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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칼럼] 단락 강박증 환자의 고백
<월간 채널예스> 2020년 5월호
지금까지 이 코너에 내가 쓴 글들은 지금 이 글과 다른 한 편을 제외하면 9단락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 이 글은 아래 긴 인용 때문에 8단락이다. (2020. 05.11)
글 쓸 때 생각의 최소 단위가 한 문장이다. 전체 구성과 주제 전개의 최소 단위가 한 단락이다. 글을 내용에 따라 나눌 때 짧은 이야기 한 토막이 한 단락이다. 바꿔 말해 한 단락만으로도 짧은 이야기 하나가 되는 것이 좋다. 잘 쓴 글은 한 단락만 따로 떼어놓고 읽어보아도 완결성이 어느 정도 있다. 비교적 완결성 있는 단락들이 잘 연결되어 있으면 좋은 글이다.
나는 ‘단락 길이 강박증(?)’이 있다. 가급적 각 단락 길이, 분량을 비슷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 처음엔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다. 지금은 의식하지 않아도 한 단락 길이는 원고지 1~1.2매 정도이며 1.5매 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어떨 때는 강박적으로 각 단락 분량을 정확히 같게 만든다. 이를 위해 각 단락의 글자 수를 강박적으로(!) 미세 조정할 때도 있다.
물론 이건 글 쓰는 사람 각자 스타일 소관이다. 다만 내 기준으론 한 단락 1~1.2매 정도가 쓰기도 읽기도 편하다. 단락이라는 ‘부분’과 글 한 편이라는 ‘전체’가 서로 응하며 돕는 글이 좋다. 그런 글이 ‘짜임새 좋은 글’이다.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글’이다. 한 조각 한 조각(문장)을 잘 결합해 부분을(단락) 만들고, 그 부분들을 다시 잘 연결 지어 만드는 레고 완구 비슷하다.
지금까지 이 코너에 내가 쓴 글들은 지금 이 글과 다른 한 편을 제외하면 9단락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 이 글은 아래 긴 인용 때문에 8단락이다. 다른 한 편도 10단락이니 모든 글의 한 단락 길이가 거의 같다. 내가 쓰는 글 대부분이 그러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스타일, 그것도 다분히 강박적인 스타일이자 습관일 뿐이니 본받을 필요 없다.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는 독자라면 정신의 바벨탑에 듀이 십진분류법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미로 같이 복잡한 서가 사이를 걷고 있으면 아주 오래전에 읽은 방대하고 수없이 많은 책을 덮고 있는 티끌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토끼처럼 생각이 우리 앞으로 튀어나오는 법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에 내가 읽은 모든 책과 내가 품은 모든 생각을, 즉 나 자신의 전부를 쏟아부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가 평생 흡수한 자료를 일일이 항목을 밝혀 완벽한 참고문헌을 작성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위해 일부러 찾아본 자료들도 있다. 나는 주로 일차적인 자료, 즉 내가 다루는 인물이 쓴 편지, 일기, 개인적인 글들을 참고하려 했다. 대부분 저작권이 소멸된 글들이다. 그리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전기와 이차 논문의 도움을 받았다. 후자의 저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원고지 2.3매 분량 한 단락이다. 내 기준으론 길지만 대단히 훌륭한 단락이자 글이며 또한 번역이다.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 (지여울 옮김, 다른)의 ‘참고문헌’ 부분. ‘강력 추천’하고픈 책이다. 요컨대 한 단락의 길고 짧음이 글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단락 길이에 집착하는 개인적 이유는 첫째, 한 부분에 힘을 싣기 보다는 글 전체의 균형감을 확보하고 싶기 때문이다.
둘째, 내 생각의 갈피를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 다른 작업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지만 글에서도 형식이 내용을 좌우하곤 한다. 단락 길이란 글의 양적 형식 측면이 될 터인데, 그 측면을 일부러라도 신경 씀으로써 나의 생각 그러니까 글의 내용을 좀 더 깔끔하고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나에게 단락 길이는 내 생각을 달아보고 재보는 저울이자 자라고 할 수 있겠다.
셋째, 내 글을 읽는 독자에 대한 배려, 일종의 서비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기나 개인적 비망록을 제외하면 사실상 모든 글은 독자를 전제로 한다. 더구나 글 쓰는 일이 직업인 작가라면 자신의 글을 돈을 주고 구매하는, 글 소비자로서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글 소비자들께서 내 글을 가급적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하려면?’ 단락 길이 강박증은 이 고민의 결과로 얻은 증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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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칼럼니스트, 번역가, 작가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쓴 책으로는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 『탐서주의자의 책』 등이 있다.
<마리아 포포바> 저/<지여울> 역39,6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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