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에세이스트] 6월 우수상 - 모월 모일의 푸시킨
스트레스를 푸는 나만의 비법
그때 그 시가 떠오른 건 왜였을까. 핸드폰으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찾았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였다. (2020.06.01)
채널예스가 매달 독자분들의 이야기를 공모하여 ‘에세이스트’가 될 기회를 드립니다.
대상 당선작은 『월간 채널예스』, 우수상 당선작은 웹진 <채널예스>에 게재됩니다.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은 매월 다른 주제로 진행됩니다.
2020년 6월호 주제는 ‘스트레스를 푸는 나만의 비법’입니다.
모월 모일, 중학교 동창과 안부를 물으며 연락을 주고받았다. 난 최근 한 회사로부터 느닷없는 합격 취소 연락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던 중이었다. 프리랜서지만 정규직과 비슷한 대우였고 월급다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쓰고 글에 집중하고 싶은 나는 프리랜서를 고집했고, 그 다짐은 어느덧 일 년 하고도 사 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대화는 자연스레 취업으로 흘러갔다. 드문드문 수신과 발신을 반복하는 사이 밤은 깊어갔다. 친구는 대뜸 나에게 얼마를 벌면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난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내 주머니 사정을 들킬까 봐서였다. 말을 얼버무렸다. 머리가 복잡해지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답장으로 문자 두 개가 와있었다. 그럴 거면 회사에 다니는 게 낫지 않냐고, 최소 170은 벌 텐데 프리랜서를 고집하는 이유가 따로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분명 나쁜 의도가 아님을 알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수납장 위에 올려둔 라디오와 스탠드를 켰다. 가슴 위치에 오는 수납장은 집중이 안 될 때 서서 작업하는 용도이기도 했다. 부러 책상에 앉지 않고 그 앞에 섰다. 차가운 새벽공기에 움츠러드는 어깨를 펼 생각도 하지 않고 스탠드의 백색 등에 의존해 멍하니 서 있었다. 뭐라도 적고 싶었다. 그때 그 시가 떠오른 건 왜였을까. 핸드폰으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찾았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였다. 자주 쓰던 공책을 펴 빈 곳에 만년필로 시를 적어 내려갔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만년필의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까만 잉크가 종이를 물들였다. 단어 하나하나를 그려보듯 몇 번이고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적었다. 나도 모르게 입으로 시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한없이 작아진 나를 마주하니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혹시 내가 틀린 건 아닐까. 노력을 기울여도 결실이 없는 나날이었다. 돌연 취소된 입사부터 일 년을 끝으로 계약이 만료된 회사, 월세와 관리비, 이번 달 들어올 급여 등을 떠올렸다. 회사에 다니면 당장은 편해지겠지만 같은 고민을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회사 다니는 건 원래 힘들어. 원래 그래’ 내가 고충을 토로하면 돌아오는 답변이 떠올랐다. 힘들고 어려운 걸 당연하게 여기고 싶지 않았다. 내 몸과 마음이 힘들다면 다르게 살아볼 필요가 있었다. 내 대안은 회사가 아닌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힘들고 지쳐도 프리랜서로 조금 더 일해 보고 싶었다.
그러는 사이 시를 다섯 번을 더 적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종이 위에 뭔가를 적는 일이었다. 여백에는 같은 시구를 빼곡히 채워 넣었다. 헝클어졌던 마음이 아주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문구를 공책에 적어둔 적은 있지만 이렇게 내 맘을 토해내듯 적은 건 처음이었다. 흰 종이에 번져가는 잉크처럼 내 감정이 종이 위에 고스란히 적힌 것 같았다. 그 뒤로도 뭔가를 덜어내고 싶을 때 나는 종이와 펜을 찾았다.
오랜만에 공책을 넘기며 그 페이지를 찾았다. 조용한 새벽, 종이 위를 사각거리며 움직이던 펜촉 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 날의 감정도 다시금 전해진다. 계절은 어느새 겨울이 지나 봄이다. 푸시킨의 시처럼 이 순간이 소중해질 아득히 먼 어느 날을 생각해본다. 힘들고 어려운 때이지만 나를 붙잡는 수많은 글을 생각하려 한다. 그럴 때면 모월 모일의 새벽처럼, 펜을 들어 적어 내려갈 것이다.
이진희 ‘햇빛과 약간의 오후를 즐기고 나를 선택해요’ 우도의 책방에서 본 문구를 사랑하는 사람. 어쩐지 계속 글을 쓰는 삶을 선택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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