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들었다 놨다 해도 괜찮아

놓을 줄 알면 다시 잡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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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놓고 나면 관계는 다시 손을 내미는 것 같다. 곁에 있을 사람은 어떻게든 곁에 남는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 거구나, 하고. (2020.08.28)

pixabay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의 식사는 그와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기에 내겐 메뉴가 크게 중요하진 않다. ‘밥을 먹기 위해 만난 사이’와 ‘밥을 먹으면서 나누는 사이’는 엄연히 다르다는 말이다. 물론 만나기 전 무얼 먹을지 정해보기도 하지만, 막상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음식보다는 대화가 더 기억에 남는 사람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주말 이틀 동안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았다. 밖에서 만나는 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나부터도 약속이 생기면 ‘우리 집으로 올래?’하고 물어보는 게 우선이 됐다. 분위기 좋고,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음식점에 편히 있어 본 지는 오래됐다. 좋아하던 장소들에 가지 못하는 것은 많이 아쉽지만, 편안한 차림으로 집주인의 취향과 일상이 고스란히 담긴 집에서 그가 내어주는 음식과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제법 정겹다. 특별할 게 없는 집밥 식탁도 차려준 사람의 애정과 함께 나눈 대화가 곁들여지면 엄청난 맛이 된다. 점점 이런 맛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만 가까이하려 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우정 표시는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다. 함께 밥을 먹는 자리에 성별과 나이는 쓸데없는 참견이다. 우리는 배가 고프고, 이왕이면 말이 통하는 사람과 즐겁게 식사하고 싶다. 만약 상대가 혼자 살고 있다면 집으로 초대한다. 우리 집에서 먹는 밥이 대단치는 않아도 그가 혼자 집에서 먹을 때보다 반찬이 한 가지는 더 있을 것이다. 나로서도 어차피 집에서 밥을 먹으니까 젓가락만 한 짝 더 놓으면 된다. 입이 하나 늘어도 불편할 게 없다.



내가 고수하는 인간관계는 지금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할 것, 그리고 나와 같은 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소노 아야코, 『무인도에 살 수도 없고』 중

사진첩을 주기적으로 열어보는 편이다. 내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지, 이때의 나는 무얼 했는지 복기하고 싶을 때마다. 최근 날짜까지도 등장하는 친구도 있지만, 언젠가부터 따로 만나지 않는 사람들도 꽤 많다. 한때는 꽤 오래 갈 사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과 멀어지기도 했다. 같은 말을 하고 있던 우리가 어느 순간 아무래도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고 서로 생각했던 것일 테다. 틀어진 결은 다시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들기 어렵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결을 따라가보려는 노력을 할 힘도 줄어든다.

누군가와 만나는 일이 조심스러워진 지금은 힘을 내기가 더 어렵다. 했던 약속도 취소하는 요즘에 ‘오랜만인데 우리 만날까?’하고 건네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놓는 관계가 많아지고 있고,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만 더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 같다. 내 나이대의 친구들이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의 대표인 결혼식마저 인원 제한이 있다 보니, 이전에 친하던 친구들과 얼굴을 보는 일은 더 없어질 테다. 궁금한 친구들은 꽤 있지만, 서로 말을 아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 인스타그램에서 보니 잘 사는 것 같더라, 정도로 그와의 관계를 더 이어가려 하지 않는다.

관계를 놓을 줄 아는 것은 내가 체득한 것 중 지혜로운 일 몇 순위에 드는 일이다. 놓은 관계에서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돌아보면서 이어가야 한다는 강박을 가졌던 나였으니까. 잘 맞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 관계일지라도 끊어내지 않았던 때의 나는 할 말이 없어도 말을 만들어내고, 침묵이 편하지 않아 이것저것 다 말했다. 서로가 궁금하지도 않은데 계속해야 하는 대화는 쉽게 지친다. 괜한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을 일으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않기로 했다. 끊어내는 건 아니지만 그와의 관계를 서서히 놓는다. 뭐 언젠가 다시 붙을 수도 있겠지 하는 여지를 살짝 남기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사람은 변하기도 하니까.

단념하는 것도 인생에 필요한 성숙이다. 요즘 들어 자주 드는 생각이다. 그리고 단념은 결국 자각이다. 누가 너 포기했구나, 말해주는 것은 필요 없다. 나 스스로 내가 단념했음을 인정하게 될 뿐이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노력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했지만 여기가 한계였다고 나 자신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소노 아야코, 『무인도에 살 수도 없고』


pixabay

그러다가도 다시 나와 결이 비슷해지는 때가 온다. 서로에게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시간이 오는 관계가 있을 테다. 그때 서로를 더 챙겨주면 되는 것이라는 걸 오래된 친구들과의 관계를 통해 배웠다. 다시 서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놓고 나면 이 관계는 다시 손을 내미는 것 같다. 곁에 있을 사람은 어떻게든 곁에 남는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 거구나, 하고.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 속의 친구들처럼 내내 옆에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나와 비슷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제때 찾아 가깝게 지내는 것도 각자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 요소가 아닐까. 또 잠시 멀어질 순 있겠지만 비슷한 속도로 걸어가는 순례길에서의 친구처럼 잠시 같이 걷더라도 좋다. ‘좋아하는 사람’으로 기억될 순간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고마웠구나 하는 시간이 올 줄 믿으니까. 지금 당장 같이 밥을 먹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또 밥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바깥을 피해야 하는 요즘에도 집에서나마 함께 하려는 내 친구들을 더 아껴줘야겠다. 이 상황에서도 만나는 우리는 아무래도 많이 아끼는 사이인 게 분명하다. 나와 시간을 나눠줘서,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내 주어서, 밥을 먹어주어서 고마운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도록 그들을 계속 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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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나영(도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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