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주문
무엇도 나를 갈아서 할 건 아니다
무언가에 나를 의미 없이 소모시키고 있지 않은가의 여부도 다른 다수의 일들과 마찬가지로 관계에 의해 가름 나는 경우가 많으니까 어렵다. 그래서 이건 끝나지 않을 다짐이고 주문이지만 되뇐다. 계속. 나를 갈아서 해도 좋은 일은 없어. (2020.09.04)
믿을 수 없다. 2020년도 이제 100여 일 정도 남았다. 나이가 드는 것과 비례해 체감하는 시간의 흐름이 빨라진다고 하는데, 사실 그것은 경험의 누적과 연계하는 것이라 여기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그렇다. 해를 거듭할수록 신기할 정도로 그렇다. 9월 1일 - 9월 2일로 흐르던 시간이 9월 초 – 중순 - 말이 되더니, 7월 - 8월 - 9월이 됐다가, 봄 – 여름 – 가을 - 겨울이 되는 느낌. 역시 올해도 정신 차려보니 가을 문턱이다.
보통 한 해를 보내면서 이 시기가 되면 한 번의 초조함을 더 겪는다. 2월이나 3월쯤엔 ‘아니지 벌써 이렇게 해이해지지는 말자’ 하고, 하반기의 시작에는 ‘그래 남은 반년 잘 해보자’ 하다가, 1년의 2/3 정도가 지난 이 시점이 되면 ‘벌써?’ 싶으면서, ‘이대로는 안 되는데 뭐 하나는 해야 하는데’ 하며, 밀린 방학 숙제를 끌어안은 아이의 심정이 되는 것이다. (곧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연말이 올 것도 알고 있다. ‘에이 뭐 괜찮아. 내년엔 새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다시 마음먹겠지.)
올해의 숙제를 받아 들고서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은 ‘무엇도 나를 갈아서 할 건 아니다.’라는 것. 대부분 ‘나의 일’이라고 하는 건, 노는 것이든 사람을 만나는 것이든 업무든, 나의 시간과 몸과 마음을 써서 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이 내가 무엇을 했다 또는 해냈다가 아니라 ‘나를 소모하고 있다’가 되는 건 괴로우니까. 과거에는 그 구분이 모호했다. 어쩌면 그것을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 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당시에는 많은 경우에 -지금에 와서는 당최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그 과정이 아주 즐거웠고, 나는 ‘나’라기보다는 다수 중 하나였고, 또 무엇보다 9월 1일 다음은 겨울이 아니라 9월 2일이었으니까. 지금은 다르다. 머지않은 겨울을 내가 어떻게 맞게 될지가 중요한 고민거리다.
쉽지는 않다. 같은 일이라도 때에 따라 나를 쓰는 느낌이 다른데, 방심하는 사이에 스스로를 소모시키는 상황에 빠져 버리기 일쑤다. 위태롭게 잡고 있는 정신줄을 놓치기 일보 직전까지 누군가가 나를 몰아갈 때도 있고 (그냥 이걸 확 놔 버려? 싶을 때도 있고), 그럼에도 꾸역꾸역 해 넘겨야 하는 일들이 있고, 그러면서 쌓이는 화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를 갉아낸다. 그 일에 나를 갈아 넣고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 물론 생산적인 분노는 제외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무언가에 나를 의미 없이 소모시키고 있지 않은가의 여부도 다른 다수의 일들과 마찬가지로 관계에 의해 가름 나는 경우가 많으니까 어렵다. 그래서 이건 끝나지 않을 다짐이고 주문이지만 되뇐다. 계속. 나를 갈아서 해도 좋은 일은 없어.
그런 주문의 하나로 『출근길의 주문』을 다시 꺼내 읽었다.
일은 내가 아니다. (명함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일보다 내가 중요하다. (내가 나 자신을 싫어하더라도)
나는 사장이 아니다. (사장이었으면)
언제든 때려치울 수 있다. (아마도)
대출금과 할부금과 잔액 리멤버. (신이시여 제게 로또 1등 세 번!)
-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 204쪽
이것은 ‘출근길의 주문’이지만 ‘인생의 주문’. 일 대신에 다른 무엇을 대입해 볼 수도 있겠다. 더 살아보면 또 달라지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렇다. 아 동의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사장은 사양이고, 로또 1등은 한 번이면 감사하다. (누구신지, 계신지, 모르겠지만 들으셨나요? 로또 1등 한 번이요 한 번. 저기요?)
모범이 되지는 못해도 나쁜 예가 되지는 말자고 생각한다. 나를 갈아 써가며 살지 않겠다는 것의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내가 힘드니까’지만, 이런 생각도 이유의 일부다. 돌아보면 알게 모르게 앞서 걷는 사람들의 영향을 꽤 받았다. 사는 데 매뉴얼 같은 게 있지는 않으니까. 가까이에 보이는 사람과 일들이 주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 그렇다면 더욱 무엇이든 나를 갈아서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말아야지. 아무렴.
올해의 세 번째 중간 점검은 이렇게. 이것으로 숙제가 하나 더 생기는가 싶지만, 영원할 숙제지만, 꼬박 열심히 하긴 할 테니까 조금은 더 가볍게 연말을 맞았으면. 오늘도 속수무책으로 깎이지는 않는 하루를 다짐하면서, 그럼 이만, 숙제하러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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