받아 참여한 작품들도 브라이언 맥나이트 개인의 세상과 거의 동일했다. 1994년 힙합 듀오 일 알 스크래치(Ill Al Skratch)와 함께한 'I'll take her'에서도 느른한 비트를 배경으로 나긋나긋한 보컬을 입혔다. 브라이언 맥나이트의 스타일은 어디에서도 계속됐다. 이 확고한 정체성(正體性)은 안타깝게도 고루한 정체성(停滯性)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장기간 무력했고, 피날레마저 볼품없을지라도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분명히 귀한 성과를 남겼다. 한결같은 걸음이 특징을 만들고, 자연스럽게 본보기를 생성했다. 그는 R&B와 팝의 요소를 버무려 이룬 부드러운 곡조, 로맨틱하게 애정을 표하는 가사를 일관되게 펼침으로써 색이 뚜렷한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자극적이지 않은 소리와 노랫말은 R&B가 더 많은 이에게 퍼지는 데 도움이 됐다. 정교함과 절제를 겸비한 발군의 가창은 가수 지망생들에게 교범처럼 여겨진다. 지금도 많은 이가 유튜브에 브라이언 맥나이트를 커버한 영상을 올리고 있다. 브라이언 맥나이트가 지나온 길은 이처럼 빛도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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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